103화.
메이슨 공작의 말은 부모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듣기엔 무례한 말이었다.
알버트가 매달린 것도 아니고, 리암이 더 좋아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 메이슨 공작은 리암을 제지하는 대신 만만한 알버트에게 상처 주기를 택한 것이다.
알버트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역시나, 이야기를 듣는 알버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메이슨 공작은 알버트에게 그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 되새겨 준 셈이었다.
놀란 건 이야기를 들은 리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을 했다.
바깥에 꽤 오래 서 있었던 탓에 리암의 뺨은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배신당한 표정에서 리암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일 것 같았던 아버지가 자신의 우상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자신 때문에.
하지만 알버트의 얼굴에 생긴 균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앞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띠던 얼굴은 무채색이 되었다.
덤덤한 얼굴로 돌아온 알버트는 아직 짓누르지 못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주시는 선물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메이슨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뻔뻔히 대꾸했다. 사람을 오래 대한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유연하게 넘길 줄 알았다.
“이에 대한 사례는 따로 할 것입니다. 오늘 가져온 선물은 오롯이 리암과 대련을 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일 뿐입니다.”
멀리서도 알버트가 제 감정을 얼마나 억누르고 있는지 보였다. 나는 상처받은 리암과 알버트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 드린 것을 우선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메이슨 공작이 한 대 치고 싶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가 가져온 물건에 퍽 자신이 있는 모양새였다.
“싫으시다면 가져가겠습니다.”
메이슨 공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군말 없이 받아들였던 알버트가 이번 기회도 쉬이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메이슨 공작이 그에게 내민 것은 지금 알버트에게 가장 절실한 것들이었으니까.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알버트 앞에 놓인 세상은 시궁창이었다.
이와 함께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살렸으니까.
나는 그가 살길 바랐다. 이 순간을 모두 이겨내고 내가 아는 알버트가 되어 나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혼란스럽다. 그를 살리는 내 선택은 과연, 그를 위한 일이었나.
나의 이기심이 아니었나.
알버트는 후 숨을 내쉰 후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대답은 메이슨 소공작에게 달렸지요.”
알버트의 말에 메이슨 공작의 눈이 번뜩였다.
“거절하신다는 겁니까.”
“공작님께서 하시는 이야기가 현왕 폐하를 모욕하는 것임은 알고 계시지요. 아직 왕자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야기의 화제를 완전히 돌려 메이슨 공작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이는 명백한 거절이기도 했다.
알버트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메이슨 공작이 팔짱을 끼며 침묵했다.
그때, 리암이 창문을 팍 열었다. 창문 턱을 훌쩍 뛰어넘은 그는 추위에 새빨개진 얼굴로 메이슨 공작 앞에 섰다.
“아버지, 지금까지 하신 말 모두 사과하십시오.”
“리암, 너….”
“마차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수상쩍으셔서요.”
공작의 말을 따르지 않았지만 리암의 태도는 퍽 당당했다.
“아버지도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백작님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리암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버트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리암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리암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알버트에게 고개를 깊게 숙여 보였다.
“아버지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끝까지 메이슨 공작은 사과하지 않았다. 알버트에게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긴 후 떠나갔다.
리암을 보는 메이슨 공작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그들의 뒤를 쫓았다.
내 생각대로였다. 덤덤한 얼굴로 마차에 탄 메이슨 공작은 리암의 뺨을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리암의 얼굴이 옆으로 휙 돌아갔다.
“이게 모두 누굴 위해 하는 일인데….”
분노가 일렁이는 눈빛에는 어긋난 부성애가 보였다. 하지만 리암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왜 그렇게 소백작님을 싫어하십니까. 좋으신 분입니다. 저는 계속 그분과 교류하고 알아가고 싶습니다.”
리암의 말에 메이슨 공작은 긴 숨을 내쉬었다.
“너무 위험한 위치에 있는 자다. 도박에 약물까지 손을 댄 그레이 부부는 금방 죽을 거고, 그의 혈통은 현왕에게 이용하기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란 말이다.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분으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말조심하거라, 리암.”
리암의 호기로운 말에 메이슨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전 알버트에게 직접 언급한 일이면서 리암이 입에 담는 건 무서운 모양이었다.
리암은 여전히 곧은 눈으로 메이슨 공작을 보고 있었다.
메이슨 공작도 알았을 것이다. 리암의 마음을 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걸.
잠시 생각에 잠겼던 메이슨 공작이 턱을 쓰다듬다 중얼거렸다.
“이번 축제 이후 예프넨 후작의 별장에서 연회가 열린다. 너도 갈 것이다.”
“…예? 제가 왜 그런 곳을.”
리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현왕 폐하도 참석하실 거다. 그리고 소백작이 참석하는 자리이기도 하지.”
“…연회에서 만나 뵌 적은 별로 없는데.”
알버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리암이 해맑게 웃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리암이 힘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분들이 참석하시는 자리인가요?”
“현왕의 측근들이지. 소규모의 연회가 될 것이다. 메이슨 가는 중립으로서 가는 것이니 그곳에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도록 해라.”
“예, 알고 있습니다.”
리암이 씩씩하게 답하자 메이슨 공작이 차갑게 덧붙였다.
“네가 그곳에서 무얼 보더라도.”
“…….”
“대놓고 나서서는 안 된다.”
연회에 함께 가는 아들에게 할 만한 충고는 아니었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리암이 미간을 좁혔다. 그제야 이 연회의 이상한 점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계속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그냥 넘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가 참석하는 자리인데 현왕인 로스투라투의 측근, 예프넨 후작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니.
“…어째서 나서면 안 됩니까.”
“그곳에서 소백작의 편을 드는 건 반역으로 간주될 테니까.”
“예?”
“전하께서 참석하시는 자리다. 아무것도 간섭하지 말거라. 그럼 우리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다.”
메이슨 공작의 말에 상기되었던 리암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리암, 정의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 그곳에서 소백작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끼거라. 네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아버지라고 볼 수 없는 잔인한 말이었다.
리암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까 전 알버트에게 한 말처럼, 메이슨 공작이 자신에게 한 말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메이슨 공작은 리암을 다독이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모두 널 생각해서 하는 일이다.”
하, 지금껏 열심히 깎아내려 놓고서 나중에 사랑한다 말하면 다 해결돼? 어이가 없다.
아까 전 알버트를 대한 태도도 그렇고 이대로 넘기기에는 열이 뻗쳤다.
나는 이를 악물며 주문을 외웠다.
“일렉트리시티.”
전기충격기에 맞은 것처럼 기절이라도 했으면 했는데….
“어?”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
혹시 주문을 잘못 외웠나 싶어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메이슨 공작은 아무 일 없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영혼 상태라서 그런 거야?”
나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한 가지 더 깨달았다.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알버트뿐이었다.
아무래도 에밋에게 내게 걸린 마법에 대해 더 물어봐야겠다.
***
메이슨 공작은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 속에 흐르는 침묵을 보며 나는 내가 오늘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전부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방 안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메이슨 공작이 한 말을 떠올렸다.
예프넨 후작이 보낼 연회의 초대장. 알버트가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거라 했지.
로스투라투가 준비한 자리인 것으로 보아, 이번 연회가 알버트의 삶에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은 분명했다.
본능적으로 이 연회가 내 시련의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알버트에게 그만큼 치욕적인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투라투가 좋은 의미로 예프넨 후작과 작당해 알버트를 초대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미치겠네.”
머리를 부여잡은 나는 작게 신음했다.
이 순간에도 나는 고민해야 했다. 지금 알버트가 그 연회에 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 미래를 거스르는 일인지, 아닌지.
어린 알버트가 상처받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하지만 내 존재가 사라지거나, 미래의 알버트가 바뀌기는 바라지는 않는다.
어렵다.
혼자서 고민해 보았자 해결되는 일은 없다. 죄책감만 더해질 뿐. 나는 결국 알버트 앞에 섰다.
우선 알버트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뭐야. 간 줄 알았더니.”
나를 흘끔 본 알버트가 선선히 대꾸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눈매가 느슨해져 있었다.
그는 항상 내가 떠날 것을 두려워한다.
…미래의 너를 만나러 가는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것 참 곤란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알버트. 예프넨 후작이 여는 연회에 대해 알고 있어?”
“…오늘 초대장이 도착했는데 왜.”
“아무래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야. 너를 겨냥한 것인 듯하고.”
말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혹 뭔가 달라지는 건 아닐까? 지금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깜빡이다 덤덤히 답했다.
“어쨌든 가야 해, 나는. 예프넨 후작이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줬거든. 그래서 이번 초대는 거절할 수 없어.”
그 말에 안심이 되는 나 자신이 싫었다.
그곳에 뭐가 기다릴지도 모르면서, 그가 연회에 가야 미래가 바뀌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아까 전 일도 기분 안 좋았을 텐데, 그의 기분이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역시나 이 저택을 벗어나 바깥을 구경하는 건 아닐까.
같이 쇼핑 나간 날도 즐거워 보였는데.
“알버트, 우리 나갔다 오자.”
“…뭐?”
알버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