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어린 리암은 정말 소설 속에 나오는 소공자 그 자체였다.
보송보송한 솜털이 남아 있을 듯한 피부와 잘 빗어 넘긴 흑발, 청량하기 그지없는 녹색 눈동자에 어울리는 기품이 대단했다.
살짝 그을린 피부가 여전히 잘 어울렸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백작님!”
알버트를 마주한 리암은 한참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인사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생각보다 앳된 목소리였다.
미성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꽤 다이내믹한 변성기를 겪어 지금의 목소리를 갖게 된 모양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밝은 인상이라 놀랐다. 리암의 얼굴에 아직 세월에 찌들지 않은 소년미가 보였다.
공작의 아들로서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들뜬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알버트를 보는 눈빛은 마치 동경하던 우상을 만난 사람 같았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리암 옆에 흑발의 중년 남성이 연이어 인사했다.
리암처럼 고개를 깊숙이 숙이지는 않았지만 알버트에게 예를 지키는 모습이 기품 있어 보였다.
“다소 무례한 요청이었음에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소백작님.”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할 말입니다. 제가 메이슨 공작가의 후계자를 도와드릴 수 있다니 기쁩니다.”
알버트는 소백작이자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일원으로 현재의 리암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위치는 생각보다 애매했다.
소백작이라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돈을 꾸러 다니는 신세인 것과 비교해, 메이슨 공작가의 리암은 공작가를 물려받을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고귀한 도련님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알버트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을 것 같지만 그는 너무 세상을 많이 겪었다.
“그레이 가의 별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작님.”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상투적인 인사가 오고 간 후 메이슨 공작이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간소하게나마 감사의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텐이 말했던 물질적인 도움이 이것인 모양이다. 알버트는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들이 저택 안으로 연신 선물 상자를 옮겼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일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알버트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시종에게서 고개를 돌려 공작을 마주했다.
“안에 들어가시면 제 유모가 맞이할 겁니다. 금방 대련을 끝낼 테니 혹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공작님?”
“제 아들의 대련인데 당연하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참관을 해도 되겠습니까?”
메이슨 공작은 리암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물었다.
리암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공작에게 작은 소리로 뭐라 속삭였다. 아마 보지 말라는 말 같았다.
부자 사이는 보기 좋았다. 내가 여기서 본 인간관계 중에 가장 정상으로 보였다.
나는 힐끔 알버트를 보았다.
그는 리암과 메이슨 공작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리암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감정이었다.
한때 알았지만, 다시 가질 수 없을 거란 것을 너무 잘 아는 행복. 난 그를 넌지시 불렀다.
“알버트.”
알버트는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을 들었어도 지금 사람들과 이야기 중이니 대꾸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 나한테 화가 풀리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그를 위로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귓가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넌 내가 있잖아.”
파드득 몸을 떨며 놀란 알버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버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가 앞에 리암과 메이슨 공작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내곤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리암은 알버트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메이슨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가 황급히 변명했다.
“버, 벌레가 있었습니다. 대련을 보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럼 뒤뜰로 가시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알버트가 먼저 앞장서며 길을 안내했다. 이를 악무는 모습이 아무래도 내가 한 일에 단단히 놀란 모양이었다.
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씐 모양인지, 그것조차 귀여웠다. 살벌한 기운을 뿜어내도 미래의 그보다 덜했다.
지금 알버트는 아기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앞에서 말할 걸 그랬나. 하지만 알버트가 홍당무처럼 변한 걸 또 언제 보겠어. 미래의 그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 지금의 그가 새로웠다.
그가 웃는 모습이 좋지만, 당황하는 모습도 때로 쓸쓸한 모습도 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우면서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린 그가 미래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겪었을 시간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메이슨 공작은 뒤뜰의 벤치에 앉았다. 공터는 에밋의 도움을 받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옆으로 치운 눈이 있었지만 사람 둘이 대련할 만한 공간은 충분했다.
다행히 오늘은 햇빛이 따스한 날이었다. 그늘에 가면 추웠지만 햇빛이 있는 곳은 나름 따듯했다.
알버트는 자신이 준비해 두었던 목검을 들었다.
“…진검으로는 받아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자존심 상한 듯 리암이 작게 중얼거렸다. 알버트가 멈칫하다 답했다.
“…목검을 이기신다면, 진검으로 승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리암의 자존심을 건드리려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목검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조금 생각하니 금세 이유가 이해가 갔다.
…검 가격이 싼 것은 아니겠지. 도박에 돈을 쏟아붓고 있는 그레이 가의 사람들이 알버트의 검을 위한 돈을 마련해 두었을 리 없었다. 그레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는 메이슨 공작도 눈치챘을 것이다. 알버트를 바라보는 메이슨 공작의 시선이 묘했다.
리암은 입술을 짓씹은 후 자신의 검을 똑바로 움켜쥐었다. 알버트가 목검을 들고 반대편에 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벤치에 앉은 메이슨 공작이 심사를 보았다.
그의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리암이 알버트에게 달려들었다. 앞으로 나서는 속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선공을 던지는 리암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알버트는 옆으로 비켜서며 그의 검을 가볍게 피했다.
목검으로 진검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무게와 재질이 전혀 달랐으니까. 해서 알버트는 대신 리암이 검을 앞으로 내려치며 빈 옆구리를 공략했다.
리암의 옆구리에 목검이 정확히 들어갔다. 그의 살에 닿을 만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알버트가 멈췄다.
옆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속도감에 잠시 눈을 감았던 리암이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떴다.
“…왜 멈추신 겁니까?”
“오늘 대련을 해드린다고 했지, 부상을 입게 해드린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알버트는 목검을 원래대로 잡으며 말했다. 리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해도 괜찮습니다. 전력을 다해주십시오.”
“진심으로 그러길 바라신다면, 나중에 수련을 끝난 후에 찾아와 주십시오.”
방금 모습만 보아도 둘의 실력 차이는 극명했다.
보는 나와 메이슨 공작도 느꼈지만 사실 제일 극명하게 느낀 사람은 리암 그 자신일 것이다.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데….”
리암이 속삭이듯 말했다. 고개를 떨구며 손에 쥔 검을 더 꽉 잡는 모습이 마치 모차르트 앞의 살리에리, 천재 앞의 범재였다.
알버트는 너무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일 뿐, 리암이 무력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알버트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윽고 알버트는 입술을 짓누르다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알버트가 되려 리암을 격려하는 모습이 얼떨떨했다.
미래의 그야 칭찬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알버트는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모든 것에 어색한 인물이었으므로.
“정말인가요?”
알버트의 말에 리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다음번에도 꼭 같이 대련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알버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이 해맑게 웃었다. 미래의 무뚝뚝한 모습과 다른 청량한 미소였다.
“수고했다, 리암. 소백작님과 이야기를 해야 하니 먼저 돌아가겠느냐. 네가 있으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실 듯하구나.”
“…알겠습니다.”
메이슨 공작의 말을 따를 것 같지 않았던 리암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기 있는 게 알버트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메이슨 공작이 이곳에 온 건 그저 리암과 알버트의 대련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던 듯했다.
리암이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메이슨 공작은 안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차를 한 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알버트도 이를 눈치챈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메이슨 공작이 작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레텐이 호들갑을 떨며 미리 준비했던 다과를 차리기 시작했다. 준비된 차와 다과의 수준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저택에 구비되어 있었던 식기는 고급스러운 장식이 있었고 차도 색깔이 은은하게 잘 우러났다. 나름 신경을 쓴 티가 났다.
그레텐은 메이슨 공작에게 선물 정말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 후 싱글벙글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방 안에 둘만 남고 침묵이 흘렀다.
알버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 메이슨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았다. 둘 다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 강했다.
“제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알버트의 말에 메이슨 공작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백작님, 저는 싸움에 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더없이 진지했다.
“권력 싸움에 끼는 건 삶에 파멸을 불러올 뿐이지요. 부끄럽지만 저는 방관자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메이슨 공작의 말을 듣는 것도 잠시, 나는 창문 사이로 살짝 보이는 흑발을 발견했다.
매우 낯이 익었다. 나는 얼른 창문 가까이 다가섰다.
리암이었다. 아까 마차로 돌아갔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얘길 하시려고….”
투덜거린 리암은 창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방을 청소한 후 제대로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틈이 있었다. 그 틈으로 리암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알버트와 메이슨 공작은 말을 이어갔다.
“제 아들과 연을 완전히 끊어주십시오.”
나는 메이슨 공작도 미래를 예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현왕의 미래와 알버트의 앞에 펼쳐질 앞날을, 그레텐과 마찬가지로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아들인 리암이 얼마나 알버트를 좋아하는지도.
“저는 그 아이가 정치의 한복판에 떨어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리암은 공작이고, 알버트와 꽤 오랜 시간 알았음에도 그가 탑에 갇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리암에게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공작위를 완전히 물려받기 전까지는 알버트를 도울 수 없던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