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알버트는 정말 얼떨떨한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놀러 오라고 하셨으니 시간을 냈습니다.”
남자는 깍듯하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의 분위기가 묘했다.
단발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남자에게서는 다소 중성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몸은 체격이 좋다기보다는 조금 마른 듯했다.
하지만 높게 치켜 올라간 고양이상 눈매와 굳게 다물린 입술은 날카로운 인상을 주어 감히 얕잡아 볼 수 없게 했다.
남자만큼이나 내 시선을 빼앗은 건, 그의 옆에 있는 새끼 블랙 드래곤이었다. 남자는 새끼 블랙 드래곤을 품에 안으며 웃었다.
“블래키와는 오랜만이시지요?”
새끼 블랙 드래곤, 아니 블래키가 알버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알버트는 심드렁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 왜 오신 건가요.”
“진짜, 제자이신 소백작님의 초대를 받아 온 겁니다?”
남자는 블래키를 안은 채 대꾸했다. 물론 알버트는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알버트의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던 남자는 결국 순순히 본심을 실토했다.
“제 시련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소백작님 얼굴을 뵈러 왔습니다.”
시련이라는 말에 나는 바로 상황을 읽었다.
이때였구나. 알버트가 스승의 죽음을 겪게 된 것이.
그는 자신의 스승이 드래곤이 성장할 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했었다.
나와 다르게 눈앞의 남자는 육체가 있었다.
몇 번이나 강조되었던 고통을 모두 겪고 나서 남자는 생을 마감하기를 택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남자는 미래를 모르는 것처럼 웃고 있었으니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난감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남자가 정확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옆에 계신 분 소개는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보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남자는 블래키를 알버트의 품에 안기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백작님, 마침 생각났습니다. 가게에서 찾아야 할 모자가 있는데 저 대신 다녀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칭은 깍듯한 소백작이고 말투도 우아하여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지만 알버트를 대하는 태도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난감한 얼굴을 하던 남자는 알버트의 시선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소백작님 손님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기 때문이 맞습니다.”
알버트는 그의 스승이 순순히 인정하자 오히려 안심하는 기색을 보이며 멀어졌다.
나를 두고 가는 모습에서 알버트가 이 남자를 얼마나 믿는지 느껴졌다.
“드래곤의 계약자를 보는 건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에밋입니다.”
에밋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인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은 알버트 외의 다른 이에게 보일 수 없을 텐데 이 남자는 어째서 예외인 걸까.
“그런데… 제가 어떻게 보이는 건가요?”
“제가 그 마법진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
내가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차고 있는 그 팔찌에 걸린 건 제가 연인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던 것입니다. 가만 보자… 만든 지 350년 정도 되었군요. 알버트의 마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미래에 꽤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나 봅니다.”
남자의 이야기는 묘했다.
그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300년이 넘는 세월을 이야기하고, 미래와 과거에 대해 말했다.
정체가 대체 무엇이길래? 드래곤의 계약자는 아직 드래곤과 수명을 공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저는 현자입니다. 드래곤의 계약자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사람의 범주를 뛰어넘는 마력으로 인간을 초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실례지만 현재 나이, 아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지금까지 5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에밋이 입을 쩍 벌린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가 스승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적 없어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과거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 사실들이었다.
“제가 드래곤의 계약자인 건 어떻게 아셨던 건가요?”
“손등에 문양이 있으니까요.”
에밋이 시선을 흘끔 내 손등으로 돌렸다.
“손등의 문양이 평소보다 선명한 것도 그렇고, 전혀 다른 곳에서 오신 듯한 이질적인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시련을 겪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의 관찰력은 대단했다. 아니, 그가 살아온 세월이 대단한 것일까.
“그리고 에밋 님은 시련을 겪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보신 듯한데요.”
“맞습니다. 오래 살수록 보는 게 많아지니까요.”
내 말에 에밋이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그를 만난 게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는 시련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본래 겪었던 육체의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왜 과거에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서 여태 알버트와 함께한 시간은 시련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알버트에게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에.
혹 이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다.
나는 슬쩍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과거에 온 것치고는 그리 어려운 일이 없어서 대체 뭐가 시련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영혼이라서 겪는 고통이 없기도 하고요.”
내 말에 에밋은 입술을 지그시 다물더니 나를 빤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저는 당신이 과거로 온 것 자체가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에밋은 저 멀리 걸어오고 있는 알버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과거라는 건, 당신의 행동에 따라 미래가 변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알버트를 구하는 건 이미 알고 있던 미래였었다.
내가 그와 매일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에밋은 찬찬히 말을 이었다.
“어떤 과거를 변화시키느냐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지요.”
“…….”
“그 선택이 당신의 존재를 지워 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말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내 선택이, 미래의 내 존재를 완전히 지워 버릴 수도 있다니.
“어떻게 행동하시느냐에 따라 소백작님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아직 어린 소백작님은 아직 하얀 도화지 같아서 어떻게 크실지 모르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전, 미래의 알버트가 나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나만 챙기는 폭군이 되면 어쩌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될 수 있다니.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긴 에밋이 턱을 매만졌다.
“아마 몇 번 더 겪지 않으실까 합니다. 당신이 바꾸고 싶어 하는 과거가 눈앞에 나타나겠지요.”
나는 새삼스레 알버트가 에밋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에밋은 내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했다. 그리고 내게 조언을 건넸다.
그가 알버트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피워내는 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갈등하실 겁니다. 이 과거는 과연 미래에 존재했던 현실의 일부일까, 아니면 내가 참견하면 안 될 과거의 편린일까.”
알버트를 구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 뒤 내가 한 행동은 알버트가 했었던 이야기와 비슷했다. 아직까지 내가 바꾼 과거는 없었다.
에밋의 눈이 날카로이 반짝였다.
“계속될 선택 속에서 현명히 행동하셔야 할 겁니다. 바뀐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래를 최대한 바꾸지 않으면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거겠지요.”
“…….”
“알버트를 위해서.”
에밋이 나지막이 던진 말에 나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알버트를 소백작이라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 것에 놀라서였다.
그가 부른 알버트의 이름에는 퍽 알기 쉬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알버트를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알버트가 많이 따르는 것 같더군요.”
“…에밋 님도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내 말에 에밋은 말없이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따듯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여태 내게 해준 이야기만으로도 그랬다.
알버트에게 그의 스승의 죽음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드래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나는 갈등했다. 그가 죽는다는 것을 말해줘야 할까? 내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게 미래에 큰 변화를 일으킬까?
하지만 에밋이 죽는다면 알버트는 슬퍼할 것이다. 내가 알려준다 해서 시련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에 빠졌던 나는 소름이 돋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고민하고 있다. 알버트의 스승이 죽는 것은 이미 확정되어 있던 미래다.
그 미래를 바꾼다 해도, 나는 미래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알버트가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의 죽음을 그냥 넘길 수 있을까?
내 시련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단시간에 결정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직 시간이 있다.
알버트가 내가 아는 알버트로 남을 수 있고,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주의해야 할 사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뒤, 에밋에게 그의 미래를 말해줘야 할지 정해도 괜찮으리라.
시름에 잠겨 있는데, 에밋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가 먼저 꺼낼 줄 몰랐던 이야기이기에 나는 흠칫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에밋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계획대로 삶을 잘 마감한 모양입니다.”
그가 뒤에 꺼내놓은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 없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그렇게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
“그저 제가 있었던 땅의 일부로 돌아가는 삶의 순리일 뿐입니다.”
오랫동안 살아온 현자답게 그의 모습은 초연했다.
“평생 소백작님에게는 비밀이 될 테지만요.”
“어째서요?”
알버트는 당신이 괴롭게 죽은 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계획된 죽음이었다니.
당신은 알버트가 왜 그렇게 알길 바랐던 것일까.
에밋의 눈이 애정을 담은 채 한껏 가까워진 알버트를 응시했다.
“알버트는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진심 어린 속삭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