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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98화 (98/156)

98화.

슈버트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알버트를 보다가 체념한 듯 몸에 힘을 풀었다.

“데려가고 싶으면 질질 끌어서 데려가고, 아니면 오늘 여기서 잘 테니까 그대로 놔둬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슈버트의 말은 거침없었다.

“뭐 저렇게 당당하지?”

오히려 내가 황당했다. 슈버트가 이렇게 뻔뻔한 어린애였다니.

“왜 그랬는지 아니 처벌하지는 않아.”

“…어떻게 알아?”

“나도 비슷한 상황이니까.”

알버트의 말에 슈버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x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알버트는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슈버트에게 주었다.

슈버트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손에 쥐어진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미친놈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더한 사람이 있네….”

중얼거린 슈버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가까이 있던 알버트의 시선이 제대로 맞닿았다.

슈버트가 의아하다는 듯 물끄러미 알버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알버트 가까이 다가와 그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는 분명 알버트를 알아본 모양새였다.

사람마다 마법이 걸리는 정도가 다르다더니, 슈버트는 마법이 잘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이 마을에서 알버트의 얼굴은 이미 널리 알려진바,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슈버트는 알버트의 집안 사정을 모른다.

슈버트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알버트를 계속 응시했다. 알버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슈버트는 알았을 것이다.

알버트는 제 얼굴에 내려앉은 어두운 그림자를 애써 감추지 않았다. 생기가 없는 눈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슈버트에게도 읽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

슈버트는 잠시 자리에 서 있다가 바삐 뛰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놀랐다. 아까 나보고 도둑질을 하지 말라던 걸 보면 알버트는 그런 쪽에 예민한 듯했는데 슈버트는 그냥 보냈다.

“도둑질은 싫다며.”

“싫어. 힘들어도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들한테 실례잖아.”

“그럼 저 아이한테는 왜 그랬어?”

내 말에 알버트가 잠시 침묵했다.

“…나도 몰라.”

알버트는 진심으로 혼란스러운 듯했다. 나는 알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그냥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

“그냥… 힘들어 보여서.”

잠시 침묵하던 알버트가 대꾸했다. 말에 힘이 없었다.

알버트가 순간 슈버트에게 베푼 선행이 그의 인생을 아예 바꿔놓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슈버트는 분명 알버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말했다.

그리고 겨우 돈 한번 줬다고 슈버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알버트를 따를 것 같지도 않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겠지. 어쨌든 첫 만남에 서로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남긴 것 같았다.

“잘했어.”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입꼬리가 부들거리는 것이 곧 위로 올라갈 것 같기도 했다.

“매번 칭찬하지 마. 익숙해지기 싫어.”

“익숙해지라고 하는 거야. 네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니까.”

내 말에 알버트는 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내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골목에 내려서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축제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일주일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이곳은 축제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골목에 있는 집과 집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조명과 장식이 이어져 있었다. 주위 나무에 매단 조명이 은은하게 주위를 비췄다.

다만 겨울이라 그런지 나무가 대부분 앙상하기 그지없어서, 그게 좀 아쉬웠다.

나무를 구경하던 나를 보며 알버트가 넌지시 입을 뗐다.

“이곳의 축제가 왜 딱 일주일 동안만 열리는지 알아?”

“왜인데?”

“12월 첫째 주에는 항상 눈꽃이 열리거든.”

알버트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이곳에만 나타나는 기현상인데, 일주일 동안 계속 눈꽃이 피어. 사람들은 나무와 마을 곳곳을 뒤덮는 눈꽃을 보러 오는 거야.”

마을 전체를 뒤덮는 눈꽃이라니. 생각만 해도 예쁠 것 같긴 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무언지 알고 바로 답해주는 알버트도 대단했다.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다 보이니까.”

나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알버트를 보며 웃었다.

“이런 게 충분히 칭찬받을 점이라는 거야. 모든 사람이 너처럼 사람을 읽지는 못해.”

나는 알버트가 그에게는 당연한 세상이, 모두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았으면 좋겠다. 주위 둘러보기에 참 좋은 기회였다.

제일 붐비는 건 역시 코트를 비롯한 기성 옷을 파는 옷가게와 모자를 전문으로 파는 곳이었다.

일부러 열어놓은 창 안에는 모자가 전시되어 있었다.

털실로 한 땀 한 땀 짠 듯한 모자는 세모난 모양으로 어린 알버트의 귀여움을 더해줄 듯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모자 가게를 뚫어져라 보던 내게 알버트가 물었다.

알버트가 사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왠지 그의 돈을 쓰는 게 마음 편치 않았다.

아무리 알버트가 귀족이라지만 집안도 망해가고 있고… 약간 어린애 코 묻은 돈 빼앗아 쓰는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훔쳐오기엔 양심이 찔린다.

내 찰나의 갈등을 눈치챈 건지 알버트의 눈이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설마 도둑질하려던 건 아니지?”

“어허! 무슨 소리야! 너랑 약속했는데 그걸 어떻게 어겨!”

나는 큰소리를 땅땅 치며 모자 가게를 가리켰다.

“나 저기에서 모자 사고 싶으니 도와줘.”

그래, 오늘은 알버트를 위한 날이니까. 아직 스스로를 위한 선물을 사본 적도 없는 그를 온 힘을 다해 도와줄 셈이었다.

“…허공에 모자만 날아다니는 건 너무 수상하지 않을까?”

알버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자신을 위해 골라주는 것인지는 상상도 못 하는 듯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그가 쓸 모자라고 하면 극구 사양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말을 흐리며 알버트를 모자 가게로 끌고 갔다.

모자 가게 안으로 들어선 알버트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혼자 왔니? 어떻게 도와줄까?”

가게 주인인 듯한 남자가 알버트 가까이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

알버트가 귀족이라는 것을 모르게 환상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그는 알버트를 평범한 아이 대하듯 하고 있었다.

알버트는 몸을 흠칫하다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평민처럼 인사하면 돼, 알버트. 지금 넌 알버트가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평민에 불과하니까. 네가 너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에게 뻔뻔스레 말했다. 사실 이번 산책은 알버트를 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냥 혼자 보겠다고 말해도 되고.”

내 말에 알버트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혼자 볼 거야… 예요.”

“혼자?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몸이 아프다고 먼저 여관으로 돌아가… 셨어요.”

존댓말이 입에 익지 않는 듯 뒤늦게 말을 덧붙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수습 잘하는 게 알버트답다, 싶었다.

어색해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알버트는 금방 상황에 적응했다.

잠시 후 주인을 완전히 설득시킨 알버트는 내가 계속 보고 있던 검은색 털실 모자 앞에 섰다.

“이게 그렇게 쓰고 싶어?”

“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모자를 들어 알버트의 머리 위에 푹 덮어주었다.

알버트가 양손을 올려 모자를 매만졌다.

“그런데 왜 나한테 씌워?”

“사실 나는 쓰면 잘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네가 써서 보여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자신을 위해 고른 것이라 그러면 단칼에 자를 알버트를 알았기에 나는 부러 변명을 가져다 붙였다.

내 생각대로 알버트는 머뭇거렸다. 그가 모자 위쪽에 달린 동글동글한 털실 공 같은 부분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나는 모자 안 좋아해.”

물론 알버트의 말에 굴할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모자 쓴 걸 보고 싶은데….”

알버트와 함께 있으면서 는 연기력과 눈치가 내공을 발휘하는 시간이었다. 난 짐짓 서글픈 얼굴을 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보고 싶은데….”

알버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

결국 나는 모자 가게에서 알버트를 위한 모자를 장만하는 데 성공했다.

겨울이 계속되는 곳에서 모자의 필요성은 생각보다 크다.

때문에 이곳 귀족들은 필요에 의해 모자를 쓸 뿐, 멋을 부리는 용도로 모자를 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알버트는 단번에 그 상식을 뒤집었다.

누구든 알버트가 모자를 쓴 모습을 본다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모자요? 그거 엄청난 패션 아이템 아닌가요? 누구에게나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죠.

쇼핑은 모자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알버트에게 따듯한 옷을 장만해 줄 셈이었다.

알버트가 가지고 온 돈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는 이윽고 다소 낡고 작은 옷에서 벗어나 기성품이긴 하지만 새 옷과 안에 솜이 누벼져 있는 코트를 사는 데 성공했다.

물론 나는 그것들을 모두 내 핑계를 대면서 샀다. 알버트는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라주었다.

아마 알버트도 나중에는 내 말이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모두 자신을 챙기는 일의 일부라는 것도.

하지만 알버트는 그걸 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따듯하게 껴입은 알버트를 보며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려, 알버트.”

“이제 원하는 대로 된 거야?”

“응. 고마워.”

알버트는 내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열었다.

“그럼 내 소원도 하나 들어줘.”

“소원?”

“어렵지 않은 일이야.”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줄게.”

알버트가 내게 뭔가 부탁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해주고 싶었다.

이윽고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나도 이름 부르고 싶어.”

“왜?”

“당신이 이름 불러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알버트는 처음으로 나를 ‘너’가 아닌 당신이라 불렀다.

조금은 깍듯한 그 호칭도 좋았지만, 그보다도 알버트가 자신의 마음을 내게 솔직히 표현해 준 게 좋았다.

그도 모르게 나온 말인 듯 입가를 황급히 가리던 알버트는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이름을 부르면, 당신의 기분이 좋아질 것 같으니까.”

연이어 하는 말에 나는 감동했다.

나는 매번 로제의 이름을 부르던 알버트를 떠올렸다. 날 가슴 떨리게 하던 행동들의 시작은 나였던 걸까.

하지만 난감했다. 여전히 내 이름은 말해줄 수 없었다.

실망감에 물드는 알버트를 보며 나는 대신 그를 꼭 안아주었다.

“나중에 말해줄게.”

“…그게 언제인데?”

“언젠가, 내가 준비가 되면.”

내 말에 알버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어긴 적 없다고 했으니까 믿을게.”

그가 나를 믿어줘 다행이었다.

“그럼 다시 거리 구경할까?”

그를 품에서 놓아준 내가 다시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알버트.”

가까이서 알버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이 걸려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안경을 쓰고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한 남자가 알버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점차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남자를 본 알버트가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빡였다.

“…스승님.”

뜻밖의 손님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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