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쌩쌩한 줄 알았던 알버트는 결국 심한 감기에 걸렸다. 그레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알버트의 외출을 금했다.
“절대 허튼 생각일랑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레텐이 알버트에게 약을 건네주며 단호히 말했다. 그 말이 과언이 아닌 듯, 그레텐은 정말 하루 종일 알버트의 방을 드나들었다.
병간호만 하려는 게 아니라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심지어 방문을 때때로 잠가 알버트가 밖에 나가는 것을 막기까지 했다.
알버트가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도록 단단히 감시하는 모양이었다.
“…저런 거 해도 상관없는데.”
알버트가 그레텐이 가져다준 고기 스튜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알버트의 식단은 내 생각보다 훌륭했다.
그레텐이 돈을 마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는 저택의 시종을 모두 내보냈고, 안에 있는 가구와 보석들을 차근차근 내다 팔았다.
물론 내다 팔기 전에 알버트의 허락을 받긴 했지만, 거의 반협박에 가까웠다.
“소백작님, 내일도 음식을 마련해 드리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 서랍장을 팔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알버트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어쨌든 그레텐은 물건을 팔아 돈을 마련했고, 그것으로 알버트의 끼니를 마련했다.
만일 그녀가 아니었다면 알버트의 생활은 훨씬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쁘게만 볼 수도 없고, 이것 참 어려운 문제다. 왜 알버트가 그레텐을 완전히 내치지 않았었는지 알 것 같다.
“…안 먹어도 돼?”
알버트가 숟가락으로 남은 스튜를 휘휘 젓다 물었다. 나는 감격한 얼굴을 하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알버트, 잘생겼는데 상냥하기까지 하면 유죄야. 감동인걸.”
“…대체 이상한 말만 하는 이유는 뭐야?”
“네 행동이 그만큼 칭찬받을 일이었다는 소리인데?”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칭찬받는 건 처음이야.”
“그동안이 이상했던 거고 이게 당연한 거야. 칭찬에 좀 더 너그러워져도 돼. 나중에 계속 들을 테니까.”
내 말에 알버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를 볼 때마다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먹는다는 거야, 안 먹는다는 거야?”
“내 몫까지 네가 먹어줘.”
나는 너스레를 떨며 고기 스튜가 담긴 그릇을 알버트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릇 안의 스튜는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왜 지금 알버트가 말랐는지 알겠다.
“나보다 훨씬 커야지. 밥 열심히 먹어야지 키 커. 다 컸는데도 나보다 작으면 어떡해.”
…물론 미래의 알버트는 내 키를 뛰어넘고도 남았지만.
“알버트, 나는 키 큰 사람이 좋아.”
“…네 이상형을 알고 싶지는 않은데.”
알버트의 황당하다는 얼굴에 내 얼굴이 불타올랐다. 너무 멀리 갔나? 알버트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서 던져본 건데.
나는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말했다.
“스튜 다 먹으면 오늘 준비한 선물 줄게.”
비장의 무기에 알버트는 오히려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매일 그냥 주는 거 아니었어? 왜 자꾸 말을 바꿔.”
그의 말에 외려 찔린 나는 전술을 바꿨다.
“네가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는 거야. 그럼 그냥 줄 테니까 이 스튜도 그냥 다 먹어주면 안 돼?”
그의 상냥한 마음에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생각해 볼게.”
알버트는 도도한 얼굴로 답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끄응. 어리지만 알버트는 알버트다. 말싸움을 계속하는 건 내게 불리했다.
앞으로 명심해야겠어. 속으로 다짐한 나는 알버트가 스튜를 다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등 뒤에 숨겨둔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겨울이 계속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꽃 종류는 많았다.
창고와 연결된 공간이 비닐하우스처럼 꽃을 위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레텐은 허공에서 갑자기 꽃이 나타나거나 못 보던 꽃이 방 안에 있는데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알버트가 마법으로 만들었겠거니,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알버트는 접시를 다 비웠고 그레텐이 들어와 만족스러운 얼굴로 빈 그릇을 가지고 나갔다.
“…오늘 선물은 뭐야?”
알버트가 기대하는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아직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해서 다 드러나는데, 자신은 다 숨기고 있다 굳게 믿는 게 귀여웠다.
“오늘은 널 닮은 장미를 준비했어.”
나는 알버트 침대 앞에 프러포즈하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새빨간 장미를 내밀었다.
알버트는 장미를 물끄러미 보다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꽃 선정에 놀란 모양이다.
하긴, 안개꽃에 비해 상당히 로맨틱한 선택이었지.
“왜 장미야?”
나는 그와 시선을 맞대며 속삭였다. 내 선택의 이유는 간단했다.
“네 눈동자 색처럼 예쁘잖아. 너만큼 예쁘지는 못하지만.”
그건 그랬다. 이 세상에 알버트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 그를 칭찬할 때면 알버트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나는 이 얼굴을 보기 위해 계속 칭찬을 던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좋은 쪽으로 당황한 알버트의 얼굴을 보는 건 즐거우니까.
“마음에 들어?”
내 말에 장미를 물끄러미 보던 알버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내가 잘못했을 때 알버트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나는 먼저 용감히 물었다.
“왜?”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가져온 거야? 훔친 거 아냐?”
“…아냐. 나 진짜 일했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버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진짜야, 나중에 보여줄게. 나 열심히 짐도 옮기고… 축제 준비 도와줬어.”
“…축제?”
“응.”
눈을 깜빡이던 알버트는 따분한 얼굴을 하며 턱을 괴었다.
“난 축제 싫어.”
“축제가 왜 싫어? 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은데.”
내가 알버트만큼 어릴 적에는 장에만 가도 들떴는데 이 마을 전체에 일어나는 축제가 싫다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소백작으로서 일해야 하니까. 사람들 만나서 인사하고, 현 상황에 도움을 청해야 하니까.”
“도움?”
“돈을 빌리는 거야.”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세한 설명이었다.
사람들 만나서 인사하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하겠다. 그런데 뭐? 대출? 몸에 열이 났다.
부모가 그냥 부모가 아닌데, 알버트의 부모는 어디서 뭘 하는 거람.
“부모님은 뭐 하시는데.”
알버트는 감흥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내 얼굴도 알고, 내 마음도 읽으면서 내 부모님에 대한 건 몰라?”
“응, 나한테 중요한 건 너니까.”
“…….”
내 말에 잠시 입을 뻐끔거리던 알버트는 작게 답했다.
“도박장.”
“…여기 도박장도 있어?”
“아니, 수도에 있어. 난 이번 축제 때 모이는 귀족들과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는 조건으로 내려온 거야.”
책 속의 내용대로 알버트의 부모는 도박장을 전전하며 빚을 늘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족들이라.
누가 오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다 싶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축제 때 누가 오는데?”
“중요한 사람은 현 마탑주와 메이슨 공작. 그리고 예프넨 후작. 나머지는….”
알버트는 귀족들 이름을 술술 읊었다.
현 마탑주는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메이슨 공작이라면 리암의 아버지를 말하는 거겠지. 예프넨 후작은 로스투라투의 측근으로 연회 때 보았던 기억이 났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걸 보면 이곳 축제가 생각보다 인기 있는 모양이다.
리암이 나를 이곳으로 보내려고 한 것만 알았지, 이곳이 이렇게 유명한 곳인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귀족들 이름을 말하고서 두통이 온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알버트에게 축제를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
그에게 어린애가 축제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했다. 내가 과거에서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가 알버트와 함께하는 미래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
“알버트, 그러면 사람들 만나고 나서 나랑 축제 구경 갈래?”
“…구경?”
내 말에 알버트가 솔깃한 듯 장미를 향해 있던 고개를 들었다.
“축제 시작 전에 저녁에도 같이 나갔다 올 수 있고. 사람들이 만드는 거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든.”
“…….”
“잘 먹고 푹 쉬어서 열 내리면 저녁에 한번 놀러 가자. 내가 같이 갈게.”
알버트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였다.
“대신 저택에 있는 마법서 좀 볼 수 있을까?”
알버트와 축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버트는 이내 알겠다고 답했다.
***
며칠 후 알버트는 언제 아팠냐는 듯 싹 나았다.
그가 낫길 기다리면서 마법서를 통해 다른 유용한 마법진 몇 개를 외우는 데 성공했다. 제대로 되는지 확인도 했다.
[하양아, 잘 이겨내고 있어? 나는 오늘 어린 알버트와 축제 구경을 하러 갈 예정이야.]
오늘도 어김없이 하양이에게 텔레파시로 내 상태를 전한 나는 바깥 날씨를 다시 살폈다.
산책 나가기에 완벽한 날이었다.
그레텐의 감시는 여전했지만, 그녀도 알버트가 예민하다는 건 알고 있는 바라 잘 때는 건드리지 않았다.
알버트는 아직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빨리 침대에 누웠다. 이윽고 방의 불이 꺼졌다.
그레텐이 자신의 방으로 간 걸 확인한 알버트가 자리에서 슬금슬금 일어났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눈이 내리지 않아 맑은 밤하늘에는 별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알버트는 옷장에서 코트를 꺼내 입었다.
“잘 껴입어야지.”
나는 알버트의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여며주었다. 그가 다시 아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알버트가 아픈 걸 보는 게 이번으로 세 번째다. 앞으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알버트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애야?”
“응.”
뭐, 그리 당연한 말을. 나는 바로 대답한 후 덧붙였다.
“애지만 잘생긴 소백작님이야.”
내 말에 헛기침을 한 알버트는 창문 가까이서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알버트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안에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 좋았다. 비록 지금의 나는 타인의 온기 같은 건 느낄 수 없었지만.
“플라이(Fly).”
나는 예전 알버트가 그러했듯, 밤하늘에 올라섰다.
우리는 함께 하늘을 걸었다. 알버트는 놀랍다는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하늘의 별에 손을 뻗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결국 난 알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야경이 멋있어서 참는 거야.”
나를 가볍게 흘겨본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나는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