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알버트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그의 직감은 무시할 바가 못 된다.
나는 레스토랑에서 알버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와 비슷한 사람이었어.”
“네게서 그녀를 투영해 보지는 않아. 하지만 지금 와서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를 떠올리면 너를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구나.”
내가 로제 아티어스의 몸에 빙의해 있을 때도 알버트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금세 깨달았다.
다시 알버트를 만나면, 그가 기억하는 정인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좋아할까? 아니면 떠나야 했던 나를 보며 원망의 말을 쏟아낼까. …지금 같아선 원망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어찌 되었든, 이곳에 있는 순간에는 알버트의 하루하루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내가 과거에 온 것은 그저 시련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인 듯했으니까.
하양이와 연락이 되지 않는 게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난 하양이를 믿었다. 하양이는 산다고 했다. 살고 싶다고 했다.
나와 함께하며 성장하고 자란 하양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가정이 또 떠올랐다.
내가 갑작스레 떠나야 했던 이유.
물론 하양이가 성장을 무사히 마치고 성체가 된다면 나는 미래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알버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하지만 하양이가 성체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하양이와 함께 죽는다.
어쩌면 나는 내가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알버트의 기억을 지운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는다고 해도 하양이를 향한 원망은 없었다. 하양이도 정말 죽어라 노력했을 테니까.
물론 이는 최악의 가정이었다.
알버트는 분명 어릴 적 성체 드래곤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도 하양이와 같은 화이트 드래곤을.
그게 하양이가 아닐 가능성은 낮았다.
아직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건, 하양이도 시련을 견디고 있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
하양이를 믿으며 나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
하양이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의 말을 가득 담아서.
[하양아, 내가 항상 사랑하는 거 알지? 힘내야 해.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육체가 없는 내게 시련은 고통이 아닌 기회였다.
어린 알버트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소중한 기회. 그에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나는 창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내일 아침에 알버트가 일어나면 하루를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는 선물을 줄 생각이었다.
***
하양이는 드래곤의 둥지 안에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러웠고, 온몸에 누가 칼을 꽂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흐으….”
아팠다. 온몸이 아팠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고통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자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져. 내가 가장 중요하잖아. 아픈 걸 굳이 참을 필요는 없어.’
너무 강렬한 고통은 사람을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법이다.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밖에 나가는 것을 기피하고 잠만 잤던 하양이는 회피 성향이 강했다.
다른 새끼 드래곤보다 감정에 예민해 두려움도 쉽게 느꼈다.
하양이는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500살이 되는 날을 제 일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드래곤이 성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죽는 것뿐이니까.
지나친 고통 앞에서 죽음은 오히려 달콤해 보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감정에 예민하다는 건 다른 감정도 더 쉬이 느낀다는 것이다.
하양이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유혹에도 답하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정인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존재를 모른 채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행복했다.
아직 정인과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하양이가 몇 번이나 고개를 휘젓자 머릿속을 채웠던 악마의 유혹 같은 생각이 잦아들었다. 하양이는 몸을 웅크렸다.
성체 드래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세계를 넘나들고 과거를 돌아다니며 현실과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이 되는 과정은 더 혹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양이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를 정인과 나눠 받고 있다는 거였다.
비록 그녀는 육체가 없는 영혼의 상태라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하양이가 받아야 할 고통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정인의 존재는 하양이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하양이는 텅 빈 드래곤의 둥지 안을 살폈다.
계약자마자 주어지는 시련은 모두 다르다.
정인이 이곳에서 사라진 것을 보아 그녀의 시련은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더 많이 알려주고 싶었는데….’
하양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드래곤도 성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건 성장이 시작되는 때부터였다.
일평생 기다리던 순간을 앞두고 본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던 정보를 꺼낸 것처럼, 수많은 정보를 단번에 깨우치는 것이다.
드래곤은 성장을 하는 당사자라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다소 많았지만, 그에 비해 계약자에게 가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이건 계약자를 위한 시련이기도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에,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에게는 억겁의 시간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1년, 혹은 한 달의 시간이기도 했다.
기간은 오로지 드래곤이 얼마나 빨리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드래곤과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는 절망 속에서 계약자는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드래곤을 끝까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시련은 드래곤과 계약자 서로의 신뢰를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양이는 눈을 부릅뜨며 다시금 찾아오는 고통을 받아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 시련은 하양이와 정인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드래곤이 성체가 될 때 계약자는 전과 다른 새로운 육체를 가지게 된다.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특징을 가지고서.
그가 성체가 된다면, 정인도 오롯한 본래 영혼의 모습을 찾아 살아날 수 있다. 다른 육체는 필요 없어진다.
로제 아티어스의 협박에 굴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알버트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하양이는 마지막에 자신을 챙기던 알버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 자신을 못마땅해했어도 말만 함부로 했을 뿐, 진짜 해를 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로제 아티어스가 돌아온 이후로는 자신을 더 신경 써주기도 했다.
…알버트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탑에서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니까.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면,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양이는 모든 것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양이가 이를 꽉 깨무는 순간, 그의 등에 솟은 날개가 조금 더 커졌다.
성장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새벽까지 주변을 돌아다니던 나는 그레텐의 말대로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장식을 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호수를 꼈을 뿐 그저 작은 마을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어둠이 내려앉은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주위는 마을과 집들을 꾸미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 구경도 하고, 슬쩍 도와주다 보니 시간이 빨리 갔다.
‘…축제 준비를 도와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장렬히 고민하다 창고에 있던 안개꽃을 조금만 들고 나왔다.
도둑질하는 것 같아 좀 찔리긴 했는데, 축제 준비를 도와준 일당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일당을 받기는커녕, 아예 돈을 낼 수도 없으니까.
겨울이라 그런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어둡기만 했던 하늘이 살짝 밝아져 있었다.
고요한 하늘에 박혀 있는 별은 알버트와 함께 날던 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아직 잠들어 있겠지. 나는 창을 통해 알버트의 방에 다시 돌아왔다. 닫기만 했을 뿐 잠그지 않아 창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위에 꽃병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나는 벽난로 앞에 앉아 이불에 똘똘 말려 있는 알버트의 뒷모습을 보았다.
머리까지 이불을 덮고 있어서 뒤에서 보면 마치 이불을 모아둔 것 같았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새벽 다섯 시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빨리 일어나는 습관은 옛날부터 몸에 배어 있던 걸까?
아니면 추워서 벽난로 앞으로 간 건가.
혹 자고 있을까 싶어 나는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버트?”
이불 덩이가 흠칫하더니 뒤로 돌았다. 알버트는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라진 줄 알았어.”
내가 돌아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듯 놀란 얼굴이었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가지 말라 해놓고서, 내가 떠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게 익숙하니까.
나는 그의 옆에 앉으며 들고 온 안개꽃을 손에 꼭 쥐여주었다.
“네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선물 주고 싶어서 나갔다 왔어.”
“…선물?”
“예쁘지?”
알버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분홍색 안개꽃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안개꽃이 아주 소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그러고는 제 마음을 숨기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역시?”
내가 수긍하자 알버트의 눈에 의문이 섞였다. 나는 알버트를 보며 윙크했다.
“알버트 너보다 예쁘지는 않으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미간을 좁혔다.
“진짜, 진심도 아닌 말 좀 하지 마.”
“진심이 아니라니.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걸?”
난 보았다. 칭찬에 좋아 귀가 빨개진 모습과 기쁨을 다 감추지 못해 올라간 입꼬리를.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릴 때는 기분이 정말 좋다는 거니 뿌듯했다. 나는 알버트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내가 매일 선물을 하나씩 가져올게, 알버트.”
“…….”
“하루하루가 기다려질 수 있도록.”
알버트는 안개꽃을 소중히 쥔 채 나를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내게 하는 말임을 알았다.
하지만 알버트는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