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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94화 (94/156)

94화.

어린 알버트는 그레텐의 품에 안겨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시종 하나 없는 방은 삭막했다.

똑같이 인기척이 없어도, 예전에 수도에 갔을 때 있었던 슈버트의 저택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래도 거긴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곳은 사람 사는 곳이라기보다 을씨년스러운 유령의 집에 가까웠다.

그나마 알버트가 들어간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큰 저택을 혼자 관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아무래도 포기한 듯했다.

“어쩌다 이렇게 젖으셨습니까.”

그레텐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수건을 가져왔다.

알버트가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데 그레텐이 그의 몸을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이윽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그레텐은 정신을 잃으려는 알버트를 흔들어 깨웠다.

“소백작님, 얼른 옷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 그레텐의 말에 알버트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얼마나 고통을 참고 있는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레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버트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굳이 그를 깨울 것은 뭔가. 쉬게 놔두지.

하지만 알버트에게는 익숙한 일인 듯했다. 알버트는 이를 악물며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

“방에 불을 피우겠습니다. 금방 따듯해질 겁니다.”

그레텐은 뽀송뽀송한 수건을 가지고 온 후 방에 불을 피웠다. 벽난로가 따듯한 빛을 불태웠다.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알버트가 몸을 떠는 것이 줄어든 것으로 보아 확실히 방이 따듯해진 모양이었다.

“드실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레텐이 방을 나서며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레텐은 알버트를 묵묵히 간호했지만 그가 뭘 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 않았다.

그레텐은 수프를 끓여 가져왔다. 알버트는 끙끙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십시오, 소백작님.”

알버트는 그의 침대 가까이 앉아 있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수저를 들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짙은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이제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텐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것도 걸렸다.

원래 감정 표현이 다채로운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감정했을 줄은 몰랐다.

어린 알버트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내가 이곳에 있을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알버트의 머리에 올린 수건을 갈던 그레텐이 문득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백작님, 혹시 밖에 나가서… 또 불경한 짓을 하고 오신 겁니까?”

불경한 짓이라니! 나는 그녀의 단어 선택에 경악했지만 알버트는 묵묵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물어봐?”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소백작님의 몸에는 고귀한 왕가의 피가 흐릅니다.”

그레텐은 알버트가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알버트가 그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알버트는 옛날부터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혹사시켰다고 했으니 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레텐은 알버트가 마법사인 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알버트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간을 좁힌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매일 똑같이 지겨운 소리….”

“틀림없이 왕가에서 소백작님을 부르실 거예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현왕은….”

그레텐이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자니까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알버트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레텐이 알버트를 도와준 것과 별개로 그녀가 하는 말은 너무 가혹했다.

“그러니 몸을 더 소중히 하세요.”

알버트의 마음이 산산조각 난 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레텐이 그를 챙긴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그레텐은 알버트에게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알버트를 둘러싼 배경과 사람들을 살피며, 약삭빠른 유모는 미래를 보았다.

“나중에 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소백작님. 절대로요.”

그레텐은 그 앞에 수프를 더 들이밀며 부담스럽게 속삭였다. 알버트는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퉁명스레 말했다.

“혼자 쉬고 싶어. 이제 나가.”

“알겠습니다.”

자주 있었던 일인 듯, 그레텐은 군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그레텐이 방을 나가자마자 알버트는 나를 보았다.

나는 알버트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안에 수프를 떠 넣어주었다.

“더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안 낫잖아.”

“으브브….”

알버트는 인상을 쓰면서도 수프를 마저 먹었다.

내 말을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다 따르고 있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애정에 굶주렸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그레텐과 함께하는 시간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서.

아직 미세하게 떨고 있는 알버트의 몸에 나는 이불을 똘똘 말아주었다.

“추울 때는 따듯해야지.”

“…이게 뭐야?”

“일명 김밥 전법이지. 내가 아플 때 쓰는 방법이야. 많이 추워?”

내 걱정에 알버트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누가 구해줘서 추워. 구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는데.”

“살려줘서 고맙다는 거지? 우리 잘생긴 알버트.”

나는 하하 웃으며 알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보다 훨씬 조그만 알버트는 너무 귀여웠다.

그새 다 마른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는데, 그게 또 잘 어울렸다.

바로 만지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고분고분하게 있었다. 내가 둘러준 이불 끄트머리를 꼭 잡으면서.

알버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가 생각나 기분이 묘했다.

“…넌 누구야?”

이윽고 고개를 올린 알버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노을처럼 반짝였다. 나는 무어라 답할까 망설였다.

미래의 알버트가 말해준 것을 생각하면 알버트는 나와 헤어질 것이다.

내가 과거로 온 건 하양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시련의 일부인 듯했으니까.

알버트는 내가 그의 기억을 지웠다고 했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게 이름도 숨겼다고 했다.

나는 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고 애정에 고픈 어린아이에게 내가 얼마나 큰 의미일지 알 것 같아서.

그와 시간을 얼마 보내지 않은 지금에도, 그가 얼마나 나를 의지하게 될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말해주면, 그는 내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나와의 기억을 되새기며 살아갈 것이다.

너무 긴 시간 동안 나와의 추억만 곱씹으며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환하게 웃었다.

“널 구하러 온 사람이야.”

“…….”

“네게 세상이 생각보다 살 만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알버트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는 그의 눈에 비친 희망을 보았다.

그에게 내려앉은 그림자에 빛이 드리웠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서 꽉 안아주었다.

알버트는 내 등에 어색하게 손을 올리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구했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더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누굴 울보로 알아.”

울고 싶을 때 우는 건 잘못된 게 아니다. 나는 아이가 아이다울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안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응어리지지 않는 법이거든.”

“안 울 거야.”

내 말에도 알버트는 의연했다. 내 앞에서 센 척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내 품에 꼭 안겨 있던 알버트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잠든 후 방에 돌아온 그레텐은 수건을 다시 한번 갈았다. 그리고 알버트 옆에 간단히 먹을 만한 빵을 남겨두었다.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알버트를 보고 그레텐이 중얼거렸다.

“얼마 후 축제도 가셔야 하는데… 어쩌시려는 건지.”

그녀는 알버트를 걱정하거나 동정하기보다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 간극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알버트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자부했다니.

그때 그레텐의 말을 순순히 들으며 밖에 나왔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알버트가 내게 서운해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벽난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은 그레텐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를 노려보다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에는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영혼이라서 그런 걸까, 졸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알버트 옆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하양아, 내 목소리가 들리니?]

하양이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지만 들리는 건 없었다. 드래곤과 계약자의 소통이 완전히 끊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자, 지금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하양이와 나는 드래곤의 둥지에 갔다. 그곳에서 하양이는 성체가 되기 위한 시련이 생각보다 더 빨리 시작되었다고 말했지.

나도 지금 내가 과거로 온 것이 내 시련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그저 생각지 못했던 건, 내가 보통 시련을 겪는 사람들과 다르게 영혼 상태라는 것.

알버트에게 내 모습이 보이는 이유는 그가 팔찌에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그만 나를 볼 수 있다.

만약 본래 겪어야 했던 고통을 겪거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과거에 떨어졌다면, 지금 내 상태는 훨씬 안 좋았을 것이다.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직접 감내하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있어야 했을 테니까.

시련이 이렇게 쉬워진 건 오로지 내가 영혼 상태이기 때문이겠지.

로제 아티어스의 음모가 내가 하양이와의 계약을 완성하는 것을 돕다니. 세상사 정말 알 수 없군.

흠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던 나는 귀 뒤에서 흘러내리는 하얀색 머리카락을 보고 새삼스레 거울을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대체 어떻게 생겼지.”

이런 대사를 읊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나다.”

로제 아티어스가 아닌 내 얼굴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선한 강아지 같은 눈매에 검은색과 갈색이 적당히 섞여든 눈동자. 꽤 열심히 길렀던 긴 생머리.

나는 머리를 꼬아보며 내 머리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계약자라는 표시인 것 같은데.”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아까 보았듯 내 머리카락이 하얘졌다는 거? 은발이라고 보기에는 밝고 하얀색이라 보기에는 조금 어두운 느낌이다.

문득, 알버트가 첫사랑을 떠올리며 했던 말이 기억났다.

웃을 때 선한 눈매.

새하얀 머리카락.

나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라 생각했었는데, 실은 그게 나를 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연이어 떠오른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내가 알버트의 첫사랑이었다.

그의 첫사랑을 조금이나마 질투했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가 처음으로 짝사랑했던 사람도.

지금 그가 사랑하는 사람도.

어차피 모두 나였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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