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러니까 나한테 다 털어놓아도 돼.”
원망이라도 괜찮았다. 그가 감정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면 내가 그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지금 그에게 이럴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알버트가 한바탕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흐아아… 왜 살렸어…. 왜 살렸냐고…!”
처음으로 우는 아이처럼 알버트는 열심히 울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눈물 때문에 수분 부족이 올 것 같았다.
그만큼 마음 털어놓을 상대 하나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 같아 안쓰러웠다.
나는 알버트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거두고 그를 끌어당겨 다시 꼭 안아주었다.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줄곧.
그의 얼굴이 잘 익은 딸기처럼 새빨개졌다. 나는 우는 그를 달래고, 또 달랬다.
“추, 추워….”
잠시 후, 가까스로 진정한 알버트는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이곳은 추운 겨울이다.
방금 얼음장 같은 호수에 들어갔다 나와 몸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어린아이의 체온이 제대로 유지되었을 리 없다.
얼른 저택으로 데려가야 했다.
알버트가 백작가의 저택에서 이곳까지 혼자서 올 수 있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별장에서 온 것일 테니까.
여기에서 그리 멀 것 같지는 않았다.
“알버트, 별장은 어디 있어?”
“…….”
알버트는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달달 떨기만 했다. 나는 알버트를 품에 꽈악 안았다가 놓아주며 시선을 맞췄다.
“아직도 바보 같은 생각하는 거면 가만 안 둘 거야. 우선 품에 업혀. 내가 데리고 달릴 테니까.”
“…싫어.”
“업혀.”
“싫어, 내가 왜.”
“방금 전까지 내 품에 안겨서 울어놓고서?”
아직 자존심은 남았던 모양이지만, 내 말에 얼굴을 확 붉히는 게 귀여웠다.
나는 알버트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그를 내 등에 업었다.
영혼이라는 건 여러모로 편리하구나. 이렇게 아이를 업고서도 아무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호수에 들어갔다 온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하양이가 생각나 나는 금세 심각해졌다.
‘하양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내 시련에 대해서, 하양이에 대해서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양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알아야 했다.
[하양아, 괜찮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과거에 와 있어.]
나는 하양이에게 머릿속으로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하지만 하양이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은 영혼 상태이기 때문에, 하양이가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없어 조급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은 우선 알버트가 쉴 수 있게 별장에 데려다주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은 그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문 알버트에게 짐짓 엄하게 말했다.
“별장 어디인지 알려줘. 안 그러면 주위 저택이란 저택의 문은 다 두드릴 거야. 알버트 그레이 님이 아파요. 얼른 치료해 주세요, 하고.”
“너만 꼴사나워질 텐데. 그런다고 귀족들이 받아줄 것 같아?”
알버트가 신랄하게 대꾸했다. 그의 상냥한 말투에 익숙해져 있다가 이런 반항기 어린 청소년 말투를 들으니 새로웠다.
아기 고양이가 낯선 이를 경계하는 느낌이랄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절대 안 말해.”
불퉁한 어조는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미래의 알버트에게 단련된 내가 듣기에는 가소로웠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알버트와 시선을 맞추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보다는 네가 꼴사나울걸? 지금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한테 너 쓰러졌다, 얼른 구해야 한다 호들갑을 떨면서 돌아다닐 텐데. 견딜 수 있겠어?”
“…이익.”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알버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내 말에 화내는 알버트라니. 이런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안 그래도 잘생겨서 사람들 시선을 끌잖아. 네가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이 또 얼마나 안타까워하겠어. 난 전혀 부끄럽지 않은걸? 몇 번이고 할 수 있어.”
알버트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내 말이 그렇게 놀라웠나?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알버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방금 전보다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
“…뭘 그렇게 쉽게 말해?”
“뭘?”
“…잘생겼다는 거.”
“그야 네가 잘생겼으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입술을 꾹 다물더니 내 등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알버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설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지금 내가 잘생겼다고 해서?
어릴 적 알버트는 아직 잘생겼다는 말에 면역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크면서 잘생겼다는 말 끊임없이 들을 텐데.
내 말에 매번 여유롭게 받아치는 알버트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니 새로웠다.
“알버트, 너 정말 잘생겼어. 어린애가 벌써부터 그렇게 잘생기면 커서….”
더 말해주고 싶다! 칭찬은 사람 자존감에도 좋다잖아. 내가 다시 입을 열자 알버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호수 절벽하고 이어진 숲을 지나면 오솔길이 나와. 그 끝에 저택이 있어.”
잘생겼다는 말이 그를 재촉하게 만들 줄은 몰랐는걸. 이걸 미래의 알버트에게 말해주면 뭐라고 할까?
“알겠어. 고마워, 알버트.”
“…협박해 놓고 고맙다고 하지 마.”
“협박이라니! 내 마음을 그렇게 곡해하면 슬퍼. 나는 그저 네가 너무 잘생겼고 예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그냥 빨리 가!”
작게 웃은 나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알버트, 정신을 잃으면 안 돼.”
가는 길에 알버트가 끙끙거리는 게 느껴져 걱정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달렸다.
마법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고민하다 주문을 외쳤다.
“런(Run)!”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마법 중 하나였다. 지팡이가 없어 과연 시전이 될까 고민이 많았는데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지팡이가 없어서 그런지 시전된 능력이 그리 신통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쓸 만했다.
알버트는 내 등에 얼굴을 폭 파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오늘이 정말 일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나왔다면,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했다면.
절망했을까? 아니면 아직 살 만하다는 것을 느꼈을까.
나는 부디 내 위로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길 바랐다. 한 번으로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이해는 갔다.
내가 계속해서 그를 찾을 거였으니까.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경사를 지나 숲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이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귀족도 보였다.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내 쪽을 보며 슬슬 발걸음을 피한다는 거였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았다.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건 어색해 보이기만 했다.
…뭐지?
의아해하던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아니라, 내 등에 업혀 있는 알버트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회색 머리카락은 이곳에서도 흔하지 않다.
알버트가 아무리 얼굴을 폭 파묻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알버트가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던가?
하지만 사람들에게 묻는 것보다 알버트를 저택으로 데리고 가는 게 먼저였다.
숲을 지난 나는 알버트가 말한 듯한 저택에 다다랐다. 광산으로 돈을 많이 벌었었다더니, 별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알버트가 호수에 왔을 때는 이미 광산이 망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뜯어먹기 바쁠 때였을 텐데, 이만한 규모의 별장을 팔지 않고 있었다니.
역시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군.
저택 앞에 다다른 나는 문을 쿵쿵 두드렸다. 문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저기요, 알버트 님을 데리고 왔는데-”
“소용없어.”
내 등에서 가쁜 숨을 내쉬던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왜!”
“다 나갔으니까….”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저택인데 안은 개판인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고용인의 아래에 붙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문을 슬그머니 밀었다. 제대로 잠기지도 않은 문은 바로 열렸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대문을 잠갔다.
아니, 어린애도 있는데 문도 제대로 걸어 잠그지 않는단 말이야?
저택으로 들어가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알버트 소백작님!”
황급히 달려오는 여자의 얼굴은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지금 알버트를 돌볼 중년 여자라면….
“…공중에 떠 계시다니,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쓰신 겁니까? 정말, 이 유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그레텐밖에 없다. 리암의 성에 갔을 때 만났던 그의 유모.
모든 사람이 떠나도 그녀는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감동했다.
알버트를 모시는 충성심이 그저 말뿐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알버트가 공중에 떠 있다니.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데 그레텐이 내 등에서 알버트를 손쉽게 빼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알버트를 빼내며 내 손과 맞닿은 그레텐이 손은 허공을 통과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제야 아까 전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알버트를 구했다.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업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처럼 벽을 통과할 수 없었다. 사람처럼 도구를 만질 수도 있었고 문을 열고 닫을 수도 있었다.
오로지 알버트만 나를 인식할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유령하고 비슷해진 걸까? 어떻게 되었든 영혼의 상태보다야 낫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답답했다.
나는 손목에 찬 백금 팔찌를 만졌다. 원래 알버트에게 선물하려 했던 백금 팔찌였다.
그렇다면 이 팔찌에 마법을 건 사람도 알버트라는 건데….
아무리 그라도 담을 수 있는 마법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영혼과 관련된 마법만큼은 로제보다 서툴러 보이던 알버트이니 이해가 가는 바였다.
나는 그레텐의 품에 안긴 알버트를 보았다.
…이제 돌아가야 하나.
알버트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의 상태를 물끄러미 살폈다.
그레텐이 알버트의 병간호를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잘 살펴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그레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어디 있든 상관은 없겠지. 그럼 차라리 저택에 머무르는 게 좋겠다. 알버트의 상태도 살필 겸.
“알버트.”
알버트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눈을 가까스로 뜬 알버트가 숨을 내쉬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새빨개진 볼이 너무 귀여웠다.
알버트가 내 옷을 잡아끌었다.
“가지 마….”
어차피 가지 않을 거였는데….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