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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92화 (92/156)

92화.

“…뭐지?”

하양이가 숨을 쌕쌕 쉬고 있었다. 내 손에는 아직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일단 팔찌를 손목에 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동굴 같은 공간은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벽은 온갖 드래곤 문양으로 가득했다. 나는 한쪽 바닥에 기묘하게 생긴 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을 받으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알은 딱 하양이 크기만 했다.

알 뒤로 보이는 벽에는 벽화가 가득했다. 선명하게 새겨진 벽화에는 여러 드래곤이 그려져 있었다.

하양이처럼 하얀 화이트 드래곤이나 새까만 블랙 드래곤, 알렉산더처럼 푸른 블루 드래곤까지. 계약자와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살짝 가늠이 갔다.

하양이가 태어난 곳.

나와 하양이가 찾아가려 했던 곳.

바로 드래곤의 둥지였다.

내가 왜 이곳으로 순간이동 한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하양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정인을 살리려는 드래곤으로서의 본능이 진화를 앞당긴 것 같아아….]

가쁜 숨을 내쉬던 하양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양이가 나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와아… 정인이다아….”

서로를 보는 것도 잠시,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경악했다. 진화를 앞당겼다니. 그렇다면….

[이제 시련이 시작될 거야. 정인은 다행히 영혼이라 육체적인 고통은 피할 수 있겠다아.]

“너는 어떻게 다 아는 거니, 하양아.”

이 모든 건 하양이도 처음 겪는 것일 텐데, 나에게 하는 설명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어…. 로제… 아니 정인도 시련이 시작되면 알 수 있을 거야.]

오랜만에 듣는 졸린 목소리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지친 게 보였으니까.

[나는 꼭 성체 드래곤이 될 거야.]

다짐하듯 말하는 하양이의 눈이 푸르른 바다처럼 반짝였다. 굳센 의지가 돋보이는 모습에 울컥했다.

나는 우리가 아직 가지 못한 바다를 떠올렸다.

“당연하지, 우리 아직 할 게 많잖아.”

살아 있다면, 할 수 있는 무수한 일을 생각했다.

하양이에게 선물할 수 있는 순간들을.

하양이가 내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이 뒤바뀌었다.

나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 시련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위에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춥지는 않았다.

영혼 상태라 그런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하양이를 따로 둔 거면 이유가 있겠지. 본래 내가 느껴야 할 고통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상태인 까닭에 육체적인 고통은 피해가게 된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 말고도 다른 시련이 있을까?

생각하며 걷던 참이었다.

팔찌가 없었다면 사람들에게 보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괜찮겠지.

호수를 빙글 돌아 걸어가는데, 절벽 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알버트를 닮은 회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어린아이였다.

“…사람 아니야?”

절벽 위에서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나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절벽 위를 응시했다. 위태로운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눈을 찡그리면서 보니 아이가 절벽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설마.

설마 몸을 던질까 싶었는데, 그 예감이 맞았다. 자그만 아이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풍덩!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온 세상은 새하얀 눈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이 지고 있는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이루어져서는 안 될 비극이었다.

나는 아이가 빠진 호수의 끝자락으로 있는 힘껏 달렸다.

영혼 상태인 내가 아이를 구할 수 있을지, 아예 만질 수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차갑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물속임에도 숨을 쉴 수 있었고, 물살의 저항도 받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는 데 무리는 없었다.

아이가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게 보였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아이의 입에서 새어 나온 공기 방울이 위로 솟았다.

이대로 두면, 정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더 속도를 냈다.

다행히도 나는 아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혹시나 내 손이 아이의 손을 통과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아이의 손을 낚아채 잡아당길 수 있었다.

사실 놀랐다. 팔찌 하나 꼈다고 육체라도 가지게 된 건가? 대체 알버트는 이 팔찌에 뭘 해놓은 거지?

더 이상 생각하는 건 뒤로 미뤘다. 물을 먹고 정신을 잃은 아이를 품에 안은 나는 수면 밖으로 정신없이 헤엄쳤다.

작은 아이였지만 물을 먹으니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서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물가로 아이를 끌어온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면서 손목에 낀 팔찌가 벗겨지면 어쩌지 싶었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나는 그제야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햇빛을 받으면 은발처럼 반짝이는 옅은 회색 머리카락. 조각상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또렷한 이목구비였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미인.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듯한 모습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저으며 아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까 전과 다른 의미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제야 시야에 걸리는 내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목과 어깨 주변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본래 검은 생머리였던 내 머리와 달리 새하얬다. 마치 하양이 같았다.

혼란스럽지만, 더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흐으….”

아이가 콜록거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정신이 드니?”

내 걱정스러운 말에 아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루비를 머금은 듯 선명한 붉은 눈동자였다. 내 입에서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일상을 함께하던 사람을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가슴 떨리는 키스를 선사하던 사람을 내가 어떻게.

존재만으로도 반짝이는 사람이 어려졌다 해서 다른 이가 될 리 만무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알버트 그레이.”

마지막 확인을 위해 이름을 말하자 아이의 눈이 흠칫 시선을 맞췄다. 붉은 눈동자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와 어린 알버트의 시선이 맞닿았다.

연신 콜록거리며 기침을 뱉던 아이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머릿속에 알버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다. 누군가에게 구조당했거든.”

…당신을 구한 사람이 나였어?

“그래서 나는 도망쳤단다.”

…세상에서 도망치려던 당신을 구한 사람이 나였다고?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린 알버트는 내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움찔했다.

아직 풋풋한 어린이라 그런지 살기는 미래의 그와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원망이 가득 찬 시선을 받으니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겠지.

나는 묵묵히 시선을 받으며 잠자코 있었다.

“…이 손 놔.”

알버트는 내가 꼭 잡은 손목을 보고 퉁명스레 이야기했다. 아직 앳된 미성의 목소리와 가다듬어지지 않은 말투가 정말 그 또래 어린이 같았다.

당신한테 이런 때도 있었구나, 싶었다.

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알버트의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레 물었다.

“몸 상태는 괜찮아? 어떻게 겨울 호수에 뛰어들 생각을 했어. 많이 추울 텐데….”

갑작스러운 걱정에 놀랐는지 알버트의 눈이 커졌다. 떨리는 눈동자 속에 결핍이 비쳤다.

제대로 받지 못한 애정을 갈구하고 싶은 욕망이 내게까지 전해졌다.

…알버트 덕분에 빨라진 눈치가 알버트를 읽는 데 쓰이다니.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구나.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는데,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내 상태가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야. 얼른 놔달라고.”

나는 오히려 손에 힘을 주었다.

알버트는 비쩍 말라 있었고, 당연히 힘도 전혀 없었다. 이즈음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여실하게 드러났다.

내가 잡은 손목을 놓으려 몇 번이고 안간힘을 쓰던 알버트는 실패하고서 결국 고함을 내질렀다.

“놔!”

“못 놔.”

“놓으라고!”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손 놓으면 뭘 할 줄 알고. 절대 못 놔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렇게 참견이야?”

어이없다는 듯한 알버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실 너를 잘 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알버트의 목소리와 말투가 얼마나 다정하고 가슴 떨리는지.

알버트가 얼마나 예쁘게 웃을 수 있는지.

알버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으로 변하는지 모두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할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섣부른 이야기는 오히려 나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단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한 나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알버트에게 내 진심이 전달될 수 있도록.

“네가 아는 것보다 널 많이 알아. 네가 도망치려 한 것도 알고 있어.”

내 말에 알버트가 처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의 허점을 들킨 사람처럼 다시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도망쳐도 돼. 견딜 수 없을 때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모두 사는 속도도, 방식도 다르니까.”

“…….”

하지만 사나운 눈빛도 잠시, 알버트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내 앞에서 울고 싶지 않은지 팔뚝을 올려 눈물을 닦아내던 알버트가 이미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알면서 왜 날 살리려고 들어?”

“…….”

“내가 뭐라고?”

어린 알버트가 저 말을 하기까지 어떤 고뇌와 아픔을 겪어야 했을지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서 뭘 할 수 있다고….”

알버트는 내게 잡히지 않은 손을 올려 내 팔을 때렸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영혼의 상태여서만이 아니었다. 현재 알버트가 내게 무엇을 하든 타격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내게 무얼 하든 나는 기꺼이 받아주었을 테니까.

나는 알버트가 때리는 걸 묵묵히 맞아주었다. 나는 어린 알버트를 품에 꼭 안았다.

…이렇게 작았던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힘들었구나.

“알버트,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

“굳이 뭘 하지 않아도 돼. 그냥 살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정말 존재만으로도, 그는 충분했다.

잠시 그를 품에서 놓은 나는 그의 눈가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에게 내 마음이 닿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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