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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91화 (91/156)

91화. [S공금]

자리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로제는 섬뜩한 시선으로 알버트를 응시했다.

“흑마법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 알고 계시나요, 왕자님?”

오늘 했던 이야기는 잊어버린 사람처럼, 알버트를 칭하는 호칭은 다시 왕자님으로 돌아갔다.

그게 로제가 사랑하는 알버트와 딱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알버트는 굳이 그 호칭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호칭이 지금 로제를 안심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몇 번이라도 들으리라.

로제를 안심시켜 정인과 새끼 드래곤의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네 생명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지.”

알버트는 그녀의 상태를 천천히 살피며 상황을 파악했다.

함께 날아오던 메르시는 자취를 감추었다. 로제 앞에 자신이 나타나서 좋을 바가 없다는 걸 알고 숨은 것이다.

아마 이 근처 어딘가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우선 로제의 마법진만 멈추면 메르시가 그녀를 환상 마법으로 제압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로제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드래곤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로제 아티어스는 자신의 몸에 들어갔던 유정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싫어한다.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하양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알버트는 로제의 곁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마법진 앞에 선 알버트를 보며 로제가 눈을 반짝였다.

“왕자님, 저는 어릴 때부터 계속 생각했어요. 세상에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까.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메르시가 그녀에게 환상 마법을 걸었을 때 예프넨 후작을 봤다고 했었다.

그 사정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갔다. 예프넨 후작은 아이들을 자신의 마력을 위한 제물로 삼으려 들었다.

제물로 삼기 전 아이들의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싶어 했을 테고, 흑마법사로 만드는 것으로 이를 이루려 했었겠지.

자신이 가진 본래 마력을 뛰어넘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게 흑마법이니까.

그게 자신의 생명을 좀먹고, 영혼을 타락시킨다 해도. 금단의 과일에 한번 손을 댄 사람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힘의 달콤함을 아는 사람은 흑마법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더 자세한 건 찾아봐야 알겠지만….

알버트는 로제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넌지시 운을 떼었다. 그녀가 가장 솔깃해할 주제를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내게 계약하자 말한 것 아니냐.”

역시나 그가 먼저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자 로제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일은 그가 생각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갔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가식적인 미소를 입에 건 알버트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로제, 내가 일주일만 기다려 달라 했었지 않아. 나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단다.”

“…….”

“그게 너를 내 삶에 들이는 일이라면 더욱.”

달콤한 말로 로제를 홀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흐리멍덩하던 로제의 눈이 점차 초점을 되찾고 있었다.

아까 전 그녀를 장악하던 공포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끼야아아!

하양이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주먹을 쥔 알버트의 손에 땀이 났다.

정인의 상태만큼이나 새끼 드래곤의 상태가 걱정됐다. 정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새 신경 쓰고 있었다.

로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하양이를 살짝 응시하며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알버트와 시선을 맞췄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저는 몸뿐이라도 상관없는데. 바로 받아들이셔도 됐어요. 왕자님은 어차피 절 사랑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래서 몸이라도 가지고 싶었어요. 겉으로는 늘 상냥하시니까.”

연달아 늘어놓는 말에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제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겨우 반나절 만에 모든 걸 포기하면 너무 아깝지 않으냐.”

알버트의 말에 로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그녀의 영혼을 절대로 죽이지 않아요. 왕자님. 제가 그녀의 영혼을 죽이면 왕자님께 사랑받지 못하잖아요.”

그녀는 자신이 내뱉는 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듯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그녀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알버트에게 사랑받지 못할 걸 알고 있으면서, 사랑받길 원하는 마음이 교차되어 있었다.

‘예프넨 후작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문제군.’

예프넨 후작이 죽으면서 후작가는 거의 멸문당했다.

로스투라투가 먼저 초토화시켰던 후작가를 메르시가 두 번째로 뒤집었고, 이번에 알버트가 왕이 되며 예프넨 후작가는 완벽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알버트는 고개를 잠시 숙이는 척하며 하양이가 있는 곳을 살폈다.

하양이의 옆에는 백금으로 만든 팔찌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입술을 짓눌렀다.

‘정인이 눈치채야 할 텐데.’

팔찌는 정인과 그가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매개체였다.

리암과 슈버트와 대화를 마친 이후, 알버트는 정인이 들고 나갔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정인이 그를 위해 준비한 백금 팔찌와 작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녀가 있었던 흔적을 되새기듯 팔찌를 손에 쥔 알버트는 고대 마법서를 살폈다.

그 마법서에는 전설 속의 대마법사들도 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들이 적혀 있었다.

그 속에서 알버트는 영혼을 형상화할 수 있는 마법을 찾아냈다.

비록 기간은 한 달이고, 형상화된 영혼의 모습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한 달이면 그녀를 다시 찾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법을 집어넣은 팔찌를 들고 주위에 있을 정인을 불렀지만, 정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팔찌에 마법을 새겨 넣는 모습을 보았다면 팔찌를 손에 쥐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 없다면 로제 아티어스를 따라갔을 거라 생각하며 로제의 방으로 향했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탑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때마침 메르시에게 연락이 왔다.

로제 아티어스가 탑을 찾아왔다고.

탑으로 날아가고 있는데, 하양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 후 메르시를 만났고 로제를 마주하기 위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알버트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말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니?”

“왕자님께서 계약만 해주신다면요.”

로제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알버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눈 속에 살기가 넘치던 이다. 계약만 해주면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어디까지 진심일까.

어쨌든 그가 나타난 이후 로제의 관심은 마법진이 아닌 계약서로 옮겨간 것처럼 보이긴 했다.

대체 로제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건지 알버트는 알 수 없었다.

표정을 갈무리한 알버트는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을 할 테니 그만 내 손을 잡거라.”

“…….”

“내가 거짓말을 한 적 있더냐.”

알버트는 로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로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환희로 물든 얼굴은 처음으로 그녀를 순수하게 보이게 했다.

마법진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피로 물든 마법진에서 걸어 나온 로제는 알버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조심스레 올려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내 이 손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꽉 잡았다. 로제의 모든 신경이 알버트를 향해 있었다.

이때다.

숲속에 숨어 있던 메르시의 지팡이가 움직였다. 처음 로제를 패닉에 빠트렸던 환상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법은 로제에게 닿지 못한 채 튕겨 나왔다.

“…뭐지?”

메르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황한 알버트가 손을 움직이려던 찰나, 로제가 그를 꽉 안았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채로, 로제가 음산히 중얼거렸다.

“역시 왕자님도 거짓말을 하셨군요.”

“…….”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였어. 후작님이 한 가지는 제대로 알려주셨네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거.”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다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로제가 알버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제 인생의 반절을 걸어 만든 마법진이에요. 영혼을 저주하는 데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거든요.”

“…….”

“제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왕자님도 불행했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만큼은, 알버트도 로제를 향한 혐오를 숨길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놓겠다는 이에게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알버트는 로제를 순식간에 떼어냈다. 로제는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알버트는 깨달았다.

마법진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저주를 완성할 준비가 끝난 것뿐이었다.

로제가 그를 저주하듯 외쳤다.

“왕자님의 미소를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배니시(Vanish)!”

그가 모든 걸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주문을 외쳤다.

이미 발동된 마법진, 그것도 흑마법진은 이런 마법으로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버트는 주문을 외쳤다.

핏빛으로 물든 마법진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생명력을 쏟아부어 만든 흑마법을 잠시 내리누를 정도로 알버트의 힘은 강력했다.

시작된 마법을 멈출 수 없다면 지워 버리리라. 알버트는 이를 악물며 마법진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영혼과 목숨을 건 흑마법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소용없어요, 왕자님.”

뒤에서 로제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버트, 나 아직 살아 있어요!”

지금 그를 알버트라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알버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양이와 팔찌가 있는 곳으로.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이 익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목소리의 주인은 없었다. 하양이가 있던 자리는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하양이와 정인이 사라졌다.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알버트와 로제가 보였다. 로제는 알버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모두 로제를 방심하게 하기 위한 연기임을 알았기에 오히려 알버트가 안타까웠다.

나는 재빨리 하양이에게로 다가갔다.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하양이의 모습은 악몽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양이는 로제가 건 흑마법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양이를 안타깝게 살피던 나는 그 옆에서 반짝거리는 물체를 발견했다.

“…이게 뭐지?”

자세히 보니 내가 알버트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백금 팔찌였다.

알버트가 이걸 괜히 가져왔을 리 없다. 나는 팔찌에 손을 뻗었다.

팔찌를 만지던 찰나, 투명했던 내 몸이 형태를 갖추었다. 살이 색을 찾고 손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감격했다.

내가 보인다니! 나는 우선 알버트에게 있는 힘껏 소리쳤다.

“알버트, 나 아직 살아 있어요!”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하양이와 함께 알 수 없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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