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까 전 알버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로제를 처벌할 수 있게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증거를 찾으라고 메르시에게도 언질을 해두었다 했었지.
그는 로제가 탑에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로제를 혼자 둔 것도 손쉽게 증거를 얻기 위한 계획이었는지 모르겠다.
목에 들이댄 지팡이는 꽤 날카로웠다. 살을 파고드는 게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닐 텐데, 로제는 오히려 웃었다.
“나를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못 들었나 보지?”
“죽이지만 않으면 다른 건 가능한 거 아닌가? 전하와 계약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살려두면 되는 거잖아.”
…메르시 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나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보여주지. 평생 고통스러운 환상 속에서 살아가게 해줄까?”
말을 하는 순간 메르시의 지팡이 끝 불빛이 반짝였다. 여유롭던 로제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놀란 건 메르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지팡이를 쥔 손의 힘을 느슨하게 풀며 입을 서서히 벌렸다.
아무래도 메르시가 로제에게 환상을 보여준 것 같은데,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예프넨 후작의….”
“나한테 손대지 마!”
발작적으로 소리친 로제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불길해 보이는 검은색 불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메르시를 순식간에 뒤로 밀어냈다. 메르시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커흑…!”
메르시를 보며 입술을 짓씹던 로제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처럼 공포에 질린 얼굴은 처음이었다.
메르시의 마법은 예전에 알렉산더가 로스투라투에게 보여줬던 악몽과 비슷한 이치인 듯했는데….
대체 로제가 무엇을 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로제를 패닉 상태에 이르게 했다는 건 분명했다.
메르시가 보여준 기억이 그녀의 트라우마를 발동시킨 것이다.
로제가 잘근잘근 입술을 씹자 사이로 피가 살짝 흘렀다. 로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주문을 외쳤다.
“런(Run)!”
주문을 외친 로제가 황급히 움직였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우선 로제를 따라갔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게 먼저였으니까.
메르시의 상태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심각한 건 아니니 금방 해결되겠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로제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아픈 사람 같기도 했다.
아까 전, 메르시가 예프넨 후작이라고 말했었지.
그게 로제의 공포심을 자극한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의식도 없는 귀신 상태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
“…….”
“너만 사랑받을 수는 없잖아. 난 그렇게 발버둥 쳐도 안 됐는데. 그래, 내가 사랑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아. 어차피 난….”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로제의 눈에는 초점이 나가 있었다. 나를 향해 하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로제가 어디 가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다.
당장 말은 못 해도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알버트에게 로제의 꿍꿍이를 알려줄 수 있을 거다.
로제는 공터에 멈춰 섰다. 나와 알버트가 북부지방으로 순간이동 하기 위하여 들렀던 숲이었다.
수풀에 무릎을 대고 앉은 로제는 미친 사람처럼 가방을 헤집으며 물건을 차례대로 꺼냈다.
그러고는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뚝뚝 떨어트렸다. 흑마법을 쓰기 위한 과정이 아닌가 싶었다.
흑마법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이 정상적인 마법을 위한 것과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알려야 해.
우선 로제가 어디 있는지 알았고, 무얼 하려는지도 알았으니 궁으로 돌아가 어떻게든 전할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궁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나는 내 손이 방금 전보다 투명해진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사람의 형태를 띠고 색깔이 있었던 내 몸 사이로, 밤하늘이 비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내 영혼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설마.”
고개를 돌린 나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로제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나를 노려보는 듯한 히스테릭한 모습에 나는 겁에 질렸다.
느껴진다. 내 영혼이 희미해지는 것이. 점차 의식이 사라지려 하는 게.
내 영혼을 거의 소멸시키려는 로제의 힘이 분명했다.
설마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아냐, 그녀는 알버트와 계약해 그를 가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계약에 없어서는 안 될 인질이었다.
알버트가 잠시 로제를 혼자 두었던 것도, 그녀가 내게 해코지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다른 방법으로 알버트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니까.
알버트와 계약하려면 로제는 나를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몸이 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사라지고 싶지 않다. 계속 살고 싶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말 들려어?]
머릿속에 하양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이었다.
“하, 하양아?”
나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맞아, 하양이와 텔레파시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지.
하양이가 내게 말하는 건 몇 번 들었지만, 내가 하양이에게 말한 적은 드물어서 잊고 있었다.
패닉 상태가 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이 맞구나. 여태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게 한심했다.
하양이도 영혼 상태인 내게 말이 전달될 줄은 지금까지 몰랐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하게 되니 반가웠다. 한번 깨닫고 나니 텔레파시를 보내는 건 쉬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양아, 마침 잘됐어. 내가 지금 로제를 따라왔는데-]
그런데 하양이가 다급하게 내 말을 끊었다.
[어디야아? 궁이야? 우리랑 같이 있어? 얼른 탑으로 돌아가야 해!]
선명한 목소리는 평소 느릿하던 때와 달랐다. 그게 하양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말뜻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탑으로는 왜 돌아가라고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혼은 자신이 육체를 잃은 곳에서 멀어질수록 소멸한대! 로제 아티어스가 그렇게 오래 살아 있을 수 있던 이유는 탑에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하양이의 말을 듣는데, 점점 내가 느끼는 고통이 심해졌다. 정말 로제가 이대로 날 죽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최대한 탑에 가까워져야 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했다.
나는 내게 저주를 거는 로제에게서 멀어지며 탑으로 달렸다.
[로제 아티어스가 지금 궁 밖 공터에 나와 있어, 하양아. 정확한 위치는….]
현 위치를 말하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
한편, 쓰러졌던 몸을 힘겹게 일으킨 메르시는 아까 전 로제 아티어스의 환상 속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렸다.
로제에게 걸었던 마법은 그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환각 마법으로, 메르시가 쓰는 것 중에서도 고위 마법이었다.
로제가 흑마법사라는 증거를 잡기 위해서 환상 속에 빠뜨린 후 가방만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로제의 기억 속에서 본 사람이 뜻밖이라 놀랐다.
‘틀림없는 예프넨 후작이었어.’
로스투라투에게 살해당한 후작.
마법사가 되기 위한 갈망이 엄청났고, 저택에 흑마법을 위한 제단까지 설치했던 예프넨 후작이 메르시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로제와 함께 있었다.
그게 로제 아티어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로제 아티어스와 예프넨 후작이라니.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접점이었다.
골치 아픈 건 예프넨 후작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다는 거였다. 그는 이미 죽었다.
그의 가문 사람들 모두 숙청당하듯 사라졌기에 후작에 대해 물어볼 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단 알버트에게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제 아티어스와 마주치는 순간, 이곳에 왔다 연락을 했었지만.’
메르시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벽에 부딪히면서 손목에 금이 갔는지 뼈가 욱신거렸다.
“어서 궁으로 돌아가야….”
그때, 탑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 눈을 찌푸린 메르시의 시야에 알버트가 보였다.
“전하? 여긴 어쩐 일로….”
헝클어진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문제는 흐트러진 알버트가 아니었다.
그의 품 안에는 괴성을 지르고 있는 화이트 드래곤이 보였다.
괴로운 듯 온몸을 비트는 모습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리고 불길했다.
메르시나 알버트 모두 이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끼야아아!
새끼 드래곤이 이렇게 우는 경우는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이 화이트 드래곤 죽을 때가 되었었나요?”
생각지도 못한 울음소리에 메르시는 굳은 얼굴로 알버트를 응시했다. 알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시간이 남았어. 드래곤보다 계약자의 영혼이 위험하다는 거지.”
“…울음을 터트릴 만큼.”
알버트와 메르시가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재빠르게 움직여 탑 밖으로 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메르시, 로제 아티어스가 어디로 갔느냐.”
메르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죄송하지만 모릅니다. 제 환상을 본 이후에 분노하여 공격했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탓에….”
“내, 내가 알아.”
메르시와의 대화 속에서 하양이가 입을 열었다.
“아, 알버트하고 순간이동 했던 곳에 있대.”
“…정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군.”
하양이는 온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고통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도를 높였다.
“수고했다, 새끼 드래곤.”
스치듯 흘린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메르시는 하양이를 걱정스레 보다 물었다.
“정인 양도 이렇게 아플까요?”
“…그나마 다행인 건 영혼일 때는 죽음 외엔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다는 거지. 지금 새끼 드래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란다.”
알버트의 속도는 빛처럼 빨랐다. 공터에 내려앉은 그는 마법진 안에 앉아 있는 로제 아티어스와 마주했다.
초점이 없던 로제의 눈동자가 점점 제 색을 되찾았다. 사뿐히 내려앉은 알버트는 입가에 걱정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네가 무엇을 보았든 진정하거라, 로제. 어찌 이러고 있어.”
“…….”
알버트의 나긋한 말투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 주변의 마법진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다.
알버트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붉은 피처럼 반짝이는 것은 흑마법사의 마법진이었다.
시전자가 그만두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없앨 수 없는, 제 생명과 영혼을 기반으로 그려낸 금기의 마법진.
끼야아아!
알버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하양이가 다시 울었다.
로제를 설득하지 못하면, 정인과 하양이 둘 다 죽는다.
알버트는 로제 아티어스의 마법을 멈춰야 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