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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89화 (89/156)

89화.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제게 말해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하기는커녕, 숨기지 않으셨습니까.”

리암은 알버트의 허점을 바로 지적했다. 맞았다. 그는 ‘나’였던 로제 아티어스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알겠네요. 그날 왜 감옥에 혼자 가셨는지. 왜 마법사들을 혼자 고문하신 건지. 추궁하려 드신 거군요. 마법사들이 로제 아티어스에 대해 아는 게 있을지.”

리암은 알버트가 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다.

알버트는 리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꺼내며 리암과 부딪치게 될 것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감내하기로 마음먹은 것일 뿐.

“죄송하지만 전… 그 여자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전하께 정말 득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네가 하는 비난은 달게 받으려 했지만, 이는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내게 득이다.”

가만히 있던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리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마치 잔잔한 물가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그의 감정 변화는 느릿하게 이루어졌다.

후 숨을 들이쉰 리암이 알버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례가 될 것을 알지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리암이 고개를 들며 알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숲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정말 알버트를 위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고, 행동이었다.

“전하, 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를 멀리하십시오. 그리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십시오.”

리암이 호소했다.

“일에 사심이 들어가게 되면, 좋은 주군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전 전하가 강대한 주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완전무결한 왕의 자리에서 행복하시길 바라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잠자코 리암의 이야기를 듣던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리암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네가 바라는 나의 행복이지, 내 행복이 아니야.”

리암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다.

“네가 날 얼마나 믿고 따르는지 알아. 나는 모두에게 공정한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고 나를 믿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할 거란다. 반란에도 차질은 없었지 않으냐.”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알버트는 자신의 힘과 신하들의 힘을 이용해 로스투라투를 순식간에 끌어내렸고, 왕의 자리에 올라 순탄히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일에 큰 차질이 생겼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걸 숨긴 건 내가 잘못한 일이다.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묵묵히 들을 것이다. 하지만, 내 행복에 대해서는 단정 짓지 말거라.”

알버트는 내 과거를 숨겼던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것들이 좋다.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준 이다.”

그의 대답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리암을 달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대답을 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탑에서 알버트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그때 알버트의 행복은 리암이 말하는 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아니, 행복이 아니라 그의 목표에 가까웠다.

내가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알버트가 했던 말이 있다.

“널 행복하게 하는 건 쉽구나.”

탑에서의 생활이 하양이만 바꿔놓은 것이 아니었다. 탑에서의 생활은 알버트의 가치관도 변화시켰다.

내가 그와 함께한 소소한 일상이 그의 삶에 스며들어 행복의 정의를 새롭게 만들어냈다.

벅찼다. 때로는 답답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시간 속에서 당신도 행복했다.

그 시간이 소중해지고, 당신과 함께하는 일상이 소중해진 게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되어 기뻤다.

“내 삶의 일부가 된 사람을 어찌 놓겠느냐.”

알버트는 리암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네 생각처럼 이상적인 주군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암이 점차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냉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느리게 중얼거렸다.

“…변하셨군요.”

리암이 짓누르는 입술 사이로 생각지 않았던 감정이 돋보였다.

“저는 항상 제가 전하를 도와드려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계셨군요.”

“…….”

“전 어릴 적,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 리암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감히 전하의 행복을 정의 내리려 한 것에 사죄드립니다.”

“나도 네게 언질 한번 없이 일을 내 마음대로 덮은 것에 대해 사죄하겠다.”

고개를 든 리암 앞에 이번엔 알버트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이게 무슨-”

리암이 바로 알버트를 일으키려 했지만, 알버트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소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왜, 왕은 신하 앞에 무릎 꿇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더냐. 잘못했으면 인정하고 벌을 달게 받아야 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알버트의 말에 리암이 결국 피식 웃었다. 차가운 얼굴에 퍼지는 미소는 미미했지만 그와 잘 어울렸다.

“도와줘야 한다 생각했다니, 너도 메르시도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구나. 난 원망한 적도 없는데.”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유만으로 전하를 따른 것은 아닙니다.”

“안다. 그런 이유뿐이었다면 나도 널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고.”

서로를 보며 웃는 모습은 훨씬 편안해 보였다. 둘의 사이는 내 생각보다 더 오래된 모양이었다.

아직 알버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많구나.

비록 이런 상황에 처했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해하게 될 것 같아 좋았다.

내게 알버트는 더 이상 책 속의 등장인물이 아닌 사람이니까.

내가 만약 이 상태가 되지 않았어도 이런 걸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나는 알버트와 리암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에서 빠져나왔다.

리암이 내가 있는 걸 모르는 상태이니 그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거북했다. 둘만의 시간은 가지게 해줘야겠지.

그리고 로제 아티어스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알버트가 그녀를 감시하기 쉽게 자신의 궁 안에 두었고, 두 사람이 계약서를 쓰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다지만 걱정은 여전했다.

이대로 순순히 알버트의 말을 따를 것 같지 않았으니까.

몇 번 드나든 적 없는 궁이라 꽤 헤매긴 했지만 이내 나는 결국 로제 아티어스가 머무는 방에 도달했다.

방에 들어선 나는 그녀가 외출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가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로제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 창문을 연 그녀는 자신의 손을 움직였다. 지팡이 없이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부리나케 그녀를 뒤따랐다. 영혼 상태라 보이지 않을 테니 그녀의 뒤를 쫓기엔 제격이었다.

“지팡이를 새로 맞추든가 해야지, 진짜.”

하늘로 날아오른 로제가 머리를 흩날리며 투덜거렸다. 그녀가 원래 쓰던 지팡이는 지금 내 방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거겠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로제의 얼굴은 어두웠다.

알버트 앞에서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던 얼굴은 어디 가고 죽은 듯 무감한 눈빛만 남았다.

…대체 로제는 왜 이렇게 된 거야?

생각도 잠시, 나는 로제 아티어스가 마법을 겹겹이 써가며 도착한 곳이 어딘지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탑에는 왜 가는 거지?”

로제 아티어스가 내려선 곳은 탑 앞이었다. 그녀가 알버트를 가둬두었고, 나와 알버트가 갇혀 있었던 탑 앞에.

로제는 탑 앞에서 뭔가 주문을 외웠다. 탑의 문이 손쉽게 열렸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 잠긴 탑의 안쪽이 보였다.

안에 들어간 로제는 불을 밝히고 바삐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내가 머무르던 다락방에 들어간 로제는 다락방 위쪽에 있는 뭔가를 잡아당겼다.

위쪽 천장에 작은 문이 열리며 내가 몰랐던 공간이 보였다. 뭔가 숨겨두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있었어?

“플라이(Fly).”

마법을 외운 로제는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다락의 다락… 이라고 칭할 수 있는 공간은 무척 작았다.

그 안에서 나는 여러 도구를 챙기는 로제를 보았다.

그녀가 흑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도구 같았다.

신속하게 움직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챙기는 모습이 그녀가 이걸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보였다.

물품을 챙기던 로제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영혼이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 영혼이 누굴 뜻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새끼 드래곤의 계약자라도 흑마법사에게 지속적으로 저주받는 영혼은 오래 못 산다고.”

내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줄 안다면 오산이다. 나를 너무 쉽게 내치려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오랜만에 오기가 불타올랐다.

내가 궁에 돌아가면 지팡이부터 찾아서 마법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로제는 자신의 물품을 모조리 챙긴 후 다락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 기대어 있던 불청객과 마주했다. 갑작스러운 마주침에 놀란 로제를 보며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언니, 탑에는 어쩐 일이에요? 그것도 저도 몰랐던 공간에.”

로제의 눈이 깜빡였다. 상대의 친근한 태도에서 그녀는 알버트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여긴 듯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찰나, 메르시는 순식간에 로제와 거리를 좁히고 그녀의 목에 지팡이 끝부분을 짓눌렀다.

“가방에 있는 건 순순히 내놓는 것이 어때요.”

메르시가 서늘히 웃었다. 내가 여태 보지 못했던 살기가 번뜩였다. 나를 대할 때와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방금 로제를 나에게 하듯 대했던 건 알버트가 알려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순간 로제의 방심을 유도하려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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