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알버트가 리암과 슈버트에게 도움을 청할 것은 알았지만 로제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을 말한 건 뜻밖이었다.
“흑마법사라고 하셨습니까?”
리암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로제와 흑마법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던 게 여실하게 드러났다.
놀란 건 슈버트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겉모습만 보고서는 모르는 일이네요. 역시 동물이 최고예요….”
슈버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답했다. 그 뒤에 덧붙인 말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사람에 환멸을 보이고 동물을 중요시하는 모습에서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리암과 슈버트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던 알버트가 슈버트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제 아티어스’가 흑마법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해야겠지.”
“그건 또 무슨….”
“이전, 로제를 데리고 성에 찾아갔던 일 기억하느냐.”
그는 내가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고통받았던 때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알버트의 물음에 당황해하던 슈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인상이 어땠지?”
의외로 알버트는 내 인상에 대해 먼저 물었다. 이야기의 흐름이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네가 놀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거든, 슈버트. 너도 지금 상황이 의외라 생각하지 않느냐.”
슈버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앞에서 인사 평가 듣는 느낌이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저들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지만.
“…나쁘지 않았죠. 어쨌든 맛있는 음식도 했었고, 사람들 챙기는 모습도 보였고.”
슈버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나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때 해준 수제비나 치킨이 괜찮았던 모양이지.
그가 나를 나쁘게 여기진 않았다는 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암, 너도 나쁜 모습만 보지는 않았을 테지.”
넌지시 건네는 말에 리암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단호히 답했다.
“전하, 외람되지만 지금 이야기는 범죄자를 감싸주시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냐.”
“겉모습이 모든 걸 말해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흑마법사는 존재 그 자체로 해로운 이들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예?”
알버트의 대답은 그동안의 말과 완벽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리암과 슈버트는 아직까지 알버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제 아티어스’는 흑마법사로, 그녀의 영혼은 타락하여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탑에 들어갔을 때, 로제의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갔다.”
“…다른 영혼이라면.”
“너희가 만났던 로제는 다른 사람이다.”
알버트는 상황을 찬찬히 이야기했다. 리암과 슈버트는 그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흑마법에 대해 무지한 건 사실이지만… 영혼이 바뀌는 게 정말 가능한 일입니까?”
리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알버트의 책상 밑에서 때를 기다리던 하양이가 위로 폴짝 올라왔다.
으아악! 앞에 서 있던 슈버트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리암은 미간을 좁히며 하양이를 응시했다. 알버트는 하양이를 가리키며 답했다.
“이 드래곤이 증거다. 드래곤과의 계약은 영혼으로 맺어지지. 그녀는 계약할 때 진짜 자신의 이름을 밝혔어.”
“자신이 정인이라고 했어.”
하양이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흔들림 없는 눈빛까지 자신감이 넘쳤다.
서로 맞춘 적도 없는데, 알버트와 하양이의 호흡은 엄청났다.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었구나.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지냈으면 좋았을걸. 가운데 껴서 땀을 뻘뻘 흘렸던 걸 떠올리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현재 로제의 손등에는 드래곤 계약자의 문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그녀가 전혀 다른 영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지.”
“…세상에.”
리암도 내 손등의 문양을 본 적 있었기에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리암이 입을 서서히 벌렸다. 평소 무뚝뚝한 얼굴만 보이던 리암의 표정 변화를 목격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가 쏠쏠했다.
아, 이러면 안 돼. 지금은 진지해야 할 때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알버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다 다소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그렇게 말리던 드래곤과의 계약이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제대로 모를 수 있었다니, 우스운 일이지.”
알버트의 말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말문이 막힌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알버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그시 깨문 입술 사이로 고뇌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을 그가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알지 못했다.
하양이를 위했던 이타적인 행동이 내 영혼을 구해줄 줄은.
단 한 번의 선행이, 나를 살렸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는 것?”
리암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이건 사실 내가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당신은 언제부터 내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저 기억을 잃어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을까?
“내게 탈출을 돕겠다는 계약서를 들고 온 순간부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생각했지.”
내 생각보다 훨씬 일렀다.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면 정말 영혼이 바뀐 직후나 다름없던 때였는데.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바뀔 동기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 180도 바뀐다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소리였다.
전혀 당연하지 않은 전제인데 알버트가 말하니 말이 되는 것 같다.
“계약서를 쓰기 전에 무슨 말을 했었던 건가요?”
슈버트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탈출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 의심을 시작했다면 그 전 행동에서 모순을 보았을 터. 그는 그게 궁금한 것이다.
“나와 함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하던가.”
알버트는 덤덤히 이야기하는데, 정작 이야기를 듣는 내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저런 말을 하고 난 직후에 갑자기 사람이 정반대로 바뀌어 탈출을 돕겠다 하면 의심할 법도 했다.
“나를 대하던 눈빛이 달라졌고, 태도도 말투도 목소리도.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졌었지.”
그가 얼마나 사람의 변화에 예민한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그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를 향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쨌든 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이용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연이은 말에 나는 흠칫했다. 당신, 진짜 날 홀리려는 거였어.
빙의한 직후, 내가 그를 좋아한다느니 그와의 스킨십을 원하지 않냐느니 했던 게 다 속셈이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처음에 그에게 빠지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세뇌하듯 하던 말이 결국 맞았던 거다. 살짝 섭섭해지던 찰나였다.
“오히려 내가 빠졌지만.”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인 알버트가 예쁘게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진심 어린 미소였다.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어.”
다시금 중얼거리는 알버트의 눈빛이 잠시 흐릿해졌다.
아마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애정을 담은 시선이 나를 향한 것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좋았다.
그냥 나답게 행동했을 뿐인데, 그게 알버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나는 그저 나였는데, 그는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속내를 들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일까, 자꾸 질문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과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내 어떤 모습에 반했던 건지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
짧은 시간에 생긴 그 감정이 당신이 이렇게 나를 위해 애쓸 만큼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고.
당신의 마음을 믿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고 싶다. 나는 겁쟁이라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게 마음을 전하는 알버트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이처럼 답답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흑마법에 걸렸을 때 그녀가 로제 아티어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나, 때가 되면 직접 말해줄 것이라 여겼단다.”
연이어 하는 말도 모두 날 놀라게 했다. 내가 이 주제를 불편해하던 것도 다 티가 났었던 모양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말을 돌린 것이 그의 눈에는 다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다시 사라지고 본래 로제 아티어스가 돌아온 거군요.”
리암의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살아 있는 건 눈앞의 이 새끼 드래곤이 증명하고 있지.”
“영혼이 오래 살 수 있나요?”
슈버트가 궁금한 듯 질문을 던졌다.
“아니, 육체를 찾지 못한 영혼은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 로제 아티어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래서 필사적으로 영혼을 몰아내기 위해 저주를 걸었던 것 같아.”
“…저희에게 시키실 일은 그럼.”
“로제 아티어스의 육체에 최대한 아무런 손상도 없이, 그녀의 영혼만 빼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알버트의 눈빛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정인의 영혼이 몸으로 돌아가는 순간, 로제 아티어스의 영혼을 죽인다.”
잔혹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바로 살인을 입에 담았다.
어찌 보면 로제에게는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흑마법사였으니까.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건 그녀에 대해 찾아보는 일이겠네요. 그녀의 행적을 파서 흑마법사에 걸맞은 증거를 찾아내는 것. 현재는 그녀가 흑마법사라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이야기를 듣던 슈버트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메르시에게도 언질은 해두었지만.”
슈버트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알버트와 눈을 마주쳤다.
결연한 얼굴을 한 슈버트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할 테니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항상 고맙구나.”
“전하를 위한 일인걸요.”
씨익 웃은 슈버트는 하양이를 힐끔 바라보았다가 방을 바로 나섰다. 걷는 듯 뛰는 발걸음이 날랬다.
리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서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물끄러미 알버트를 응시했다.
모든 것을 관통할 듯한 화살처럼 서늘한 눈은 슈버트와 사뭇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짧게 숨을 내쉰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꽤나 감정적으로 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적이다. 그동안의 내가 이상할 정도로 이성적이었을 뿐이지.”
덤덤히 말한 알버트가 웃었다.
“이게 정상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