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알버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뇌가 나에게까지 느껴졌다.
“네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협상이 시작되었다.
“영혼에 대해 적힌 서적을 찾아보시면 다 나오는 말입니다. 영혼과 관련된 분야를 저만큼 열심히 찾아본 사람은 드물 거예요.”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건 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현상인가 보군.”
“흑마법을 쓰면 쓸수록,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일을 몇 번이고 겪었으면서 흑마법을 쓰는 걸 포기하지 않은 로제가 어떤 의미로는 대단해 보였다.
“목숨을 잃는 건, 제게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요….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로제는 알버트를 갈망했다. 그녀의 삶 속에서 이런 빛은 평생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처음으로 햇빛을 본 사람처럼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눈 안에서 욕망이 번들거렸다.
“자, 왕자님. 계약을 하시겠어요?”
알버트는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다소 무감정해 보이던 얼굴의 입꼬리가 점차 올라갔다.
내가 로제에게 빙의한 후 처음 보았던 가식적인 미소였다.
가면을 내린 로제와 다르게, 자신을 꽁꽁 동여맨 알버트의 미소가 나는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느냐.”
알버트의 미소를 홀린 듯 응시하던 로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차갑게 대하던 그의 태도가 달라진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이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실 거라 믿어요.”
“그래, 그럼 이만 궁으로 돌아가야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알버트는 로제를 자연스레 지나쳐 내가 오늘 들고 나왔던 가방을 주웠다.
로제가 내 가방을 드는 게 싫었던 것이다.
가방의 손잡이를 잡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리 와.”
하양이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던 알버트는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하양이를 자연스레 제 쪽으로 이끌었다.
갈팡질팡하던 하양이는 로제와 눈을 마주치고서 움찔하더니 후다닥 알버트 뒤에 섰다.
“반란은 잘 끝마치신 모양이네요.”
“…그래. 돌아가면 네가 머물 곳을 정해주마.”
“원래 머무르던 곳이 없었나요?”
“방을 전전하던 중이었지.”
그는 로제에게 내가 기거하던 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숨겼다.
“왕자님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준비해 주세요.”
로제는 생글생글 웃으며 요구했다. 알버트는 여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왕자님이라 부르지 말거라.”
“아, 더 이상 왕자님이 아니시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로제는 곧바로 호칭을 바꿨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듯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이 너무 그다웠다.
어쨌든 아직 해결된 일은 없고, 로제는 알버트를 가지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지만….
알버트와 함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계단을 내려가 부엌과 바깥이 연결되는 문 앞에 선 알버트가 말했다.
“로제, 잘 따라오거라.”
말 그대로 로제 아티어스를 부르는 듯한 말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름을 말하는 어조와 목소리의 높낮이. 따스한 봄바람처럼 살랑이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건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네!”
그가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의 걱정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알버트는 로제에게 상냥히 대해주는 듯하면서도 적당한 선을 그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주었지만, 적당한 추임새만 넣을 뿐 질문은 일절 던지지 않았으며 접촉도 손 정도까지만 허락했다.
로제는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하는 모양새였지만, 그게 언제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욕심은 언제든 사람의 마음을 좀먹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알버트는 자신이 기거하는 궁 안에서도 그와 제일 가까운 방에 로제를 들였다.
“그럼 오늘은 푹 쉬거라.”
“네에….”
왕이 머무는 궁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화려하게 꾸며진 방을 보며 감탄하던 로제가 부러 입꼬리를 늘였다.
그녀의 손은 다시 알버트의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은 부러 내게 거부감만 살 뿐이야. 내가 아까 전처럼 대하길 원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만.”
부끄러운 듯 숙인 고개 때문에 로제에게 알버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보였다.
“오늘 꽤 잘 참아주었다는 것 알고 있단다. 고마워. 나도 계약에 대해서 훨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참이다.”
거의 죽어버린 듯 무감각한 얼굴로 로제에게 달콤한 목소리를 속삭이는 이면을.
“그러니 놔주거라.”
알버트의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에 로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든 얼굴은 황홀경에 물들어 있었다.
온몸이 새빨갛게 물든 모습은 그녀의 진심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쉬거라.”
나지막이 말한 알버트는 방문을 닫았다.
로제와 헤어진 알버트는 하양이와 함께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집무실도 아니고, 서재도 아니고 침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쫓는데 알버트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리현상인가.
머쓱해져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제야 알버트가 문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이런 걸 까먹으면 어떡해!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고 할 말을 잃었다.
로제의 손길이 닿았던 손을 벅벅 닦고 있는 알버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초점을 잃은 듯한 얼굴로, 그는 몇 번이고 흐르는 물과 거품 속에서 손을 씻어냈다. 힘을 줘서 씻는 손이 빨개졌다.
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위해서 로제의 모든 행동을 참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영혼으로서 있는 게 오히려 알버트에게 짐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죄책감 가지지 말거라.”
알버트는 내가 듣고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네가 잘못한 것이 없지 않으냐. 그저 인간 같지 않은 치와 접촉한 것이 싫었을 뿐이다.”
“…….”
“넌 그저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내게 건넨 위로 후 알버트는 하양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인에 대해 느껴지는 건?”
“없어….”
“메르시에게도 연락해 봐야겠구나. 일을 혼자서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어.”
골똘히 생각하던 알버트는 하양이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알버트가 잠들고 나면 서재에 가서 책을 뒤져봐야겠다고 다짐한 나는 우선 그들을 따랐다.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알버트가 사람들을 불렀다.
시녀장과 시종장, 그리고 하급 고용인들을 관리하는 하녀장이 금세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궁의 거의 모든 사람을 총괄하는 이들이었다.
알버트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이들에게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로제 아티어스가 기억상실에 걸렸다.”
알버트는 내가 써먹었고, 로제가 써먹으려 했던 병증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내가 빙의했던 로제와 현 로제의 말투와 행동은 확실히 달랐다.
처음 알버트를 속이려 했을 때 로제가 한 행동은 확실히 나와 닮아 있었지만, 그녀가 알버트에게 모든 속셈을 들킨 이후에도 내 흉내를 낼지는 미지수였다.
알버트가 시키면 할 테지만, 거기에 또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기억이 없어진 이후, 사람이 완전히 변했더군.”
알버트는 씁쓸한 미소를 그리며 시녀, 시종, 그리고 하녀들까지 모든 이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라 명령했다.
기억을 잃은 경위를 밝혀내어 모든 기억을 되살릴 때까지 이 명령은 지속될 것이라 말하는 그의 모습은 거침없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알버트의 모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이겨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저 그의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일 처리, 말투, 어조와 억양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사실 알버트가 사람들 앞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게 처음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장점을 찾자면, 알버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것 정도인가.
나는 지금의 암울한 상황에 좋은 면을 찾으려 애썼다.
나는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태 알버트가 한 말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대로 로제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길 바라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쥔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양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다 알아듣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새삼스레 하양이가 얼마나 변했는지도 눈에 보였다.
사람들이 나간 이후, 리암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결 좋은 흑발 사이로 보이는 녹안이 숲처럼 짙은 색을 띠었다.
하지만 리암보다 반가웠던 건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슈버트였다.
마지막으로 본 게 반역 때였으니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차분한 리암의 머리와 다르게 부스스하게 정리되다 만 곱슬머리 사이로 보이는 갈색 눈동자까지,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얼굴은 여전했다.
특히나 알버트 앞이라서 그런지 경외가 어린 얼굴에는 천진난만함이 돋보였다.
알버트를 바라보는 슈버트의 눈에서 하트가 뿜어져 나오는 게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불러주시니 영광입니다, 전하! 왕위에 오르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는 알버트 앞에 바로 무릎을 꿇었다. 알버트는 손수 슈버트를 일으키며 인자한 주군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야말로 영광이군.”
슈버트는 알버트의 친절에 감격했다.
“슈버트와 함께 부르시는 건 오랜만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리암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로제를 묶어둘 방법이 필요해.”
리암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전하? 전하께서 아티어스 양을 아끼고 계신 것은 알지만 현 발언은 왕으로서 부적절합니다.”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흑마법사다.”
리암의 착각도 잠시, 알버트의 말에 집무실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