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알버트의 말에 불안한 듯 눈을 굴리던 로제가 우물쭈물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정체가 들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알버트의 반응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사람이 아닌 듯한 직감이었다.
움찔하던 로제가 알버트의 손목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녀가 시선을 떨구며 눈을 깜빡였다.
“왕자님, 사실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는데….”
잠시 뜸을 들인 로제가 말했다.
“사실 탑에 돌아온 순간, 탑에서 나갔던 이후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어요.”
알버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네, 그래도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로제는 믿어달라는 듯 절박하게 말했다.
이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나를 매일 관찰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웃는 것처럼 웃고, 목소리의 높낮이도 맞췄으며 말투도 똑같이 따라 했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막 로제의 몸에 빙의했을 때 기억을 잃었다며 변명한 적 있었다.
선례가 있으니 지금 로제의 말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었다.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알버트라도 내가 다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하면 흔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은 이리 쉬운데.”
알버트는 로제의 손이 닿은 곳을 벌레 쳐내듯 팍 움직이더니 미간을 좁혔다. 짜증이 서린 얼굴은 나도 잘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눈으로 로제를 응시했다.
“죽이기 전에 말하는 것이 네게도 이롭지 않겠느냐. 네 몸에 빙의했던 그녀는 어디 있지?”
로제가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짓눌렀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절망감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애처로운 표정은 동정심을 자극했다. 나는 그녀와 알버트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듯 보였으니까.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왕자님께서 좋아한다 고백하시고, 안아주시던, 키스해 주시던 로제잖아요.”
낭떠러지 끝에 내몰린 로제는 알버트를 붙잡으려 애썼다. 애처롭게 호소하는 목소리는 진정성이 넘쳤다.
알버트의 그녀가 잡은 손목에 반동을 주어 그녀를 뒤로 쳐냈다. 그것만으로도 로제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혐오감이 일렁였다.
부정적인 감정을 부러 감추려 들지 않는 모습이 낯설었다. 미소 속에 감춰온 증오가 저런 것인가 싶어서.
“사람이어야 사람 취급을 해주는 거지.”
사람의 본질은 꿰뚫어 본다던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은 몰랐다.
사람이 달라진 것을 눈빛만 보고도 알아차릴 정도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구나. 평소보다 훨씬 비상한 눈치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로제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얼굴에 철면피라도 깐 것처럼 뻔뻔하게 호소했다.
“왕자님, 지금 제가 이상해 보인다는 것 알지만… 똑같은 사람이라는 건 믿어주셔야 하잖아요. 저를 믿겠다 하셨으면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여우주연상감이었다)
억울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말에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알버트의 판단을 흐려놓을 셈인 듯했다.
알버트는 그녀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하양이에게로 다가서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본질을 결정짓는 건 육체가 아니란다.”
입을 서서히 벌리는 로제의 얼굴이 경악감으로 물들었다.
“똑같은 육체라도 전혀 다른 걸 어찌 착각할 수 있을까. 그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지.”
로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알버트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나는 알버트가 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감에 젖어 그와 하양이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알버트! 알버트!”
목청껏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알버트의 몸은 미동도 없었다.
투명하게 변해 버린 지금 내 상태에서는 목소리를 내봤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답답하다, 답답해. 일단 탑을 나가야 하나? 여기를 나가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는 있을까?
알버트는 몸을 숙여 하양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평소 하양이를 대할 때 보이는 적대감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명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진지한 모습에는 장난기가 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살아 있으니까 사라지지는 않았어….”
덩달아 하양이도 진지하게 답했다. 맞다. 하양이와 나는 계약자로서 수명을 공유하는 사이다.
내가 하양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만큼, 하양이도 내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계약자.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로제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나와 하양이의 계약이 담긴 문양이 있는 곳.
문양이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드래곤과의 계약은 영혼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나는 계약할 때 내 이름을 말했지. 로제 아티어스가 아닌 유정인.
내 이름.
알버트는 설마 그녀의 손등에서 문양이 사라진 걸 본 것일까? 그러면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알버트라도 사람이 바뀐 걸 단숨에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알버트와 로제가 이야기를 할 때 눈길이 손등을 향한 적은 없는 듯한데….
“손등을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어어….”
때마침 하양이가 알버트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양이도 알버트에게 문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손등이 왜.”
알버트는 하양이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로제가 계약할 때 내게 이름을 말해줬었어….”
“이름?”
“응. 자신의 이름.”
알버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걸 네게 먼저 말해줬단 말이지.”
…설마 이런 걸로 삐지는 건 아니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알버트를 보는데, 그가 ‘나중에 돌아오면 한마디 해야겠구나.’라고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돌아올 거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사고방식이 너무 그다웠다.
“알겠다. 드래곤과의 계약은 영혼과의 계약이니, 그녀가 본래 로제가 아니었다면 문양도 사라졌겠구나.”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는 하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숨을 폭 내쉰 그가 턱을 괴며 하양이에게 물었다.
“이름은 뭐라 하더냐. 나도 계속 ‘그녀’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인데.”
내가 로제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이게 더 중요한 듯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알버트와 시선을 마주치던 하양이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인이라고 했어.”
“정인?”
“응.”
알버트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되뇌었다.
“…정인.”
그의 발음은 정확히, 내 이름을 담았다.
계약할 때 흘러가듯 단 한 번 언급했던 이름.
이곳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이름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알버트라니 더더욱 그랬다.
“정인.”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에게 난 사실 로제가 아니라고 말해볼 것을. 이렇게 쉽게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알았으면 당연히 그랬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나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더 아쉬웠다.
내 이름을 중얼거리던 알버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묘하게 익숙한 이름인데….”
알버트의 말뜻이 무언지 생각하기도 전, 나는 로제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녀는 가면을 벗으려 작정한 듯했다. 만면에 핀 미소는 마치 악마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광기였다.
“왕자님, 그래도 저를 사랑해 주셔야죠.”
그녀는 알버트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더 이상 탑에 걸린 저주도, 마법이 걸린 지팡이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이는 중요치 않았다.
알버트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내가 왜?”
“저를 사랑해 주시면, 원하시는 사람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로제는 처음으로 내 존재를 인정했다. 그런데 그녀의 어조가 조금 이상했다.
마치 내 존재를 그녀의 편의에 맞춰 써먹을 수 있다는 듯 보였으니까.
알버트는 덤덤했다.
“네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구나.”
그가 신랄하게 대답했지만 로제의 미소는 여전했다.
“…날 죽이면 그 여자가 돌아올 몸도 없어질 텐데요?”
“…….”
“그녀가 그나마 이곳에 살아 있는 이유는 제가 살아 있어서인데.”
내가 이곳에 살아 있는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고?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섰다. 더 설명이 필요했다.
“왕자님, 우리 그럼 거래를 하면 되잖아요. 저는 왕자님의 사랑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의 영혼이 사라지는 게 싫다면, 저를 사랑해 주시면 돼요.”
“네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데?”
“…탑에 오셨을 때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로제는 슬쩍 알버트에게 다가왔다. 알버트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퍽 의연했다.
이럴 때 의연하다는 말을 쓰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정인의 영혼이 사라진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말하는 것이 먼저일 듯한데.”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운 좋게 기회를 얻는 영혼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살 방법을 찾죠. 그녀도 마찬가지였어요.”
로제가 알버트에게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현재까지 그녀가 한 말에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찾은 육체가 마침, 흑마법으로 인해 약해져 있던 제 신체였고요.”
“퍽 논리적이구나.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아.”
알버트의 가늘어진 눈매를 보며 로제가 사르르 웃었다. 나를 따라 웃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흑마법을 쓰는 만큼,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거든요. 문제는, 육체가 없는 영혼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거예요.”
사라진다고? 그럼 이대로 있다간 지금의 나도 사라진다는 말인가?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건 왕자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그녀가 제 몸에 빙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 육체가 영혼의 파동과 맞아서였어요.”
알버트는 말없이 로제를 응시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눈동자에 짙게 드리웠다.
로제가 속삭이듯 말했다.
“서로 맞는 육체와 영혼을 찾는 건 모래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에요.”
“…….”
“제 요구에 맞춰주시는 게 왕자님의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죠. 제 몸에 그녀가 다시 빙의하게 하는 법을 아는 사람도 제가 유일하거든요.”
그녀의 설명은 공포스러울 만큼 논리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로제가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알버트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처럼 로제의 손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로제의 얼굴에 환호가 피어났다.
“그럼 이제 그녀가 죽게 놔두시겠어요? 아니면 제 말을 따라주시겠어요?”
내가 읽은 원작 속에서, 알버트는 탑에서 나오자마자 로제를 단칼에 죽였다.
어쩌면 그때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로제가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결국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달려들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