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나는 레스토랑에 들어갈 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노을이 진 밤하늘에는 별이 가로등처럼 불을 밝혔다.
탑은 이제 한때 알버트가 머물렀던 곳 정도로 치부되어 일종의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비록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겉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탑이 멋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것뿐인데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니 신기했다.
알버트는 자신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어주는 하이드 마법을 걸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마법은 갈수록 섬세해지고 있었다.
하늘로 올라간 나는, 알버트와 처음 탑을 나왔을 때처럼 허공을 걸었다. 밤하늘의 별이 계속 이어지는 길 같았다.
시야에 점차 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알버트가 미리 물렸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사뿐히 내려와 문 앞에 섰다. 고요한 탑 주변이 반란을 일으켰던 날과 완전히 대비되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곳을 나온 이후로 처음이구나.”
알버트가 문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 잠긴 공간이 보였다. 알버트가 안에 먼저 들어가 불을 켰다.
오랜만에 보는 부엌이었다.
“나는 이곳을 좀 더 보다 올라갈 테니 먼저 가거라.”
알버트는 자신이 거의 드나들지 못했던 공간인 부엌을 흥미롭게 살폈다. 이렇게 구경할 기회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하양이와 함께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탑은 조용하지만 아늑한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가방을 챙겨오길 잘했네.”
알버트의 선물을 담아가기 위한 가방이었는데 유용하게 쓰이겠다. 나는 주변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알버트가 자던 침대. 하양이까지 셋이서 같이 밥을 먹던 테이블. 지금도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기분 좋은 채로 다락으로 향했다. 로제의 옷은 모두 다락으로 옮겨두었으니까.
다락에는 그새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밑에 내려가 있던 시간이 늘어 제대로 치운 적이 없었기 때문일 테다. 나는 콜록거리면서 옷을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그때, 낯익은 두통이 찾아왔다.
“으….”
나는 머리를 감쌌다.
“로제?”
하양이가 옆에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통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흑마법에 걸렸을 때와 똑같은 증상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은 알버트가 치료했다. 게다가 이 탑에 더 이상 걸린 마법은 없다. 알버트가 모두 제거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러지? 탑에 문제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 ‘로제 아티어스’의 얼굴이 보였다.
…로제 아티어스의 얼굴이 보인다고?
그제야 나는 내가 ‘로제’의 몸에서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유령처럼 투명해진 채 허공에 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난 지금 살아 있는 건가? 아니, 죽은 건가?
혼란에 빠져 있는데 로제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양이에게 고개를 돌린 채 후후 웃는 모습에 닭살이 돋았다.
내가 그녀의 몸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제야 찾았네.”
…그 말은 자신의 몸을 칭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눈앞의 로제가 책 속에서 알버트를 사랑해 모든 것을 가지려 들었던 진짜 ‘로제 아티어스’임을 직감했다.
책 속에서 처단되었던 알버트의 복수 대상이자, 흑마법사.
그녀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로제?”
하양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의 ‘로제’는 방긋 웃었다.
“왜, 하양아?”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입꼬리를 늘이는 모습이 내가 웃는 모습과 너무 비슷했다.
마치 오랜 시간 나를 관찰하고 그대로 흉내 내는 것처럼.
물론 로제가 원래 나처럼 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도 있었다. 하지만 난 방금 그녀의 진짜 모습을 봤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모습. 그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처럼 웃는 얼굴은 나를 따라 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양이는 불안하게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눈치챈 듯했다.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양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슬슬 나가자. 다 챙겼어.”
로제는 나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를 내며 가방을 손에 쥐었다. 나는 그녀가 그간 있었던 일들을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안해졌다.
…그녀에 대해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
내가 빙의한 후 로제 아티어스의 행방이 궁금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 살기에 바빠 깊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빙의하면서 사라졌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게 큰 실수였던 거다.
로제 아티어스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태 내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를 따라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되찾기 위해서.
알버트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저주를 걸기 위해서는 흑마법사의 영혼과 마법사의 도구, 그리고 저주를 걸 대상이 한 곳에 있어야 하니 말이다.”
저주를 위한 세 가지.
흑마법사인 로제의 영혼.
마법사의 도구 지팡이.
그리고 그녀가 저주를 걸 대상이었던 나, ‘유정인’.
방금 전의 두통은 그녀가 내게 건 저주 때문인 게 분명했다.
나는 로제가 썼던 흑마법의 부작용으로 아팠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저주했던 것이다.
그녀의 영혼이 탑 안에 있을 줄 상상도 못 했기에 몰랐던 것일 뿐.
…이를 어찌해야 하지? 지금의 로제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책 속에서 알버트를 원해 모든 것이든 저지르려 하던 흑마법사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처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흑마법사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알버트는 로제의 과거가 지금의 내게 흠이 될까 우려해 있던 증거들도 감추던 중이었다.
“하양아, 우리 돌아가면 맛있는 거 먹을까? 배고프다.”
속에서 울분이 끓어올랐다. 태연히 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니 없던 화병도 생길 지경이다.
오늘 알버트와 진솔한 이야기를 했던 걸 생각하니 더더욱 열이 받았다.
…하양이 이름 부르지 마! 내가 지어준 거라고. 네가 부를 만한 이름이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으응.”
다행인 건 하양이가 로제를 경계하듯 뒤로 물러섰다는 거였다. 나를 대할 때와 다른 태도였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로제가 하는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하양이는 설마 내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로제가 흑마법을 써서 자신의 몸을 되찾은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는 꽤 한정적인 듯했다.
만약 자유롭게 흑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그동안 알버트와 계속 스킨십을 했던 나를 질투해 죽이고도 남았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마법이 뭐가 있을까.
마법사로서 마법은 몇 가지 쓸 줄 알지만, 내 존재를 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오늘 외출하며 지팡이도 두고 나왔다.
무엇보다 알버트에게 나와 로제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데. 과연 방법이 있을까?
그를 생각하고 있는데, 눈앞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래 걸리는구나.”
하지만 역시나. 알버트도 내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뭐 그리 챙길 것이 있다고.”
나는 다급하게 로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제의 눈이 곱게 휘었다. 알버트를 보는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왕자님. 금방 해서 나갈게요.”
“…그래.”
알버트가 로제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알버트! 알버트!”
나는 그 앞에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초점은 내게서 벗어났다. 그는 로제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아닌, 하녀 로제를.
“왕자님.”
로제가 짐을 챙긴 후 알버트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헤벌쭉 웃었다.
계속 내가 웃을 때를 따라 하고 있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를 위하는 하녀 ‘로제’를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
“왕자님.”
나는 알버트가 이상한 점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도.
“알버트, 지금 로제는 내가 아니에요.”
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알버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로제는 알버트의 품에 폭 안겼다. 알버트는 로제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로제는 알버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로제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로제를 보며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알버트는 품 안에 안긴 로제와 눈을 맞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버트는 로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로제의 턱을 잡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하지만 알버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
그의 눈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이상했지…. 몇 번이나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내 짐작일 뿐이 아닐까 생각했다.”
로제의 턱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 전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 지었던 얼굴이라고 믿기 힘든 냉기만 남아 있었다.
“…사실이었구나.”
알버트는 로제를 보며 얼굴을 서서히 굳혔다.
“그래, 그 눈빛을 보고 복수를 다짐했어. 모든 일이 끝나면 네 목을 순식간에 베고 말겠다 생각했었단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로제의 턱을 잡은 손을 떨쳐냈다. 그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진 로제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손으로 뒤를 짚어 겨우 중심을 잡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알버트는 로제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였다.
“넌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었어.”
로제가 흠칫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듣는 나도 얼떨떨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대가 알버트였기에, 나는 믿을 수 있었다.
알버트는 이런 말을 그냥 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눈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네 입으로 말해주길 바랐는데… 이렇게 다시 바뀔 줄은 몰랐구나.”
“왕자님,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왕자님 곁을 지켰잖아요. 왕자님께 음식도 해드리고, 같이-”
로제는 불안한 듯 말을 이었다.
내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알아주길 바랐지만, 정말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누가, 사람이 몸에 빙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어.
그것도 이렇게 바로.
“진짜 로제… 아니,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왕자라 부르지 않는단다, 아티어스.”
나는 그제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를 부르는 로제의 호칭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쉬운 일이 아닐진대.
“흑마법사였던 건 맞겠군. 쓸수록 몸과 정신이 무너지면서 영혼이 튕겨 나갔었고, 그때, ‘그녀’의 영혼이 들어온 거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알버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명료했다.
“그녀는 어디 있느냐.”
알버트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