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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84화 (84/156)

84화.

“내가 살아난 건 그저 우연이었단다.”

아직 어렸던 알버트와 다르게 그의 형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다.

그들의 눈에 알버트는 당장 견제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고,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대였다.

그의 형제들은 알버트에게도 암살자를 보내고 독살을 시도했지만, 빈도수는 많지 않았다.

당장 위협이 되는 서로를 죽이는 게 먼저라 생각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 가문은 광산에서 나온 금맥 덕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백작가는 평생 누려본 적 없는 부를 누리며 신세계를 경험했다.

알버트는 이때 태어났다.

“나는 아주 어릴 적의 기억부터 가지고 있단다.”

아버지,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 그가 읽은 동화책처럼 아름다운 저택. 그를 챙겨주는 두 형.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광산의 금맥이 끊겼다.

대책 없이 돈을 펑펑 쓰며 사치를 부리던 사람들은 갑자기 달라진 가문의 지갑 사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남은 돈을 이용하기는커녕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이는 알버트의 부모가 도박에 손을 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돈을 향한 그들의 집착은 심해졌고, 이는 가족이 서로를 물어뜯는 계기가 되었다.

돈과 권력 앞에 혈육은 없었다.

어머니는 방에 틀어박혀 알버트가 태어난 후 모든 것이 틀어졌다며 그를 원망했다. 이후에는 암시장에 들락날락하다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그의 검술을 봐주며 웃던 형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바빴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알버트에게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 이야기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파국에 이르렀고, 알버트는 혼자 남았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 행복을 기억하기에 그는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단다.”

견딜 수 없는 일 앞에, 도망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도망도 우리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

“이대로 사는 의미가 있을까 해서, 호수에 몸을 던졌지.”

자신의 치부를 이야기하는 얼굴은 퍽 덤덤했다.

정신을 흐트릴 무언가 필요했던 걸까.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수저를 들었다. 수프를 휘젓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항상 겨울이 계속되는 마을이 있거든.”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알버트가 말하는 호수는 내가 그를 떠나 한 달 동안 머무를 곳이었다.

겨울이 계속된다는 설명은 리암이 말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라 알 수 있었다.

“죽기에 딱 좋은 날이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었어.”

사색에 잠긴 눈동자는 짙게 내려앉았다. 어두운 그림자는 그가 한때 삶을 포기했던 사람이 분명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절망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그 시간을 겪어봤기에 그의 감정을 모를 수 없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든 법이다. 비록 그처럼 행동에 옮긴 적은 없었지만.

“…그 여자가 나를 구하기 전까지는.”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평소처럼 연기하는 얼굴도 아니었고 행복할 때 짓는 미소도 아니었다.

같은 미소인데도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느껴지는 건, 내가 그에게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게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씁쓸한 얼굴은 내 생각보다 그가 훨씬 상처를 많이 받고 힘들었다는 걸 보여줬으니까.

“웃기지 않으냐.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사람들은 날 시기하고 죽이려 들었는데, 그날 처음 본 여자는 나를 구했다.”

단조롭던 목소리에 높낮이가 생기고, 물기가 들어찼다. 이는 그가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다.

그가 다른 이에게 보일 수 없는 어린 시절. 왕자가 아닌, 왕도 아닌, 평범한 알버트 그레이가 눈앞에 있었다.

숨을 느리게 내뱉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를 잠시나마 가늠했다.

“원망했단다. 나를 왜 살렸냐며 울부짖었어.”

“…….”

“그녀는 내 원망을 묵묵히 받아주며 내 이름을 불러줬단다.”

알버트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면, 그를 꽤 깊게 주시하던 인물임이 분명했다.

알버트를 향한 애정이 대단한 사람인 듯했다.

“내가 다시 목숨을 끊을까 두려웠던지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겠답시고 하루에 하나씩 선물을 들고 왔지.”

직접 만나 겪은 알버트가 책 속의 알버트보다 상냥하고 아름다웠던 건, 어쩌면 그녀 덕일지도 모른다.

“살고 있으면 언젠가 행복한 순간이 올 거라고. 살길 잘했다 여기는 순간이 올 테니, 살아가라고 했어.”

그가 이 말을 기억하는 건, 그만큼 그의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알버트를 구하고, 그에게 삶의 의미를 새로 부여해 준 은인.

“지금 이 고통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순간이 꼭 올 거라고 했다.”

이는 알버트가 절대 놓을 수 없는 애정이었을 테다.

“내게 그 말은 붙잡을 수밖에 없던 희망이었고.”

모든 희망이 없어졌다 생각했을 때 나타난 빛.

“나는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는 것처럼.

감히 질투할 수 없는 고마운 은인이었지만,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만일 그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내가 어린 시절 알버트를 만나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알려줄 수 있었다면, 그가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와 별개로 그의 이야기 속에서, 여태 설명한 여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탑에서 이야기했던 사람.

선한 눈매를 가진 여인.

알버트가 넌지시 지나가면 이야기했던 첫사랑.

“구해준 그분이 탑에서 말씀하셨던 분인가요?”

알버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물론 로스투라투를 만나고 나서 그 희망은 복수로 바뀌었지만….”

그래, 그녀는 계속 알버트와 있지 않았다.

알버트의 기억을 지우고 떠났다.

“어째서 나를 살렸는지. 희망을 놓을 수 없게 했는지. 왜 살라고 약속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물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버트를 챙겼는데 어째서 갑작스레 알버트를 떠난 걸까? 그게 제일 이해 가지 않았다.

알버트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얼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알버트, 제가 그분을 찾아볼게요.”

“…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문에 좀 섭섭하긴 했지만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양이가 제대로 성체 드래곤이 된다면,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이목구비라도 한번 그려주세요. 계약자가 되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일 텐데.”

“…예?”

“자신이 원할 때 오고 아무도 모르게 떠날 수 있었던 방법. 어렸지만 마법의 재능이 있던 내게 완벽한 마법을 걸 수 있던 이유 모두 그녀가 드래곤의 계약자였기 때문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탑에서 알버트가 어릴 적 드래곤을 만났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양이와 같은 새하얀 드래곤이라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어릴 때 드래곤을 봤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하긴,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단번에 사라질 수는 없었겠지.

그가 왜 하양이 같은 드래곤을 좋아하지 않는지 살짝 이해가 갔다.

더군다나 알버트는 자신의 스승이 계약한 드래곤의 ‘성장’에 실패하는 것을 보지 않았나.

나는 흘끔 눈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하양이를 응시했다.

하양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다며 다독이려던 순간, 하양이가 고개를 들고 용감히 외쳤다.

“내, 내가 성체가 되어 그 사람을 찾는 걸 도울게에!”

알버트가 감흥 없는 얼굴로 팔짱을 꼈다.

“드래곤 새끼의 도움이 필요 없다만.”

“드래곤의 도움은 필요 있잖아.”

오, 이제 하양이도 제법 말싸움을 할 줄 알았다.

알버트가 몸을 뒤로 기대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하양이의 말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분위기 괜찮았는데! 나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진짜 그분 만나서 왜 떠나야 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저와 하양이가 있다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죠!”

내 말에 알버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을 농담만으로 받아들이는 건 싫었기에 난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진심이에요. 꼭 그분을 만나게 해드릴게요.”

알버트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난제는 흔치 않다. 그것도 내가 도울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알버트를 위해서, 꼭 찾을 거예요.”

그렇다면 꼭 돕고 싶다. 알버트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무언지, 그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알버트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 준 사람아니까. 그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 미련이 남아 있을 테니까.

내가 하양이와 완벽한 계약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알버트를 위해서.

날 바라보는 알버트의 눈이 반짝였다. 부드럽게 풀어지는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말만으로도 행복하구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소를 짓고서,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길었다. 우선 먹자.”

알버트의 말에 나는 우리가 아직 레스토랑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알버트에게 집중하다 보니 장소도 까먹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인가요?”

“내 이야기는 네게만 들릴 수 있도록 우리 둘 주위에 막을 만들어두었단다.”

바로 옆에 앉았던 것에도 이유가 있었구나. 그저 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라 생각했던 게 좀 부끄러웠다.

나, 좀 자의식 과잉인가.

하지만 매일 달콤한 말을 속삭여 주는 알버트와 함께 있다면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알버트가 자리를 옮겨 앞에 앉았다. 정작 그가 멀어지니 살짝 아쉬웠다.

그의 손짓에 수프가 치워지고 음식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방어막을 만들어둬도 이야기하는 데 방해는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물려뒀던 듯했다.

“네 음식보다는 덜 맵겠지만… 맛있게 들거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한번 거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 기대하세요.”

포크를 손에 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얼마든지. 너 때문에 입맛도 바뀌어가던 참이란다.”

알버트는 능청스레 말을 받았다. 내 앞에 새우를 구워 양념한 요리 그릇을 놓아주던 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한 달 후에 너와 비슷한 요리를 했다던 여자를 궁으로 초대할 거란다. 만나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그의 말에 잊고 있던 서이나의 존재가 생각났다. 그래도 원작 여주였는데 나 살기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알버트의 배려였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그녀를 잊고 있던 게 좀 미안했지만 책 속에서 묘사된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잘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서이나를 만나면 요리 좀 배워볼까.

알버트에게 맵지 않은 요리도 해주고 싶은데. 내 입맛에 맞춰주는 것도 좋지만 때로 그의 입맛에 맞는 요리도 하고 싶었다.

행복한 고민 속에 빠진 나는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나온 김에 우리는 탑에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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