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생각해 보면 알버트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매일 나를 찾았으니까.
다만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보고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메르시에게 알버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으니까.
그를 보자마자 ‘내 흑마법을 치료해 줄 때 당신이 목숨을 건다는 이야긴 없지 않았느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내가 따질 위치는 아니긴 하지만.
아이고, 두통이야.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나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런 소문도 듣지 않은 거예요.”
알버트가 모르길 바란다면 평생 모른 척할 것이다.
메르시가 날 보며 씩 웃었다.
“당연하죠.”
***
알버트는 2층 규모의 커다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렸다.
하긴, 비밀리에 움직이는 거라 해도 국왕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할 요리사는 없으니 손쉬운 일이었을 터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운데 화려하게 장식된 테이블이 보였다. 위에는 고급스러운 식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배고프겠구나. 드레스는 원하는 것으로 골랐니?”
“너무 많이 고른 것 같아서 문제였어요.”
“왕을 구한 이에게 뭔들 못 해주겠느냐. 앉거라.”
우리는 어깨를 맞댄 채 앉았다. 알버트와 밥을 먹을 때도 항상 앞에 앉아 있었어서 그런지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가 어색했다.
“…서로 얼굴을 보고 앉는 게 낫지 않을까요?”
“글쎄다. 나는 이쪽이 더 좋아서. 네가 좋아하는 드래곤 새끼를 앞에 앉히거라.”
알버트가 뻔뻔히 대꾸했다. 하양이가 내 곁에 붙으려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하양이가 알버트를 한껏 쏘아보았다. 물론 알버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몸의 긴장이 풀렸다.
나는 소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 했다. 그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와 이름을 부르기로 했지만 아직까지 내가 그의 이름은 부른 적은 많지 않았다.
입에 익지 않았고, 아무래도 이곳은 현대가 아니다 보니 남들 눈과 귀를 의식해야 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알버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알버트.”
나는 그의 손을 살짝 누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손이 움찔했다. 슬그머니 올린 시선에 낮게 수그러든 턱이 보였다.
여유로운 얼굴에 살짝 조급함이 엿보였다.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가 여유를 찾는 건 금방이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알버트가 속삭였다.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날 제법 파악했구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누구 밑에 있었는데요.”
알버트가 턱을 괴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나른히 눈을 치켜뜬 그가 중얼거렸다.
“이때 즈음이면, 소문을 들을 거라 생각했단다.”
알버트의 눈치는 아직도 기가 막히게 빨랐다. 정말 독심술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빨리 들킬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나는 뻔뻔함을 유지하기로 했다.
“정말 그냥 부르고 싶어서 부른 건데요.”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생각보다 복잡하단다, 로제. 숨길 필요 없다. 오늘 나가는 걸 허락하며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알면서도 보내주신 거예요?”
“전 국민의 입과 귀를 막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만들어낸 미소가 금방 허물어졌다.
아까 전 메르시와 한 말이 무색해졌다. 그는 내 생각을 항상 뛰어넘는다.
나는 알버트의 표정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그의 감정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읽기 어렵다면, 물으면 된다. 묻는 것이 가장 직관적이고 솔직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으니 더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혹시 실망하셨나요?”
“아니, 그럴 거라 생각했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말 괜찮으냐고 묻고 싶겠지, 너라면.”
“원하시면 계속 모른 척할 수 있어요. 상처를 헤집는 질문은 드리고 싶지 않아요.”
“…….”
“원하실 때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사람들의 소문과 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알버트의 유년 시절이 어땠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의 감정은 그가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겠지.
듣고 싶지만 기다릴 수 있었다.
알버트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창문 가까이 지고 있는 노을과 비슷한 색으로 반짝였다.
“그럴 필요 없다.”
“…….”
“묻고 싶은 게 있다면 묻거라. 아는 게 있다면 아는 척해도 좋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알버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하나 한 치의 그늘도 없는 얼굴은 오히려 나를 긴장시켰다.
나를 위로하기 위한 미소 같아서.
무엇이 진짜 알버트의 감정일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로제, 난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 생각한단다.”
그가 내게 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러이 만졌다. 굳은살이 박인 손은 아름다운 얼굴과 대비되었지만, 그게 알버트와 잘 어울렸다.
“그러니 울 것 같은 표정은 하지 말아.”
“눈물이 동정의 의미는 아니에요.”
혹 내게 말하기 싫었던 이유가, 내가 그를 동정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알버트가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내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안다.”
그의 손이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그저 네가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
“나는 네 웃는 얼굴이 좋으니까.”
그 따스한 손길이 오히려 눈물샘을 더 자극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알버트는 알고 있을까?
그의 말이 가슴을 떨리게 했다.
나는 내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등 위에 내 손을 얹고 작게 웃었다. 그가 웃는 얼굴이 좋다 했으니 웃는 얼굴로 반겨주고 싶었다.
“위로하고 싶었는데… 결국 위로받게 되는 건 저네요.”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괜찮다며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정작 알버트 앞에서 내 숱한 고민은 모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데.”
낮게 웃은 알버트는 날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품에서는 날 안정시키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나를 안정시켜 주는 그의 향기처럼, 날 안으며 알버트도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등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알버트의 웃음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난 괜찮아.”
나는 등에서 손을 내린 후 알버트를 슬슬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괜찮다고만 말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호숫가에 몸을 던지기까지 하셨다면서.”
눈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말해도 된다고 했다면,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지금이 가장 적합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꺼내기에는 너무 큰 이야기였다.
어릴 적 겪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스투라투에게 가기 전까지 그의 생활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뾰족하게 나올 줄 몰랐는지 휘둥그레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인 알버트가 픽 웃었다.
“호숫가에 몸을 던지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곳에서 죽을 뻔한 적은 없단다.”
모순적인 말이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호흡을 한 나는 알버트와 시선을 맞대며 단호히 말했다.
“알버트가 그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알고 싶어요.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죽을 뻔한 적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다. 누군가에게 구조당했거든.”
리암인가? 아니면 메르시? 혹은 슈버트일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요?”
알버트가 과거를 떠올리는 듯했다. 흐릿해진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가 점차 초점을 찾았다. 그가 내뱉듯 말했다.
“모른다.”
알버트가 한 말은 뜻밖이었다. 내게 말하기 싫은 것은 아닐 테고, 아예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걸까?
“말을 했는데 잊은 건지, 애초에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어쩌면 나중에 기억날지도 모르지.”
“…무슨 말씀인가요?”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턱밑을 매만졌다.
“그녀는 사라지기 전 내 기억을 지웠거든.”
“마법인가요?”
“그렇지.”
상대의 기억을 잊게 만드는 포겟(Forget). 이는 내가 처음 배운 마법이기도 해서 친숙했다.
포겟은 강력한 마법이지만 그 사람의 마력에 따라 미치는 영향과 위력이 달라진다.
알버트가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첫째. 그에게 마법을 걸었던 사람이 약했거나.
두 번째. 알버트가 마법을 건 사람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거나.
두 번째 가설이 더 지금 상황에 맞게 느껴졌다.
알버트는 분명 ‘그녀’라고 칭했다. 그를 호수에서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그녀’는 누군가요?”
“…나도 모른단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만나보셨잖아요. 그분은 어떻게 된 건지,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내 물음에 알버트가 잠시 침묵했다. 대답을 주저하는 듯 보였다.
의외였다. 바로 대답해 줄 것 같았는데.
“…너와 비슷한 사람이었어.”
“저와요?”
“네게서 그녀를 투영해 보지는 않아. 하지만 지금 와서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를 떠올리면 너를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구나.”
그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내가 그녀를 신경 쓸까 우려하는 듯 보였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 이야기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내가 감히 어떻게?
그때 알버트에게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알버트가 나를 향한 경계심을 푸는 데 도움을 준 셈인지도 모른다.
“걱정 마세요. 질투하지 않아요. 시기하지도 않고. 그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요.”
그는 내게 질문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알고 싶다.
알버트를 살려준 사람이나 살게 된 경위 같은 것은 전부.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는 게 아니라 그의 입으로 듣고 싶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