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까 전 크로엘에게 물어본 것은, 그녀가 쓰고 있는 만년필을 파는 가게의 위치였다.
크로엘은 계속 스케치를 하기 바빴다. 하루 이틀 한 솜씨가 아니었다.
그런 크로엘이 쓰는 만년필이라면 분명 좋은 물건일 터였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만년필이기도 했고.
알버트가 자주 사용할 만한 것. 유용하게 쓸 수 있으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선물을 찾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만년필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만년필 가게에 들어간 나와 메르시는 알버트를 위한 수제 맞춤 만년필을 주문하고 나왔다. 제작에는 이틀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간단한 선물을 주고 싶어, 만년필 가게 옆에 붙어 있던 보석 가게에서 백금 팔찌를 샀다.
빙의하기 전의 나였다면 쓸 수 없을 금액이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돈 쓰는 건 역시 짜릿해.
매번 이런 금액을 척척 쓸 수 있다니, 지금까지 그 고생을 겪은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가격표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걸 고르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만족스러운 쇼핑 이후에는 산책이 이어졌다.
길거리에는 알버트의 얼굴을 그려 붙인 상점이 수두룩했다. 사람들은 알버트의 능력을 칭송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시장터의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했다. 탑이 그리운 것과 별개로 역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만나며 소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실감 났다.
역시 사람은 사람을 보고 살아야 해.
길을 걷고 있으니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알버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로스투라투를 지지하던 귀족들을 숙청하는 일도 순조롭게 끝났고, 사람들은 알버트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마탑주와 귀족들 모두를 휘어잡았다는 사실도 모조리 퍼져 있었다.
메르시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들으며 피식 웃었다. 물론 그들은 메르시가 마탑주라는 건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알버트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있자니 나까지 괜히 흐뭇해졌다. 나는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말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암, 대단하신 분이지. 그런 시간을 딛고….”
그런 시간을 딛고라. 하긴, 알버트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법한 말이었다.
“이번에 자원해서 나갔다 온 내 아들도 말하더군. 대단하신 분이라고.”
처음 로스투라투가 퍼뜨렸던 소문을 반전시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 알버트는 왕이 될 상이다.
내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흐뭇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중이었다.
“가엾으신 분. 드디어 자리를 찾으신 거지. 옛날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셨을 줄 누가 알았겠나.”
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마지막 말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이대로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시절이 지금의 전하를 만든 것 아니겠나. 평생 충성해야겠어.”
“그렇게 완벽한 분께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니, 감히 동질감이 드는 것 같기도 혀.”
“한 번도 아니라면서.”
…이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 메르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알버트의 과거가 불행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가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은 들은 적 없다. 읽은 적도 없다. 상상한 적도 없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메르시는 오히려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
메르시는 내 열렬한 눈빛에 턱을 긁적이다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직접 퍼뜨리신 소문이에요. 로스투라투의 헛소문을 잠잠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죠.”
알버트가 직접 퍼뜨린 소문이라 말하니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나는 리암의 성에서 알버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저들의 동정심을 살 거란다.”
자신 있게 말하던 그의 눈빛은 올곧게 빛났고, 목소리는 분명했다. 남자주인공의 덕목이었다.
나는 알버트가 자신의 불행한 가정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은 알고 있었다.
서로를 죽고 죽이던 가족들 사이에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동정과 호의를 얻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알버트는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잘 이용할 줄 아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전부일 줄 알았다.
나는 그라면 당연히 금방 이겨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의 알버트를 보면 그가 과거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주인공이다. 그런 서사는 주인공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과거의 상처. 이는 책 속에서 자주 표현되는 것이었다.
나는 알버트를 가까이서 보고 느꼈으면서, 그의 과거는 저 뒤로 밀어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 높이 있던 사람이, 사실은 저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깨달을 때 꽤 너그러워지거든”
나는 잔혹한 가정사를 겪은 알버트가 당시에 어떤 마음으로 그 사건들을 이겨냈을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로스투라투에게 갔을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현재의 알버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은 지나간 이야기였고, 그를 만드는 초석에 불과했다.
물론 이조차도 알버트의 여론몰이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동정을 사겠다는 계획에 따라 철저히 조작한 거짓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듯 소문을 조작하는 건 알버트의 성정에 맞지 않았지만, 난 차라리 이게 거짓이길 바랐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잔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네게 더 오래 완벽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다.”
…그의 말소리가 울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알버트를 좋아하면서, 그를 틀에 맞춰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완벽한 그의 모습에 사로잡혀 그를 더 알아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더 알아가는 시간이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더 익숙한 알버트에게도.
속내를 털어놓는 것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익숙한 그에게도.
모든 것을 놓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모든 가족을 잃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목숨을 끊을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죽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상의 우울과 슬픔을 모두 끌어안은 것 같은 감정의 늪에서 발버둥 치면서도 나는 차마 목숨은 끊지 못했다.
그만큼 죽음은 큰 공포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때의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생을 끊어내려 한 것이다.
나 자신이 큰 죄인이 된 기분이다.
그를 좋아한다며, 사랑한다며.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고 있었다. 그를 이해하고 알아갈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에 대해 물어도 되는 걸까.
내게 털어놓고 싶지 않다면, 굳이 강제로 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버트는 그때 내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했다. 내게 더 완벽한 사람이고 싶다고.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옳은가? 하지만 이 이야기를 언제까지 덮어놓을 수 있을까.
“로제, 전하께서 왜 그리도 강한 마법사가 되셨는지 알아요?”
내 표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메르시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너무 써서 단시간에 마력이 고갈되면 죽을 위기를 넘겨요. 그건 더 대단한 마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수두룩해요. 어리면 어릴수록, 그 빈도수가 늘어나고요.”
메르시는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말 속에서 어렴풋이 알버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상당한 마력을 써서 탑에서 탈출한 데다, 내게 걸린 흑마법을 치료하던 모습까지.
알버트는 아플 것이라 이야기했지,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고는 이야기한 적 없다.
알버트를 향한 원망이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죄책감을 가질 것을 알기에 알려주지 않은 것일 테다.
메르시도 자신이 지금 한 이야기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을 것이다.
진작 알았다면 어떤 고통이든 참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그가 목숨을 걸길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마법사는 많지 않죠. 보통 자신의 마력이 고갈될 때까지 쓰는 건 자살행위로 여겨지거든요.”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맞아요. 전하는 어릴 적부터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살아남으셨기 때문에 알고 계신 거죠. 노력 없이 일궈내신 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가 진정으로 강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것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책 속에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남주인공의 사연 같은 게, 그에게도 있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알버트의 모든 것이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더라도 다 괜찮았을 텐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메르시의 이야기는 더 듣고 싶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
“이건 같은 마법사기에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에요. 더 얘기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메르시, 우리 좀 걸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알버트가 내가 알길 원하지 않는다면, 대놓고 묻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 해서 그의 완벽함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켜주고 싶었다.
“네, 그러죠.”
메르시는 내 의중을 파악하고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선물이 담긴 가방을 걸친 채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호숫가에 몸을 던지신 적도 있다며. 죽다 살아나셨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대 왕을 따라가신 거고.”
“그리고 이용당하신 거지. 썩을 놈의 새x군.”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알버트의 얼굴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로스투라투의 행태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알버트가 퍼뜨린 소문이 힘을 가졌다.
알버트의 이야기가 그저 소문에 그쳤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상세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증인이 있었고, 그 사실은 소문에 신빙성을 더했다.
책의 내용으로 읽어 알고 있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듣는 건 괴로웠다.
내가 이런데 사람들이 오죽할까. 그들이 알버트를 따르고 존경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나만은 몰랐으면 좋겠다던 얼굴이 자꾸 기억에 남았다.
오래된 상처에는 흉터가 남는다.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해 주지만, 흉터를 없던 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가 정말 괜찮았다면 내가 알지 않길 바랐을 리 없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을 리 없다.
알버트는 그저 자신의 상처를 헤집으면서, 로스투라투의 악의적인 소문을 뚫을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런 시절을 딛고서 계속 살기로 마음먹은 알버트가 대단했다.
“이 길 끝에 레스토랑이 보일 거예요.”
메르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앞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었다.
맛있는 걸 먹으면서 잠시라도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야겠어.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전하께서 로제를 기다리고 있으셔요.”
메르시에게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