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특별히 오늘은 로제 님을 위해 숍을 비워두었답니다!”
크로엘은 안으로 들어서며 호호 웃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높이 올린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17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키에 높게 올린 머리카락, 모델에 가까운 체형에 이 세계의 색조 화장법과는 전혀 다른 누드톤 립스틱이 잘 어울렸다.
“자….”
그녀는 서랍장 위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노트를 손에 쥔 크로엘이 나를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웃을 때는 몰랐는데, 무표정하게 있으니 인상이 꽤 차가웠다. 일부러 미소를 띠고 있는 이유가 보이는 듯했다.
어째 인상이 묘하게 레오나를 닮았는걸.
“우선 치수부터 다시 재겠습니다.”
엉뚱한 생각에 빠졌던 나는 크로엘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다. 메르시와 그녀의 품에 안긴 하양이가 손을 흔들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해요, 언니!”
메르시의 격려와 함께 나는 크로엘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거울이 놓인 방은 깔끔했다.
“시작해도 될까요?”
“네.”
줄자 비슷한 것을 가져온 크로엘은 내 몸의 치수를 쟀다. 기성품을 사서 입고 다니던 내겐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혹 원하는 드레스가 있으신가요? 디자인이라든가, 원하는 보석이나 레이스도 좋답니다.”
백화점 VIP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크로엘은 세심히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아직 딱 생각해 놓은 건 없어요.”
“그럼 책자를 금방 가져올 테니 기다려 주시겠어요?”
크로엘은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그녀는 여유로우면서도 깍듯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그 모습이 꼭 내가 알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상사 대하듯 했던 것을 떠올리게 했다.
“안에 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빙그레 웃은 그녀는 나를 방과 연결된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 벽의 색채는 깔끔하면서도 다채로웠다.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닌 게, 꽤 신경 쓴 것이 보였다.
역시 어느 분야든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르다니까. 이렇게 방을 연결해 둔 것도 그렇고, 센스가 대단했다.
“언니, 어서 봐요.”
메르시는 책을 펼쳐 이미 천의 종류와 레이스를 살피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스케치되어 있는 레이스의 디자인과, 실제로 제작해 둔 레이스와 프릴이 보였다.
원하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샘플 북을 제작해 둔 것이다.
하양이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찻잔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호로록 마셨다.
“퉤에에….”
하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썼는지 혓바닥을 내밀고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귀여워라. 나는 차와 함께 나온 설탕 조각을 하양이의 찻잔 안에 퐁당 넣어주었다.
티스푼으로 찻잔을 저어준 나는 하양이에게 다시 차를 권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차를 마신 하양이의 눈이 금방 동그래졌다. 하양이가 헤벌쭉 웃었다.
“맛있어.”
해맑은 미소에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하양이는 정말 존재 자체로도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공부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말투와 목소리, 표정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하양이는 하양이였다.
“여기 있습니다.”
곧바로 돌아온 크로엘은 내게 두꺼운 책 세 권을 건넸다.
첫 권은 천의 종류가 적혀 있었고 두 번째는 메르시가 보던 것과 같이 레이스와 프릴, 마지막 권은 본격적인 드레스 디자인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아티어스 님이 방문하신다는 말을 듣고 분위기와 모습을 상상해 스케치해 본 것들이니 편히 말해주세요.”
디자인이 담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던 중 크로엘이 차를 따라주며 이야기했다.
“…이 두꺼운 책 전부요?”
“전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걸요. 그리고 제가 워낙 이 일을 좋아해서. 하하, 즐거웠습니다.”
“크로엘, 나는 저번에 만든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데.”
“안 그래도 메르시 님께서 좋아하셨던 디자인에 맞춘 스케치도 준비해 뒀답니다.”
메르시의 말에 크로엘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종이 더미를 내밀었다.
수북한 종이들은 모두 그녀의 스케치들이었다. 메르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디자인을 받아 들었다.
“어서 살펴보세요, 아티어스 님. 마음에 드는 게 없으시면 말씀 주시고요.”
싱글싱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크로엘이 진심으로 대단해 보였다. 나는 알버트가 그녀를 너무 혹사시킨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혹시 원작에 알버트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밖에 보지 않아 폭군이 된다는 설정 같은 게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를 항상 우선으로 하지 않는 그에게 섭섭할 때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왕이 되길 바랐다.
메르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디자인을 살피던 그녀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전하의 명이라도 그렇지, 너무 무리한 거 아니에요?”
크로엘이 메르시의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단호했다.
“아뇨,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아티어스 님께 감사한 일도 있고요.”
“…제게요?”
크로엘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녀와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아니면 로제 아티어스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 걸까? 로제 아티어스로 살면서 그녀와 관련된 사람은 본 적 없었다.
“네.”
크로엘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에게 과연 물어도 될지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크로엘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제 동생을 도와주셨다고 들었거든요.”
“…동생이요?”
자신의 보조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린 크로엘은 다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동생이….”
나는 크로엘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이를 떠올렸다.
“맞아요, 레오나.”
“동생이 있었어?”
메르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크로엘은 선선히 인정했다.
“딱히 숨긴 건 아니지만, 얼굴이 그리 닮지 않은 탓에 저희 둘을 연결시키는 사람은 드물죠. 서로 가문을 거의 버리다시피 하며 살았기도 하고. 아무튼 동생이 아티어스 님께 신세를 졌다고 들었어요.”
“신세는 제가 졌는데요. 감옥에서 올라오는 길에 사람도 같이 옮겨주시고.”
“아티어스 님이 부탁해서 한 거였지, 아니었으면 지금 다른 기사들과 같이 감옥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크로엘과 레오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확실히 분위기가 닮았다. 강인하면서 여유로운 모습이.
레오나와 이야기를 나눈 건 지하 감옥에서 했던 대화가 마지막이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뜻밖의 장소에서 들으니 반가웠다.
“레오나 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서….”
“아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이번에….”
크로엘이 자신의 품 안에서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더니 하늘 높이 쳐들며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임시 기사단장을 맡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이건 아티어스 님께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임시 기사단장이요?”
“기사단 대부분이 세습에 찌든 놈들뿐이라 청소하고 나니 남은 인물들이 얼마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요.”
크로엘이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는 종이 뭉치와 펜을 꺼냈다.
“천천히 보시고 말씀 주세요. 저는 그동안 디자인 스케치를 하고 있겠습니다. 미리 입어보실 수 있게 삼십 벌 정도 가봉해 보았는데, 다과를 드시는 동안 준비해 두겠습니다.”
“…삼십 벌이요?”
“역시 크로엘이네.”
“호호,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아뇨, 이 정도 하는 건 절대 보통 일이 아닌데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디자인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스케치는 내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다양한 형태의 드레스를 담고 있었다.
“사교계에 데뷔하시는 거나 다름없으실 테니 연회용 드레스는 화려한 것이 좋을 것 같았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을 자잘하게 박아 넣은 드레스도 있었는데, 스케치만으로도 화려함의 극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티어스 님이라면 데뷔와 동시에 사교계를 휘어잡으실 거라 믿어요. 제가 함께한다면 무서울 것이 없으실 테지만요!”
크로엘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말에 아까 사람들의 경계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긴장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크로엘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있었다. 동생을 도와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호의적일 수 있다니.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으나, 그 여파는 컸다.
내 작은 행동 하나가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녀가 열심히 준비한 만큼, 나도 열심히 검토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디자인 스케치를 살피며 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기 시작했다.
내 상태를 살피며 스케치를 열정적으로 이어나가는 크로엘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자신의 일에 몰두한 사람은 역시 아름답다.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버트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도 생각났다.
나중에 크로엘에게 물어봐야지.
그녀의 조수들이 모자를 들고 방에 들어왔다. 크로엘은 쓰던 펜과 종이를 내려놓고 손을 닦은 후 내 옆에 앉은 하양이를 보며 웃었다.
“고양이에게 어울릴 만한 모자도 여러 종류로 준비해 봤어요.”
크로엘이 내게 모자를 내밀었다.
“함께 맞춰봤답니다.”
하양이에게 맞춘 듯한 조그만 모자와 내가 쓸 큰 모자가 차례대로 전달되었다.
나와 같은 모자를 쓴다는 것을 깨달은 하양이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조촐한 패션쇼가 시작되었다.
***
드레스를 고르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녹초가 된 몸을 달랠 수 있었던 건 하양이 덕이었다.
“나 이거 좋아.”
하양이는 자신과 딱 맞는 모자를 쓰고 어깨를 으쓱이며 걷고 있었다. 모자가 마음에 드는지 만지작거리는 모습까지 귀여웠다.
“그럼 전하 선물은 그걸로 할 거예요?”
“네.”
나는 아까 전 크로엘이 알려줬던 주소를 떠올렸다. 자신의 가게 옆 건물의 3층이라고 했지.
“솔직히 전하는 언니가 주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하실걸요.”
메르시가 계단을 오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동의했다. 내가 무얼 준비하든 알버트가 그걸 받고 얼굴을 찡그리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받았을 때 정말 유용하고 쓰기 좋은 걸 사주고 싶단 말이지.
“어쨌든 좋은 선물이라 생각하지만요.”
덧붙이듯 말한 메르시가 가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