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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80화 (80/156)

80화.

알버트와 헤어진 시간 동안 나는 가장 큰 본궁과 가까이 있는 왕실 서재를 이용했다.

가는 길에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은 공손히 인사하곤 했다. 나는 이제 작위를 받은 귀족이었다.

영지 관리 같은 건 알버트가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해서 아직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왕실 서재에서 책을 빌린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며 보냈다.

드래곤의 둥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직접 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기 전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알버트는 내가 왕실 서재를 돌아다니는 걸 막지 않았다.

아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계약자가 될 생각이니까.

안타깝게도 내 미숙한 실력으로 하는 순간이동은 내가 이미 가본 곳으로만 이동이 가능했다.

하양이는 드래곤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알았지만, 그곳은 특수한 공간이라 순간이동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하늘을 날아 그곳을 찾아가야 했다.

이는 내가 마법을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수능 공부할 때보다 더 열심히 악착같이 공부했다. 코피가 안 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책 속에 파묻혀 살던 날이 지나고, 메르시와 함께 외출하는 날이 되었다.

“잘 지냈어요?”

방 안에 들어온 메르시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큰일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일이 있다더니, 잘 끝난 모양이다.

“저는 잘 지냈는데, 메르시는요?”

“저도 마찬가지!”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나는 오늘을 위해 차려입은 메르시를 보며 감탄했다.

화려한 레이스로 뒤덮인 드레스는 자칫 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르시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정말 오직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옷 같았다.

“오늘 기분 좋은가 봐요.”

“언니 덕분에 쇼핑할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트라우마 극복을 끝내기도 했고.”

눈을 살짝 내리깐 메르시가 입꼬리를 올렸다. 살짝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잔혹한 마녀 같았다.

“트라우마 극복이요?”

“네.”

메르시가 더 말하길 기다렸지만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한 후 말꼬리를 돌렸다.

“오늘 나가서 드레스도 맞출 테지만… 저번에 가져다준 건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 골라왔어요.”

그녀가 내 손 위에 그녀의 것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새틴 소재의 드레스를 내밀었다. 옅은 분홍빛의 드레스는 촘촘한 레이스가 돋보였다.

“고마워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드레스를 받았다.

“옷을 갈아입으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와 메르시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는 걸 도와주었다. 풍성한 밑단은 내가 빙그르르 돌면 우아하게 퍼졌다.

귀족 영애들처럼 차려입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한테서 가져온 거예요. 오늘 예약도 잡아놨고요.”

“…예약이요?”

“네, 오늘 들를 거예요. 로제도 옷을 좀 사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기성품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메르시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드레스는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난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곳의 보통과 내 보통은 다를 것이다. 귀족이 되었으면 그에 맞춰 생활하는 법도 알아야겠지.

귀족으로서 사는 법에 대해 읽어봤으면 좋을 텐데 마법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런 건 신경도 못 썼다.

우선은 메르시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두어 시간 정도 잡으면 되겠지. 하루 종일 나가 있을 테니 알버트의 선물을 고르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미리 생각해 놓은 게 몇 개 있기도 했고.

어째 상황만 보면 주객전도된 거 같긴 하지만,

나는 메르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는 메르시가 잘 알 테니, 메르시의 말을 따를게요.”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내 말에 만족스럽게 웃은 메르시는 손뼉을 딱 쳤다. 내 품에 안긴 하양이를 보며 메르시가 사악하게 웃었다.

“드래곤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양이가 몸을 움찔했다. 이윽고 하양이는 용감하게 말했다.

“나, 나는 옷을 못 입어….”

하양이의 말에 메르시가 그게 대수냐는 듯 받아쳤다.

“액세서리도 많아요. 볼 때마다 귀여워서 모자도 걸쳐보고 싶었고, 망토도 입혀보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딱 와서 준비했죠.”

모자 쓴 하양이라니, 생각만 해도 귀엽잖아! 하양이가 내 손을 흔들었다.

“…로제?”

나는 메르시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양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망토를 걸친 하양이의 모습을 생각하니 흐뭇해졌다. 메르시와 내 시선이 맞닿았다.

“그럼 갈까요?”

행복한 상상과 함께 우리는 궁을 나섰다.

***

시내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마차를 타자 메르시는 내게 모자를 건네주었다.

“지금 전하를 비롯해 반역의 주역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니 쓰는 것이 좋을 거예요.”

“저에 대해서도요?”

“전하께서 그렇게 대대적으로 홍보하시는데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걸요.”

그동안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아 몰랐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내 이름은 이미 떠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로제 아티어스.

알버트 그레이를 향한 충성심 하나만으로 그와 함께 탑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알버트를 열심히 모신 하녀.

그 후 반역의 주역으로 참여하며 공을 세웠고 하녀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귀족이 되었으며, 현재 알버트의 총애를 받고 있는 충성스러운 신하.

무척 강력한 마법사기도 하다… 라고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솔직히 메르시가 과장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여자고 알버트는 남자다.

나는 하녀였고 알버트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다. 내가 그에게 총애를 받는 게 순수하게만 받아들여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 얼굴을 살피던 메르시는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저기 뒤에 마차 따라오는 사람들 보여요?”

메르시가 마차 뒤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린 나는 마차 뒤쪽으로 나 있는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전하께서 궁의 세력을 안정시키며 가장 먼저 한 일이 식량을 푸는 거였어요. 로스투라투가 사람들을 속여왔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한 거죠.”

“…….”

“전하께서 대중 앞에 나설 때 매번 강조하시는 건, 로제 당신 덕에 탑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로제를 향한 민심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죠.”

모두 전하의 치밀한 설계예요. 피식 웃는 메르시를 보며, 나는 알버트가 얼마나 사려 깊은지 다시금 느꼈다.

내가 소문을 신경 쓰던 것을, 알버트는 잘 알고 대처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대체 뭘까.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것이.

나는 알버트가 진심으로 웃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그가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인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그는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걸 좋아한다. 감자국을 좋아하고, 햇빛이 드는 방 안 그늘진 곳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가 좋아하는 색은 뭔지, 좋아하는 음악은 뭔지.

혹 메르시는 알까? 나보다 알버트를 오래 알았으니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왕자, 아니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물건이 있나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던 메르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솔직히 저보다는 로제가 전하를 더 잘 알걸요.”

“설마요. 알고 지낸 시간은 메르시가 훨씬 길 텐데. 시간은 무시 못 하잖아요.”

“진짜 얼굴만 알고 지낸 세월이라서요. 전 전하가 웃는 얼굴 보는 것도 어색하답니다. 그건 공작님이나 슈버트도 마찬가지일걸요.”

슈버트도 그럴 거라는 예상은 믿기지 않았다. 누구보다 알버트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는데.

내 얼굴을 보며 메르시가 손을 올려 선을 그렸다.

“누구한테 속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세요.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벽이 있고.”

“…….”

“언니는 그런 분의 마음을 연 거예요. 평생 아무도 허물지 못했던 전하의 벽을.”

메르시가 내 앞에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그냥 평범했는데요.”

정말 한 게 없어서 민망했다.

내 말에 메르시가 흠 소리를 내더니 팔짱을 꼈다.

“뭐, 답은 전하께서만 알고 있으시겠죠.”

“…….”

“자 그럼 내릴까요.”

마차가 멈춰 섰다.

나는 메르시와 함께 내렸다. 3층으로 이루어진 큰 건물 앞에 여자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를 보는 그녀의 시선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반갑습니다, 로제 아티어스 님. 저는 이곳의 디자이너, 크로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격하듯 말하는 모습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은 나는 마차 주위로 퍼져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저마다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를 올린 채 나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생각보다 따가웠다.

신기한 듯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우리 안에 갇힌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저 사람이….”

“그래, 저 사람이….”

부채를 들고 양산을 펼친 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이게 사교계라는 건가.

한 달 후에 생각해야 할 게 또 늘었다. 저 사람들과 안면을 터야 할 텐데,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잊고 있었다.

알버트는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그의 성미를 맞추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회사에서 봤던 온갖 인간군상이 떠올랐다.

하양이의 계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텐데….

현실이 조금씩 눈앞을 가리는 듯하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니 마음 편히 생각하자. 알버트와 거리를 두려 한 이유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로 소문에 스트레스는 받겠지만….

너무 힘들면 알버트한테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

물론 알버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방긋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지 않나.

첫인상은 확실히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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