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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9화 (79/156)

79화.

알버트는 바빴다. 정말 엄청 바빴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바로 볼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시종들은 전하를 뵈러 가게 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막 왕이 되어 귀족들을 정리하고 민심을 잡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 이해가 되어 나도 알버트를 찾지는 않았다.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탑도 벗어낫겠다, 영지도 받았겠다 내 앞날은 창창했다. 아직 못 나가서 문제였지만….

리암은 나를 보내기 위해 북쪽 마을에 내가 머물 수 있는 집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알고 보니 그곳에는 숲을 낀 호수가 있어 알게 모르게 귀족들 사이에 휴양지로 소문이 나 있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푸른 호수가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모양이었다.

리암은 나를 알버트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보내서 그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게 만들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그게 먹힐까에 대해서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내가 떠나는 건 순전히 그가 나를 위해서 주는 유예기간이었으니까. 리암이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알버트의 눈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로제.”

내 이름을 부른 그가 소파에서 나를 향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른히 눈을 치켜뜬 채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까지 한 폭의 화보였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앉았다.

“왜 옆에 앉지 않고.”

“그럼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알버트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얼버무렸지만, 사실 그의 옆에 앉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유가 더 컸다.

바쁜 시기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다는 시종과 신하들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는 매일 저녁 나를 찾았다. 꾸준하게.

탑에서 지금까지 그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계약서가 사라진 후로 그는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옆에 앉으면 나를 만지고 입을 맞췄다.

그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막상 시작하면 너무 잘해서 정신이 혼미했으니까. 그러니 아예 시작할 수 없도록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낫다.

그는 한 달이라는 유예기간을 의식한 듯 그 이상의 스킨십을 하진 않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그냥 넘기기 힘들 정도로 끈적하게 변했다.

“그럼 내가 가야겠구나.”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썹을 치켜올린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 깜짝할 사이 내 옆에 앉았다.

내가 몸을 움찔하자 피식 웃은 그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소리가 살갗을 파고들어 심장을 간지럽혔다.

“꼭 가야겠느냐.”

알버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여전히 그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 이렇게까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좋게 보인다면 짓궂은 걸까. 나는 그의 뒤통수를 흘겨보다 중얼거렸다.

“…메르시도 붙여주시고 리암 공작님의 계획도 다 알고 계시면서.”

“어쨌든 네가 도망은 갈 수 있게 해주는 거잖니. 그들도 모두 너를 돕고 있으니.”

알버트가 대꾸했다. 그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당사자가 이렇게 다 아는 도망이라니.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그만큼 너를 보낼 수 없는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구나.”

알버트의 말에 나는 웃었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말만 한다니까.

…알버트의 마음에 확신이 생기는 것과 별개로 이번에 떨어져 있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우선 난 그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알버트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은 알지만,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절대 사양이다.

“리암이 열심히 준비하더구나.”

“…어디 가는지도 알고 계세요?”

“아니, 리암이 고생하는 것을 보아 더 찾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이것까지는 찾지 마셔야 해요. 안 그러면 정말 의미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이번은 내가 알버트의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양이와의 계약을 잘 끝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안다. 네가 내게 다시 돌아오며 한 달이란 기간을 둔 것을 후회할 것도.”

내 말에 알버트가 웅얼거리며 내 어깨를 간지럽혔다.

내 어깨에 파묻은 고개를 든 알버트가 짐짓 입꼬리를 내렸다.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얼굴이었지만 처량하기는커녕 먹이를 앞에 둔 맹수 같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가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탑에는 다녀왔느냐.”

“아니요, 아직. 안에 남은 옷들 챙겨와야 하는데.”

“…그럼 가기 전에 탑에 한번 가자. 안 그래도 탑이 그립던 참이었거든.”

그의 말에 뭔가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넓은 곳에 있으면서 그곳의 작은 방이 문득 생각날 때가 있었다. 나와 그만 존재했던 곳이.

…그렇게 꽉 막힌 공간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지만. 나오니 그리워지다니, 청개구리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잠에서 깬 하양이가 꾸물꾸물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알버트가 하양이를 보며 서늘한 눈길을 보냈다. 하양이가 받아쳤다.

이 둘의 사이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평소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알버트도 하양이에게만은 엄격했다. 나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양이는 어릴 적 왕자님께서 봤던 그 드래곤이 아니잖아요.”

책을 읽으며 나는 드래곤이 생각보다 만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눈에 띄면 계약자를 만들 수도 있지만 죽을 확률도 높아지는 만큼, 새끼 드래곤들은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 다른 드래곤일 텐데…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내 말에 알버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하게 비슷하다니요.”

“눈빛도, 느껴지는 기운도 그때와 너무 닮아 있어. 그리고 말했잖니. 난 드래곤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릴 적부터.”

이 대화는 뫼비우스의 띠가 분명해. 나는 둘이서 싸우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사실 제가 오늘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내 말에 알버트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어냐.”

“…호칭은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께서 왕이 되신 지 꽤 되었는데 제가 자꾸 왕자님이라 부르고 있어서.”

그가 왕위에 즉위한 이후 메르시와 리암을 비롯한 사람들의 호칭은 바뀌었지만, 나는 그를 왕자님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저하라고 부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왕자님이라 부르는 게 더 익숙했다.

매번 전하라 불러야지 하면서 자꾸 입에서 왕자님이 튀어나왔다. 습관이 되어버려서.

내 말에 알버트가 턱을 괴며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확실히 호칭이 문제기는 하지.”

그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역시 왕을 왕자님이라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지. 그도 듣기 싫었을 것이다.

좀 더 호칭을 조심해야겠다.

“알버트, 라고 불러보거라.”

알버트가 무얼 명했는지 깨닫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턱을 괸 알버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야살스럽게 웃는 얼굴이 마치 사이렌처럼 나를 홀렸다.

“내가 잘 때는 잘 부르던데.”

그때 안 자고 있었어?!

“지금은 왜 입에 풀이라도 붙여놓은 양 입을 다문 건지 모르겠구나.”

알버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내 손등을 제 손으로 덮으며 말아 쥐었다.

“둘이서만 있을 때는 그 정도 호칭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누가 왕을 이름으로 불러요? 이제 왕자님도 아닌 왕인데.

내가 아무리 알버트와 썸을 타고, 연인에 가까운 사이라지만 곤란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불렀을 때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내가 단호히 입을 열려던 순간, 알버트의 목소리가 연이어 귀에 꽂혔다.

“누군가 이름 불러주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좋더구나.”

“…….”

“내 이름이 그렇게 듣기 좋은 줄 몰랐어, 로제.”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말이 맞다.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 생각보다 많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가 매번 나를 로제, 라고 부를 때 나는 설레니까.

“다른 이들 앞에서 호칭은 상관없다. 왕자님이라 부르고 싶으면 부르거라. 네가 부르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아주마.”

내 손을 쓰다듬는 손길에 열이 올랐다.

“알버트, 라고 해보거라. 로제.”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얼른 말해보라는 것처럼 나를 재촉했다.

“왕자님이라고는 잘만 하더니.”

그건 실제로 왕자님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장렬히 고민에 빠져 있는데, 알버트의 목소리가 자꾸 흘러들었다.

“힘들면 명이라 생각하고 부르거라.”

사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왕자님, 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이름을 부르는 게 더 가까이 느껴지니까.

예전 그의 호칭은 저하, 왕자님이었고 지금은 전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유혹에 흔들렸다.

“로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결국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입안에 맴돌던 이름이, 공기와 소리를 담고 새어 나갔다.

“알버트.”

밤이 다 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환한 낮 같았다.

내가 이렇게 빨리 불러줄 줄 몰랐던 것처럼 크게 뜬 눈은 평소 보기 힘든 감정을 담고 있었다.

다소 쑥스러운 듯 올라가는 입꼬리는 소년 같았다.

그가 내 말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살며시 올라온 손은 내 턱을 움켜쥐었다.

“알버트.”

나는 그의 이름을 다시 입에 담았다.

우리 둘만의 호칭은, 내게도 만족스러웠다. 부끄러웠지만, 내가 나를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설레듯, 그도 그랬으면 했다.

“로제, 고맙구나.”

“…….”

“네 덕에,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

“…….”

“복수가 아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줘 고맙다.”

…나야말로 알버트를 만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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