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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8화 (78/156)

78화.

하양이는 아주 긴 목욕을 마치고 내가 침대에 눕고 나서야 돌아왔다.

자신이 잠기고도 남을 만한 맑은 물과 여러 향유를 써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 듯했다.

[이런 곳도 있구나.]

기분 좋은 목욕은 하양이에게 삶의 이유를 일깨워 줬다.

사람을 살고 싶게 하는 건 사실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내일 먹을 맛있는 음식, 혹은 기분 좋은 목욕. 친구와 함께 나누는 대화 같은 것.

나는 하양이에게 이런 소소한 기쁨이 계속 늘어나길 바랐다. 하양이가 나와 계약을 하고 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

다음 날 아침, 메르시가 식사가 담긴 트레이와 함께 나를 찾았다. 그녀는 트레이를 침대 위에 놓아주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메르시! 일은 잘 끝났어요?”

“하하, 당연하죠!”

유독 활기찬 목소리와 다르게 메르시의 얼굴은 핼쑥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겨우 어제인데 왜 이렇게 됐지. 곰곰이 생각하던 난, 감옥에서 내게 순식간에 달려오던 알버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메르시, 제가 왕자님께 상황 설명을 제대로 못 하긴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언니를 보낸 것이 잘못이었죠. 제 욕심이었으니… 하하.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다 말하는 얼굴의 다크써클이 너무 진한걸! 그녀는 웃으며 내 앞에 따끈따끈한 수프를 내밀었다.

“어서 들어요. 전하 뵈러 가기 전에 입을 만한 드레스 전달하러 온 거니까.”

“…드레스요?”

“네.”

그녀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 안에서 드레스를 술술 꺼냈다.

예전에 리암이 쓸 수 있게 해줬던 마법의 주머니 같았다. 작은 주머니 안에선 드레스가 쑥쑥 나왔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가져왔어요.”

나는 수프를 먹는 것도 잊은 채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이 정도면 옷장을 통째로 옮겨온 수준인데?

“시간이 없어서 더 못 사온 게 아쉽네요…. 제가 눈이 좀 높은 편이라.”

예의상 하는 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메르시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러고 보니 메르시는 옷을 잘 입었다.

그녀와 어울리는 붉은빛의 드레스에 여러 보석이 조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로브를 입은 모습이 더 익숙해서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는데, 메르시가 내 생각보다 훨씬 패션에 열정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20벌은 되어 보이는 드레스들을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에, 이 많은 드레스를 하루 만에 어떻게….”

“완성되어 있는 기성품 위주여서 그래요. 원래는 탑에 들어가서 언니가 입던 옷들을 가져오려고 했었는데 전하께서 막으셔서… 몸에 잘 맞을지 모르겠네요.”

대체 왜! 못 들어가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요. 메르시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불평했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내 목에 남은 상처에 닿았다.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불평 없이 받아들인 거지만.”

그 말에 뜨끔했다.

메르시가 원해서 그런 것만은 아닌데. 내가 그녀를 회유한 게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나는 그녀의 편을 들었다.

“메르시만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건 정말 다친 축에 끼지도 않는데.”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메르시가 씩 웃었다. 그녀는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고소한 크림 수프와 어울리는 따끈따끈한 빵이었다.

갓 구운 빵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나는 하양이의 입속에 빵을 조금씩 뜯어 넣어주었다.

“맛있어어….”

하양이가 빵을 우물거리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

“계약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턱을 괴고 나와 하양이를 응시하던 메르시가 중얼거렸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왕자님과 떨어진 한 달 동안은 마법을 독학해 보려고요.”

사실 독학보다 메르시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기는 했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워낙 아는 게 없어서 마법사한테 배우면 정말 너무 고마울 것 같은데…. 제가 한 달 동안 수도를 완전히 벗어나서.”

“…그렇네요.”

메르시가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골똘히 생각하다 손뼉을 딱 쳤다.

“그럼 제가 갈까요?”

“…마탑주가요?”

메르시가 그게 문제가 되냐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아니, 반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전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텐데요, 뭐. 오히려 제가 언니와 함께 있겠다고 하면 두 손 들고 환영하실걸요.”

“하지만….”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요.”

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웃은 메르시가 찬찬히 설명했다.

알버트가 숨겨왔던 마법 능력에 대해 밝히고 그의 능력을 깨달은 마법사들은 마탑주인 메르시만큼이나 알버트를 존경하고 따르는 모양이었다.

“전 독학도 잘할 것 같은데.”

“옆에서 마법사가 도와주는 것과는 다르죠. 그리고 마탑주잖아요, 저. 초보 마법사들 봐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전하와 다르게 맞춤 교육이 가능합니다.”

…고액 과외가 이런 느낌인가? 저번에 내가 그녀를 설득할 때 같다. 미리 준비해 온 것 같은 매끄러운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잠시만.

미리 준비해 온 것 같다는 느낌이 걸리는데.

나는 메르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움찔했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가장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 메르시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메르시, 어제 왕자님을 만났다면서요.”

“예, 만났는데….”

“저와 함께 가라고 말씀하시던가요?”

“…….”

내 말에 메르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내가 이렇게 핵심을 찌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메르시는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마법을 제일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저고요.”

괜히 마탑주가 된 게 아니거든요. 이야기를 잇는 메르시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전하께 죄송한 것도 사실이니, 이번 일로 만회하고 싶어요. 잘 가르쳐 드릴게요. 혹독하게.”

메르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잘 부탁해요.”

메르시가 내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저야말로요!”

해맑게 웃는 얼굴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떠나는 건 2주 정도 뒤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메르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전에 메르시, 저와 함께 수도에 쇼핑을 나갈 수 있을까요?”

알버트와 잠시 헤어지기 전에 선물을 주고 가고 싶었다.

그에게 받은 건 많은데 내가 준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그 사실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오늘 드레스를 골라온 센스를 보면 메르시가 선물 고르는 걸 잘 도와줄 것 같았다.

가격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 이제 영지 가질 여자야. 연금은 물론 건물주의 꿈까지 모조리 이루게 되는 것이다.

쇼핑하며 돈 쓸 생각을 하니 짜릿했다.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돈은 항상 옳았다.

돈 쓰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 아닐까?

“언제요?”

“메르시 편할 대로 해도 돼요. 아마 저는 작위 받고서도 여기 있는 시간이 대부분일 것 같아서.”

메르시가 고심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다음 주 월요일은 어때요? 제가 이번 주에는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네, 괜찮아요.”

다음 주면 나쁘지 않았다. 메르시는 바로 못 가주는 게 미안한 듯 입꼬리를 축 내렸다.

“더 빨리 못 가서 죄송해요. 미뤄왔던 일이라 더 이상 놔둘 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면 해야죠.”

내 말에 메르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쵸? 오래 망설인 만큼 확실하게 해보려고요.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확실히 날려 버리고.”

메르시가 씩 웃었다. 나는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며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

메르시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차려입고 간 나는 알버트와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작위를 하사받았다.

그가 탑 주변에 있던 병사들과 그 자신을 증인으로 삼아 내 공을 증명했고, 이미 알버트의 무력을 경험한 듯한 귀족들은 벌벌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투라투의 파티에서 웃으며 떠들던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진행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위 받는 일은 빠르게 끝났다.

알버트가 나를 위해 과정을 축약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작위를 받고 나서 나는 왕을 알현하는 곳을 벗어났다. 시종을 따라 궁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복도를 성큼성큼 걷는 리암과 마주쳤다.

“이야기를 하러 왔다.”

그가 조만간 방문할 것 같긴 했다. 시종이 리암의 손짓에 물러갔다.

나는 그가 안내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에 앉자 리암이 바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지. 전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다 알고 계신다.”

“…….”

“쉬이 속일 수 있는 분이 아니란 생각은 했지만….”

후 한숨을 내쉬는 리암은 어제 싸울 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아까 전 메르시의 모습이 겹쳐졌다. 알버트가 너무 유능해서 신하들이 고생하는군.

하지만 이건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라 놀랍지 않았다. 알버트가 내게 직접 말도 했었는걸.

“놀라지 않는군.”

“예상했던 바였어서요. 왕자님께서 직접 이야기하기도 하셨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암이 말을 이었다.

“영지와 작위를 받았다고.”

“네, 남부에 바닷가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영지를…!”

영지 문서를 떠올리니 마음이 좀 벅차올랐다. 이제야 내게 땅이 생겼다는 게 실감이 났다.

땅뿐이냐, 성도 있다. 비록 관리해 줄 사람은 알버트가 붙여줄 테지만.

“남부라….”

“수도에서 멀긴 하지만요.”

내 말에 리암이 실성한 듯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헛웃음이었다.

…뭐지?

나는 그가 미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잠시 후 얼굴을 감싼 리암이 진지하게 물었다.

“…눈 좋아하나?”

“예?”

“저하께 하사받은 영지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남쪽보다 수도에서 가깝긴 하지만….”

“추운가요?”

“…춥긴 해도 사시사철 핀 눈꽃이 아름다운 곳이다.”

리암의 영지보다 추운 곳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쪽은 안 될까요?”

“…이제 안 돼.”

내 말에 리암이 단호히 답했다. 이제는 안 된다니! 그럼 원래는 가능했다는 거야?

“남쪽의 인구는 대부분 바닷가에 몰려 있다. 그중에서도 네 영지는 작긴 해도 해산물을 꾸준히 잡아들이며 수익을 올리는 유명한 곳이야.”

“…….”

“새로운 영주로서 부임하며 얼굴을 보일 테고… 네가 어디 있는지 전하께 소문이 나는 건 금방일 테다.”

리암의 나지막한 말소리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알버트는 놓아준다 말하면서 날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비롭게 말해놓고 이렇게 떨어지기 어렵게 만들다니.

그 와중에 리암이 나와 알버트를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웠다.

한 달 동안 이색 경험 하는 셈 쳐야지.

메르시의 도움을 받으면 마법 실력도 늘 거고, 그러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드래곤의 둥지에 다녀올 수 있을 테니까.

결국 한 달 동안 내 거처는 북쪽 끝에 자리한 마을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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