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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7화 (77/156)

77화.

더없이 낭만적인 말을 한 알버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새벽의 밤하늘처럼 가라앉은 얼굴은 공허했다. 내가 가늠하지 못할 감정의 깊이가 보였다.

복수를 끝낸 알버트가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본 로스투라투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알버트가 다시 만난 로스투라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겠지. 자신이 어째서 이런 사람에게 휘둘려야 했는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희생된 사람들도, 그가 잃은 시간과 아물지 못한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는 내가 그를 만났음에 감사했다. 그가 겪어야 했던 공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던 것에.

나는 알버트 앞에 서서 까치발을 들었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발을 내딛는 모습을 보고 알버트가 창문에서 내려왔다.

“목 아프겠구나.”

그가 내 목덜미를 다시 살살 어루만졌다. 따스한 손길이었다. 그는 언제나 상냥한 사람이었다.

항상 커 보이는 사람.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

처음 로제의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알버트의 빈틈을 본 적은 드물었다. 그의 감정은 유난히 절제되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당신의 삶을 알고 싶다. 불행했던 유년 시절도 모두. 그 시간이 모여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일 테니까.

알버트의 감정이 확실해지기 전까지, 거리를 두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건 방을 찾아온 알버트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나는 알버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왕자님.”

나는 알버트를 안았다. 내가 키가 작아 오히려 알버트의 품에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힘드셨구나.”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내게 잘했다 칭찬할 때처럼. 그의 가슴에 파묻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로제.”

낮은 목소리로 말한 알버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쉰 숨이 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나는 그의 등을 다시 한번 토닥였다.

“넌 항상 내가 원하는 말만 해주는구나.”

알버트가 드물게 내보이는 틈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듣고 싶었단다.”

“…….”

“수고했다, 일을 잘 끝냈다는 말보다… 나도 힘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어.”

“…….”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이 내 등을 감쌌다. 나를 꽉 껴안는 품은 한겨울의 모닥불처럼 따듯했다. 그의 품은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마지못해 나를 놓아준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 없는 한 달이 어떻게 갈지 모르겠어.”

“금방 갈 거예요. 연회도 있고, 왕궁 갈아엎으려면 바쁘실 거잖아요.”

“정말 아직도 떨어지길 원하느냐.”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와 떨어지는 한 달은 그저 서로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다는 이유보다 중요한 것이 생겼다.

‘드래곤의 무덤’으로 가야 한다.

알버트는 계약자를 바꾸려 한다. 나 대신 하양이의 계약자가 되어 모든 것을 감내하려 한다. 나는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짐을 지고 고통을 참아왔다.

나를 위해서 흑마법을 치료해 준 적도 있으니… 더 이상 그의 희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알버트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고 했으니, 들어주어야겠지.”

“…….”

“내가 본래 이렇게 참을성 없는 인간이 아닌데 말이야.”

그가 옅게 웃었다.

“내일은 네 공을 치하하고 남작 지위를 내릴 거다. 영지는 바닷가를 끼고 있는 남쪽 지방에 있다. 작지만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지.”

“벌써요?”

그가 반란을 일으킨 게 오늘인데 벌써 영지가 준비된다고? 사람들의 반발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알버트는 상관없는 듯했다.

그의 일 처리를 아는 나로서도 그리 걱정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내 얼굴을 감싼 손의 힘이 강해졌다.

“내일부터 계약은 끝난다는 말이란다.”

계약을 들먹이는 건 분명 서로를 만지는 데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부분 때문일 터였다.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 이렇게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아닌데, 그 앞에서는 유독 다른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야 그의 말을 잘 받아쳤지만, 그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앞에서 자꾸 당황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나는 방긋 웃으며 받아쳤다.

“어차피 물어보지 않고 계셨잖아요?”

그리고 알버트는 다시 강펀치를 날렸다.

“애석하게도 난 그게 많이 참은 거였거든.”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나를 옆에 두고서 잘도 자더구나. 네 덕에 나는 매일 밤잠을 설쳤는데.”

속삭이듯 중얼거린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말은 없으셨잖아요! 그리고 저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으면 다시-”

“다락으로 돌아갈 것을 알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죄책감도 가져주면 더 좋을 거라 생각했지.”

알버트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죄책감까지 원했다니 황당했다. 이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내가 입만 뻐끔거리자 알버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밤하늘에 어울리는 달처럼, 그의 눈꼬리가 부드러이 휘었다.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알버트가 덧붙였다.

“기대해 주거라. 계약이 끝나고 아무런 제약도 없는 한 달 후의 너를 위해 내가 무엇을 준비해 놓을지.”

“…….”

“그때는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니.”

왜지. 나는 한 달 후가 무서워졌다. 그 시간이 알버트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다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한 달간 체력도 좀 비축해 두거라. 이번에는 네가 잠을 설칠 차례 아니더냐.”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달아오른 얼굴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날을 위해서 오늘은 키스로 마무리해야겠지.”

입술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내가 눈을 감을 새도 없었다.

알버트가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에서 멈췄다. 그가 날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우리의 이마가 맞닿았다.

그의 속눈썹까지 보일 만한 거리였다.

“로제.”

“…왜 그러세요?”

그에게 내 숨결이 닿는다는 생각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알버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나를 원하고 있는지 알고 싶단다.”

“…….”

“그러니 한 번쯤은, 네 입으로 원하는 게 무언지 말해줄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해 보면 접촉을 하는 건 언제나 알버트였다.

나는 그와의 계약 조항을 이행하기 위해 애썼으니까. 내 말에 그가 예전의 로제를 떠올릴까 두려웠다.

나를 경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불안하고 서운했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 알버트가 이렇게 물어보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게 어떤 명이어도 따르게 만들 만한 미모였다.

“응?”

그답지 않게 보채는 목소리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진짜, 알버트와 함께 있으면 매 순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그의 목을 감쌌다. 그처럼 멋있게 말하고 싶어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알버트의 짤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왕자님처럼 멋있게는 안 되네요.”

“넌 너 자체로도 충분한데 무엇하러.”

그가 날 내려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키스해 주세요.”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겹치며 내 입안을 침범했다.

그가 굶주린 맹수처럼 나를 탐했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포옹보다 훨씬 긴 키스였다. 중간에 숨을 쉴 시간을 미약하게 주고서 그는 다시 입을 맞추길 반복했다.

내가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생각에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그는 키스를 멈추었다.

“그리 길지 않았는데.”

…그게 길지 않았다고? 갈수록 길어지는 키스와 스킨십. 이 끝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그게 두려워졌다.

나를 집요히 보는 시선과 못내 아쉬운 듯한 얼굴에는 아직 풀지 못한 욕망이 드리워 있었다. 열이 오른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알버트가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보면 내 참을성도 영 못 쓸 만한 것은 아닌데.”

피식 웃은 알버트는 내 입술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받거라.”

그가 내 손 안에 뭔가 쥐여주었다. 고개를 내린 나는 손에 쥐어진 열쇠를 발견했다.

“…이건.”

“탑의 열쇠다. 떠나기 전에 탑에 들러 짐은 가져가야지. 드나들 수 있는 건 너와 나뿐이니까.”

너와 나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 탑은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탑을 없애실 건가요?”

나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알버트에게 나쁜 기억이 있었던 곳인 만큼 그가 두고 싶어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가끔 너와 그곳으로 휴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괜찮으세요?”

로스투라투가 만들었던 곳이 아닌가. 나 때문에 일부러 괜찮은 척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알버트는 숨기는 게 익숙해서 내가 더 자세히 살펴야 했다.

“네가 좋은 기억을 심어주어서, 그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단다.”

알버트가 느리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면밀하게 살폈다.

혹시라도 안 좋은 기색이 있으면 바로 탑을 없애자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알버트의 얼굴에 담긴 건 오롯한 진심이었다.

기뻤다.

내가 진정으로 당신의 삶에 좋은 기억을 심어줬구나, 싶어서.

비록 힘들긴 했지만, 내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은 탑에서의 기억이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이제 로스투라투도 죽었겠다, 하양이의 일이 끝나고 나면 행복하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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