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6화 (76/156)

76화.

“항상 허황된 의견만 내보인다 생각했지만… 새로운 왕국을 꿈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레오나가 홀가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슈버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모든 사람은 설득해도 당신은 설득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같은 기사단에 있었던 레오나를 마주한 탓인지 슈버트의 말투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투 변화보다 놀라운 건 서로를 잘 아는 듯한 레오나와 슈버트의 태도였다.

나는 신기한 조합에 놀라 그들을 흥미로운 눈길로 응시했다.

둘이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서로 그리 친하지는 않은 듯 어색한 공기가 흘렀지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는 모양새였다.

“아티어스 양, 미안하지만 기사들에게는 마법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군.”

레오나가 주위를 훑으며 내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긴 검을 꺼내 들었다. 다소 느슨했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직 왕궁 기사단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슈버트와 레오나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건 레오나일 것이다. 그녀는 검을 든 채 슈버트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합을 맞춰보지 않겠나, 남작.”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그가 검을 들었다. 레오나와 등을 맞댄 슈버트가 검을 휘둘렀다.

“매번 내게 차이를 운운하는 이들이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거든.”

나지막이 중얼거린 레오나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졌다.

지금 이 순간이 레오나에게 어떤 의미일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에.

“저희는 밖으로 나가 왕궁을 장악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은 투명한 상태로 사람들 사이를 훌쩍 넘어 날아갔다.

“로제는 어떻게 할 거야…?”

내 옆에 붙어 있던 하양이가 물었다.

“기사들을 공격하지 못하면….”

남는 사람은 기사단장뿐인데. 리암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그게 오히려 실례일 것 같았다.

우선 내가 이곳에 와 할 일은 끝냈는데 그냥 서 있기가 뭐 했다.

할 일이 없나 주위를 열심히 살피던 나는 리암의 뒤통수를 치려던 기사를 발견했다.

아니, 비겁하게 저러면 내 쪽에서도 끼어들 수밖에 없지.

사람 뒤통수를 치는 건 딱 질색이다. 나는 지팡이를 바로 휘둘렀다.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에게 전기 충격기 정도는 괜찮겠지…?

“일렉트릭시티.”

아까 전 썼던 마법을 되살려 중얼거리자 지팡이 끝에서 파직하며 전기가 흘러나왔다.

전기를 맞은 기사와 기사단장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흐이….”

이상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리암이 허망한 눈으로 기사단장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설마 죽은 건가?

내 마법이 그렇게 강했다고?

“봐! 내가 아까 로제의 마법이 강하다고 했잖아아.”

하양이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부리나케 리암 쪽으로 달려갔다.

“살아 있는 건가요?”

리암이 그의 숨소리를 확인한 후 중얼거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마법을 쓰는 순간 내 하이드 마법은 사라졌다. 리암이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갑옷이었는데 공격이 꽤 매섭게 들어갔군.”

“하양이 덕이라 생각합니다.”

“비슷한 생각이다.”

리암이 너무 단번에 동의하니 머쓱해졌다.

아니, 내가 강한 거라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양이의 힘이 내 힘이고 내 힘이 하양이의 힘이라지만.

계약자로서 하양이의 마력에 감사해야겠다.

남자는 쉽사리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 지휘하는 사람이 없으니 기사들이 우왕좌왕 움직일 것은 당연지사.

“단장도 쓰러졌으니 이제….”

내게 말을 이으려던 찰나였다.

“마법사다!”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벌써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리암이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말했다.

“보통은 마법사부터 해치우려 들긴 하지.”

리암의 음성이 귓가에 꽂히는 것도 잠시, 기사들이 내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런!”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친 나는 그들에게 빠져나가기 위해 마법을 썼다.

하지만 난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리암의 기사들과 싸우면서도 그들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더 집중했다.

그나마 리암이 내 앞을 막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모두 순발력이 엄청났다.

방어 마법? 아니, 방어 마법은 아는 게 없다! 주문을 아는데 못 쓴다. 마법진을 알지 못해서.

기사들의 광기를 보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프리즈.”

하지만 내 고민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사람들 속에서도 선명히 들리는 목소리는 알버트의 것이 분명했다.

주변 기사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마법에 저항력이 있다는 갑옷을 입었음에도 그들은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력했다.

“로제.”

기사들 사이를 순식간에 가로지른 알버트가 다소 다급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그의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보기 드물게 동요하는 모습에 놀랐다.

“왕자님.”

내가 그를 부르는 호칭에 자리에 멈춰 선 알버트가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웃었다.

알버트 뒤로 레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내 감정이 쌍방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왕자님, 저는 아무 상처도 없어요. 메르시가 방어 마법도 걸어줬었는걸요.”

알버트가 인상을 살풋 찡그리며 손을 올렸다.

“말은 잘하는구나. 목에 상처가 남아 있는데.”

그의 엄지가 진득하게 내 상처를 문질렀다. 아주 미세한 상처였지만, 그는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알버트가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 쓰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깊은 눈매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원을 덧그리듯 목의 상처 주변을 맴돌던 손이 떨어졌다.

그가 내게서 시선을 느릿하게 돌렸다. 내게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채, 리암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리암.”

“과찬이십니다.”

“모두의 공이 크다. 궁은 완전히 함락되었고, 일은 순조로이 진행되는 중이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겠구나.”

기사들이 예를 갖추어 알버트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하를 가득 채운 기사들이 한 사람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알버트는 갑작스러운 인사에 당황하기는커녕 우아하게 손을 올렸다.

얼굴에 깃든 기품은 한순간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탑에서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즐거워하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그와 내 차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싫었다.

이게 당연한 것을 알지만, 내 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계획은 마저 진행될 거다.”

알버트는 찬찬히 설명했다. 오늘부터 알버트는 로스투라투의 이름을 빌어 사람들을 궁에 초대할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지만 로스투라투가 이런 건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궁에 들어오는 순간, 숙청은 시작될 것이다.

누가 살고 죽느냐는 오로지 알버트의 뜻에 달렸다. 알버트는 주위를 살피다 레오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움찔했다.

“기사단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을 테지.”

마법사들에게 레오나의 상황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레오나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버트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나는 그에게서 슬쩍 멀어졌다.

알버트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바빠질 사람이다. 이런 걸 서운해할 수는 없었다.

***

알버트는 리암과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야 했다. 나는 궁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은 탑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컸다.

푹신한 침대는 물론 벽난로에 호화로운 소파까지 곁들여진 방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이었지만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종은 없었지만 마법사가 전달해 준 잠옷은 있었다. 나는 방과 연결되어 있는 욕실로 갔다.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담갔다. 따듯한 물은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다 씻고 나온 나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새로 담은 물에는 하양이가 씻으러 들어갔다.

침대는 깃털로 만든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그게 오히려 어색했다.

알버트가 침대를 양보해 줬던 덕에 최근에는 침대에 익숙해졌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푹신한 건 부담스러웠다.

문득 딱딱하던 다락의 바닥이 생각났다.

모든 게 끝나고 이제 더 이상 탑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는데 이 공허함은 뭘까.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 달을 어떻게 버티지? 아무래도 난 알버트에게 생각보다 훨씬 깊게 빠진 모양이다.

이제 알버트가 아니라 내가 문제겠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밤이 되었다.

탑에만 있을 수는 없다. 알버트와 평생 둘만 있는 건 불가능하다.

탑에서 답답했던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이유는, 그곳을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탑을 그리워하지는 말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알버트에게 로스투라투와의 일이 제대로 끝났냐 묻지도 못했는데.

창을 여니 어두운 하늘에 달이 반짝였다. 그때, 창밖에서 누군가 훌쩍 안으로 들어섰다.

“…바쁘신 것 아니었어요?”

알버트였다.

“네 상처를 살피러 왔단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치지 않아야 했는데.”

이건 다친 축에 끼지도 못하는데. 그의 과한 걱정이 민망한데 좋았다.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복수는 어떠셨어요?”

그가 창가에 걸터앉아 내 턱을 쥐었다.

로스투라투를 떠올리며 흐릿해졌던 눈빛이 서서히 내게 초점을 맞췄다.

“너를 보는 순간 부질없는 일이 되었어.”

그의 음성이 밤하늘의 별처럼 선명히 박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