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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5화 (75/156)

75화.

계단은 길고 길었다. 내려오는 건 좋았지만 올라가는 건 확실히 힘에 부쳤다.

런을 써서 뛰어가고 있었지만, 황궁에 들어온 이후부터 계속 움직여서 그런지 힘에 부쳤다.

“쉬다 가지.”

여자와 남자를 양손에 업고 가면서 그녀는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계단에 기대어 앉는 허벅지는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탄탄한 티가 났다. 그녀가 오랫동안 단련해 만들었을 몸은 정말 멋있었다.

이런 게 진정한 걸크러시가 아닐까? 회사에 다니며 한 운동은 숨쉬기가 전부였던 나와 전혀 달랐다.

메르시도 마른 편이었고 로스투라투의 파티에서 봤던 귀족 영애들도 모두 드레스가 어울릴 법한 우아하게 마른 몸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녀의 선택이 더 대단해 보였다.

“…뭐지?”

나도 모르게 너무 열렬히 봤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결국 물었다.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몸이 너무 멋있어서 봤어요. 체력도 그렇고… 대단하신 것 같아요.”

“입에 꿀을 발랐군.”

“사실인걸요. 근육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내 말에 그녀는 짧게 답했다.

“레오나 블레이크.”

“블레이크 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레오나 님이라고 불러. 보니까 리암 공작님 쪽에서 온 것 같은데….”

레오나는 상황을 바로 읽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위에서 한창 싸우고 계시고 저는 이곳에 갇힌 마법사들을 풀어주러 온 거예요.”

“혼자 오는 게 위험할 거란 생각은 안 했나?”

“뭐 하양이하고 오기도 했고….”

“하양이?”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오나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하양이를 보고 흠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하양이는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평소 힘을 쓰지 않아 그렇지 체력은 좋구나.

드래곤이 성체가 되기 전까지 계약자는 드래곤의 마력 빼고는 다른 것을 전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하양의 체력이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검은 고양이에게 하양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특이하군.”

“…하하.”

그녀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레오나는 계단 위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기사단도 다 썩어가지고.”

경멸이 어린 표정을 보니,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네가 아는 게 뭐 있다고.”

레오나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위로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 말에 쏘아붙였으면서 눈길은 힐끔힐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의를 투영하려는 이들이 많았을 것 같아서.”

아까 전 붉은 머리의 기사가 알버트에 대한 소문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모습에서 느꼈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이들.

“…….”

레오나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다시 갈까.”

그녀의 말에 따라 나는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알버트가 만들 새로운 나라에 대해 생각했다. 로스투라투의 밑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를 거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기사단도 바뀔 거예요.”

확신하는 내 말에 레오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는 알버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좋아하는군.”

그녀가 나를 바라보다 한 말에 놀랐다.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거 티 내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버트를 확실히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다.

알버트에게도 다 보이려나. 그가 내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여유롭게 줄 수 있었던 이유도 혹시 이런 내 마음이 빤히 보여서였을까.

“티 많이 나요?”

“그래.”

그녀가 나를 보며 흘리듯 말했다.

“접는 게 좋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넌 귀족은 아닌 듯 보이니까.”

“그래도 저 직위는 받게 될 거예요. 이번 공을 인정받아서.”

알버트와 내 사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녀가 좋은 마음에서 충고하는 거라는 건 잘 알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열이 오르는 건, 그녀의 생각이 알버트를 밀어내던 내 심정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빛에서 납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읽은 레오나가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기반이 없는 왕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려 들 테지.”

안다. 기반이 없다는 건 로스투라투가 알버트를 데려온 이유였으니까.

“건국 때부터 이어져 오는 귀족 혈통과 부를 가진 집안의 아가씨가 한 명 있거든.”

레오나의 말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알버트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공작인 리암은 물론, 마탑의 주인인 메르시를 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알버트가 떠나간다고 해서 붙잡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가지자 한 것도 이런 상황이 생길 걸 알았기 때문이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주제를 바꿨다.

“그건 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그나저나… 저도 귀족이 되긴 할 텐데, 예법이 걱정이에요.”

“그건 네 마음이겠지. 예를 갖추지 않는다 해서 네게서 지위를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내 말에 레오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자신의 기준이 또렷한 사람이었다. 메르시와 다르게 자신의 위치에서 할 일을 다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로제의 몸에 빙의해 암담한 현실로 시작했지만, 내게 인복은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보면.

만났을 때 좋은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레오나 님. 나중에 이곳에서 나가면 뭐 하실 건가요?”

어쩌면, 그녀가 내게 좋은 친구 겸 스승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얼마 없어. 무도회에 가 드레스를 입어도 영애들이 놀란 눈으로 보기 일쑤다. 춤도 추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원하는 건 배우지 못할 거란 말이다.”

그녀는 내가 넌지시 묻는 말에서 핵심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내 얼굴에서, 말투에서 티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정말 눈치 빠른 사람들만 있다니까.

아니면, 모두 눈치가 빨라져야만 하는 환경에서 자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레오나는 고갯짓으로 자신의 팔뚝을 가리켰다.

확실히 이곳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를 입는다면 그녀의 몸매가 부각되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여자로서 근육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긴 시간 구슬땀을 흘린 노력의 결과인 것을 알아서, 레오나와 더 친해지고 싶은 건데요.”

본래 보통과 다른 사람들은 시선을 끈다. 레오나도 비슷한 경우다.

“그리고 그런 쪽으로 보면 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탑에서 왕자님을 모시던 하녀가 귀족의 지위를 받는 데 반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하녀였다고?”

“그렇게 안 보이나요? 그럼 반쯤 성공한 건데.”

레오나가 놀란 듯 묻자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사인 하녀는 드물지.”

“그러니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세요? 저는 레오나 님을 좀 더 알아가고 싶은데.”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처음 네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는 건 기억하나?”

뭐 그정도야.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난 죽지 않았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멋있었는데요.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

“내가 바로 기사단을 배신한 것도?”

“배신할 만한 기사단이긴 했잖아요. 왕도 썩었는데.”

바로 나오는 로스투라투의 험담에 레오나가 나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단을 한번 배신하면, 신뢰를 깨는 것이나 다름없어. 새로 즉위하는 왕이 나를 믿을 것 같나?”

레오나가 코웃음을 쳤다. 로스투라투의 밑에 있던 기사단을 알버트가 받아들일 리 없다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알버트를 겪어본 적 없으니까. 알버트가 어떤 성정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 그가 탑에 갇혔으니까.

“네.”

하지만 난 그를 알기에, 더 당당히 답할 수 있었다.

“왕자님은 제가 아는 누구보다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거든요.”

나는 솔직히 답했다. 이건 콩깍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알버트는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울어줄 줄 알았고 분노를 억누른 채 상황에 맞춰 움직일 줄 알았다.

탑을 둘러싼 모두를 죽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설득시킬 수는 없어.”

“전 지극히 객관적인데요.”

레오나는 픽 웃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후 숨을 내쉰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나를 마주하며 속삭였다.

“생각해 보지.”

그 말이면 충분했다. 지금 바로 레오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말에 알았다고 답을 하려던 때였다.

“콜록….”

“…여기가 어딥니까?”

레오나에게 안겨 있던 마법사들이 일어났다.

“아, 일어나셨어요?”

나는 그들에게 현재 상황을 찬찬히 설명했다. 감옥에 갇힌 둘을 내가 구하러 왔고, 위에서 기사단과 리암의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고.

남자 마법사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는 보통 어릴 때 발현하는데 처음 뵙습니다.”

“하하, 제가 특이한 경우인가 봐요.”

나는 그들의 말을 가볍게 넘기며 내게 마법을 걸어달라 했다.

위에 올라갔을 때 우리의 존재가 바로 들키는 것보다 하이드 마법을 걸어 습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말에 동의한 마법사는 나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다. 레오나는 마법을 사양했다.

“내 배신에 대해 알게 해드려야지.”

자신이 기사단을 버렸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레오나의 어깨에서 내려온 이들이 걷기 시작하자 레오나의 발걸음은 배로 빨라졌다.

그녀는 여전히 숨도 가빠지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다른 마법사들은 마법을 써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위에 가서 할 일에 대한 의논을 마친 우리는 이윽고 계단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피떡이 되어 벽에 몰아붙여진 빨간 머리 남자를 발견했다. 리암과 검을 맞댄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리암도 반쯤 벗겨진 갑옷 사이로 보이는 어깨에 상처를 입은 흔적이 보였다.

레오나를 발견한 빨간 머리 남자는 고개를 치켜올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레오나! 이쪽이다! 도움이 필요해!”

물론 레오나는 그를 보며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덩달아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싫습니다, 단장님!”

“…뭐?”

“더 이상 단장님 얼굴 보고 못 살겠습니다!”

“…레오나 블레이크, 지금 네-”

“상대가 나인 것을 잊은 모양이군.”

리암의 검이 다시 움직이자 단장이라 불린 남자는 황급히 싸움에 임했다.

“레오나 블레이크?”

저 멀리서 싸우고 있던 슈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달려왔다. 슈버트는 레오나가 싸우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한 듯 보였다.

레오나는 슈버트를 보고 결연히 말했다.

“네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슈버트 남작.”

…아무래도 슈버트는 기사단에 머무르며 그녀를 회유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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