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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4화 (74/156)

74화.

로스투라투의 최후는 생각보다 허무했다. 알버트는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새삼스레 느꼈다.

그에게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며 협박과 폭행을 일삼던 남자는, 이렇게 작았다.

자신이 가문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들으며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잘되었다 웃던 남자는 사지에 느껴지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그의 발을 잡고 빌었다.

알버트는 그에게 고통을 주었다. 마법을 써가며 그의 신체 일부를 되살렸다. 바로 죽이는 건 너무 관대한 처사였다.

드디어, 로스투라투 그레이가 죽었다.

알버트는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덤덤히 닦아냈다. 처참히 죽은 남자의 모습은 왕보다는 거지에 가까웠다.

평소 입던 옷과 지위가 모두 사라진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우, 이런 사람 때문에 내가 복수심을 불태워야 했던가. 겨우 이런 이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스러져야 했는가.

알버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땅에 묻힌 이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찾아왔다.

지울 수 없는 기억은 그의 목을 죄는 죄책감에 가까웠다.

죄도 없이 죽어 나갔던 사람들을 떠올리자 기분이 저조해졌다.

복수는 그들을 봐서라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난 후의 허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알버트는 느릿하게 걸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로제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 허망감도 그녀가 괜찮다 말 한마디만 해준다면, 평소처럼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면 메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몸에 피가 묻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그런 인간의 피가 닿지 않길 원하는 것과 별개로, 로제가 그를 무서워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탑 가까이 도착한 알버트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모두 계획대로였다.

로제가 마법을 거는 모습을 본 사람이 최소 수백이다.

이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그와 썼던 계약서를 들이민다면 아무리 그녀의 출신에 불만을 가지는 귀족들이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

“저하, 돌아오셨군요!”

알버트를 발견한 메르시가 바삐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으로 보아 병사들의 머릿속에 박힌 환상은 완벽할 것으로 보였다.

모두의 머릿속에는 로스투라투가 죽기 전, 자신의 죄를 실토하는 모습이 생생히 재현되고 있었다.

환상으로 추가적인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는 메르시의 특기였다.

자신의 아버지였던 마탑주가 탐욕스럽게 변해가는 것을 견디다 못해 시작된 환상은 그녀의 특화 마법이 되었다.

그런데 메르시의 옆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로제는?”

“…궁으로 가셨습니다.”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팔짱을 낀 무표정의 얼굴은 지금이라도 메르시를 죽일 듯한 모양새였다.

알버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궁은 왜.”

메르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반란군 쪽에 아주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제가 이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직접 가겠다고 하셨어요.”

“마법사가 필요하다면, 나를 부를 수 있지 않았느냐.”

“…아티어스 양께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꼭 직접 가고 싶다고.”

메르시는 로제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버트를 본 세월은 꽤 길었다.

자신이 마탑주가 되기 전, 아버지와 궁을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얼굴은 항상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눈부신 겉모습과 다르게 그 속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아는 것은 금방이었다.

로스투라투는 그녀의 아버지였던 마탑주와 같이 작당해 알버트를 고립시키고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완전히 모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너무 무서웠던 것뿐이다.

자신을 상냥히 대해줬던 아버지가 정말 자신을 외면하게 될까 봐. 그 두려움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알버트의 복수가 완벽했으면 했다.

로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들으면 알버트가 분노할 것을 알았지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방어 마법과 몸을 숨기는 마법을 이중으로 걸어드렸으니 괜찮으실 거예요. 구속구를 풀어야 했습니다.”

알버트는 깊은 숨을 내쉰 후 메르시 앞에 섰다. 그가 메르시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녀를 보냈는지는 알겠다만 앞으로 그럴 필요 없다.”

“…아무리 저하라도 제 생각을 다 읽으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책감, 이라고 생각한다만.”

메르시의 몸이 움찔했다. 알버트는 항상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빨랐다. 앞에서 뭔가 숨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내색을 하지 않기에,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메르시는 주먹을 꾹 쥐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어요.”

드물게 웃음기가 남지 않은 얼굴에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소녀의 잔재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높이 떠오른 해는 찬란하게 반짝였다.

알버트의 회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마치 은발처럼 빛났다. 알버트는 덤덤히 말했다.

“그것은 너를 향한 학대이기도 했으니까.”

그것은 메르시가 생애 들어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위로였다. 알버트는 메르시를 지나쳐 자리에 섰다.

“이번에는 넘어가 주마. 하지만 다음에도 로제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그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멍하니 서 있던 메르시에게 알버트가 인사를 건넸다.

“일이 끝나면 궁으로 오거라. 탑의 문은 잠가두고.”

내 공간에 다른 이들이 드나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알버트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법진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대체 한계가 있긴 한 건지.’

메르시는 알버트가 사라진 곳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알버트의 마력이 드래곤의 힘과 맞먹는 경지까지 이를 것 같았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지만 알버트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마법사를 떠나 인간이 아닌 초월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

나와 하양이는 아주 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속 밑으로, 밑으로 향했다.

점점 작아지는 길에 숨이 막혔다. 하양이는 날 다독이듯 옆에서 함께 걸어줬다.

계속 걸으니 끝이 보였다.

“다 왔구나.”

“으응….”

아까 전보다 훨씬 습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 도착했다.

정말 죄질이 나쁜 사람들만 가둘 것 같은 감옥 안에는 이끼와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사람의 얼굴선만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감옥 창살 사이로 기절한 사람이 둘 보였다.

저기구나.

감옥 안에 갇힌 이들에게 걸어가려던 나는 목에 닫는 서늘한 감촉에 흠칫했다.

“누구냐.”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사람을 놔두다니, 정말 철두철미하군. 다만 나를 어떻게 봤는지는 의문이었다.

“마법사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

“숨을 생각은 버려. 이곳에서 몸을 숨기는 마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마법을 쓸 수 없는 공간이야.”

…그러면 이곳에서 마법을 풀 수 없다는 건데.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상대는 아직 하양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양이가 워낙 소리 없이 걷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검은 고양이라 어둠 속에선 잘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하양이에게 부탁했다.

“하양아, 이 사람의 다리를 물어!”

하양이의 이는 꽤 날카로우니 이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있겠지.

“알았어!”

힘차게 대답한 하양이의 목소리와 함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악!”

잠시 후 여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여자의 목에 들이댔다.

“…제가 이긴 것 같은데.”

“동물을 데리고 있었나.”

여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양이를 발견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가 무는 게 이렇게 아플 리 없는데?”

중얼거리던 여자는 이내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내가 목에 들이댄 검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오히려 여자가 움직이다 검 끝에 찔려 피가 날까 내가 조마조마했다.

황당했다.

“저기, 제가 당신의 목을 벨 수도 있다는 건 아시나요?”

“몰라, 마음대로 해. 이딴 기사단은 망해도 싸.”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여자가 내게 열쇠를 던졌다.

“그걸로 열면 돼.”

“…아까 전까지 제 목에 칼을 들이밀던 사람이 맞나요? 혹 마법에 걸린 건 아니신지.”

“기사단으로서 할 일을 하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차라리 이 기사단이 망하게 돕는 게 더 성미에 맞겠다 싶어서.”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로스투라투의 썩은 정치 아래 제대로 된 기사단이 존재했을 리 만무하다.

“전투도 못 나가게 하면서, 이곳을 지키는 게 대단한 임무인 양 으스대는 꼴이라니.”

짓씹듯 말하는 목소리에 고통이 묻어났다. 여자는 그 모든 것에 지친 듯 보였다.

바닥에 드러누운 여자는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질감이 들었다.

아까 전 위에서 봤던 기사들의 대부분은 남자였다. 그곳에서 혼자 여자로서 살아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얼른 안 구하고 뭐 해? 저 마법사들 데려가려고 온 거 아닌가?”

나는 대답 대신 여자 가까이 섰다. 어차피 혼자 데리고 갈 수도 없다.

“여기서 못 풀면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이왕 망하는 거 확실하게 망하게.”

“…확실하게 망하게? 으하하하! 그렇지. 일은 확실하게 해야지.”

여자는 내 말에 박장대소하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까는 긴장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몸집이 웬만한 남자보다 컸다.

“열쇠 줘.”

나는 그녀의 손에 얌전히 열쇠를 건넸다.

여자가 감옥 문을 열었다. 그녀는 양쪽 어깨에 마법사를 한 명씩 들쳐 멨다. 무거울 법한데도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그럼 가볼까.”

나는 그녀의 힘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계단을 먼저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모습에 힘든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앞서가던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앞으로 검으로 위협은 하지 마, 마법사님.”

“네?”

“같은 검을 다루는 사람이면 보이거든. 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내 협박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도 수긍하는 바였다.

“그쵸, 모두 기사님께서 마음을 바꿔주신 덕인걸요. 안 그랬으면 죽었을지도.”

“…솔직하네.”

내 대답에 그녀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나쁘지 않아, 그 태도.”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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