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왕자님께서는 항상 일을 혼자서 해결하려 하시네요.”
“그러시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
내 말에 리암이 처음으로 동조했다. 같은 상사에 대해 이야기하니 직장 동료를 만난 기분이었다.
“평생 혼자 짐을 짊어지고 살아오셨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둘 수는 없는 거잖아요.”
리암의 말에 동의했지만, 평생 알버트가 그렇게 살아가는 건 외로울 것이다. 나는 그의 삶이 더 행복하길 바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알버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거다. 아니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잖아.
여태 이 문제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이유는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자를 바꾸는 방법은 어디 나와 있나요? 책에서 읽은 적은 없는데….”
“그런 건 알려져 있지 않아. 애초에 그렇게 되면 악용할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드래곤과의 계약이 기피되는 이유는 진정한 계약자가 되기 전까지의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존재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이다. 납득이 갔다.
하지만 알버트는 방법을 알고 있다.
“드래곤의 무덤에 다녀오신다고 하더군.”
알버트가 계약자가 되는 건 막고 싶은 모양인지, 리암은 내게 정보를 술술 말해줬다.
이렇게 친절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분명 알버트를 위한 거겠지.
둘은 어떻게 만났던 걸까.
“드래곤의 무덤도 처음 들어보는데… 하양이한테 물어봐야겠네요.”
우선 다행인 건 내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있다는 거다.
알버트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 비는 시간 사이에 하양이와 이 ‘드래곤의 무덤’이라는 곳에 다녀오고 마법도 더 열심히 배워야겠다.
“공작님. 저 내보내실 때 마법사도 한 명 붙여주실 수 있나요?”
마법을 독학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알버트는 너무 천재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했다.
내게는 다른 선생님이 필요했다. 탑에서 나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난 선생님에게 줄 돈은 있는 건물주라고!
리암은 내 속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통로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다 왔군.”
끼이익. 그가 문을 열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끝에 있는 문을 리암이 힘껏 열었다.
신선한 공기와 함께 안과 대조되는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에서 나왔다.
나와 리암의 뒤를 따라 슈버트와 하양이, 그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정원의 병사들을 기절시켜라.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도록.”
정원은 여러 꽃으로 장식되어 아름다웠지만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리암의 병사들은 그 속에서도 손쉽게 길을 찾아 로스투라투의 끄나풀들을 기절시켰다.
너무 쉽게 당하는데, 이 사람들이 정말 왕의 기사들 맞아?
나는 그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다 달려갔다. 어느새 근처의 기사들을 모두 제압한 일행은 분수대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양이를 품에 안은 슈버트의 모습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제 피하지 않으시네요?”
내가 옆에 다가서며 묻자 슈버트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귀여운 걸 어떡해? 드래곤인 걸 알아도 귀여운걸.”
그 말을 하는 슈버트도 귀여웠다. 존재하지도 않는 남동생이 생긴 기분이다. 작게 웃던 나는 아까 리암의 말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하양아, 드래곤의 무덤이라는 곳 알아?”
“…음. 무덤은 모르겠지마안…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닐까…?”
무덤인데…? 내 말에 하양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애들도 많아서어… 그 정도로 드래곤이 모여 있는 곳은 없으니까아….”
그것참 살벌하기 그지없는 곳이군.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버트가 말하는 무덤은 그곳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거기가 어딘지 기억해?”
“으응….”
“나중에 거기 한번 가보자.”
하양이는 내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설명하려던 순간, 분수대에서 졸졸 흐르던 물이 뚝 그쳤다.
분수대가 자동으로 옆으로 움직였고 그 안에서 감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나왔다.
“입어라.”
들어가기 전, 리암이 내게 병사에게서 뺏은 투구와 갑옷을 건넸다. 나는 슈버트의 도움을 받아 겨우 갑옷을 입는 데 성공했다.
나보다 훨씬 큰 체격이라 헐렁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이 그래도 순조롭네요.”
“…넌 어떻게 그렇게 덤덤할 수 있지? 불안하지 않나? 우리는 적진의 한가운데 있다.”
“하지만 이길 거고, 왕자님은 왕이 되실 거니까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 나는 리암의 물음에 당연하게 답했다.
일이 어긋나 조바심을 내는 리암과 다르게 나는 차분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책의 가장 큰 줄기이자 초반 내용의 핵심이었던 알버트의 반란이 실패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로스투라투는 이미 알버트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물론 알버트를 믿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는 다시 지하 통로로 이동했다. 길은 지하 감옥의 바닥과 이어졌다.
리암이 문을 열기 전 숨죽여 소리를 들었다. 밖은 잠잠했다.
방심하고 있는 건가? 보초가 한 명도 없는 건 이상한데.
“모두 무장하고 준비해.”
리암의 말에 모두 투구를 올려 쓰고 싸울 준비를 했다. 결연한 눈빛을 주고받은 후 리암이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통로를 나온 우리는 감옥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아까 전 조무래기들과는 달리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의 남자가 리암과 눈을 마주치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어이 저주받은 놈에게 왕좌를 넘기고 싶나, 공작? 가족이 전부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놈은 왕자가 아니야!”
“뚫린 게 입이라고 말 잘하네.”
슈버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나섰다. 알버트를 모욕하는 말에 분노한 모양이었다.
슈버트가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며 남자가 껄껄 웃었다.
“하하, 슈버트 남작.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낮추며 기사단에 들어왔을까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
정말….
불쌍하기 그지없군.
나는 화내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알버트가 와서 다 쓸어버리면 그제야 자신들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게 될 우매한 중생들인 것을… 사이다를 위해 희생될 엑스트라일 뿐이다.
“쳐라!”
남자의 우렁찬 말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쪽수로는 우리가 완전히 밀렸지만 공간이 좁은 데다 우리는 통로에서 나와 벽을 등지고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빼곡하게 들어찬 기사들 사이로 틈이 좀 있었다. 서로 싸우느라 진영이 흐트러진 탓이었다.
채앵! 검이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보지는 못했다.
내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메르시의 마법이 확실하게 먹히고 있는 것이다.
마법을 쓰면 내 존재가 드러난다.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마법사의 존재를 경계하게 되겠지. 감옥 안에 들어가는 게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나는 내 존재를 숨겨야 했다.
“여기 웬 고양이가….”
싸우던 기사들의 시선이 저절로 하양이를 향했다. 지금 하양이는 밑에 사뿐히 내려와 걷고 있는 상태였다.
하양이는 그들을 멀뚱멀뚱 보았다.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양아, 네 몸은 약하다고 하지 않았어?”
“로제가 괜찮으면 괜찮아. 계약했으니까….”
…영혼의 동반자라니. 이것 참 설레면서도 소름 돋는다. 나도 목숨 간수 잘해야겠다. 괜히 하양이 죽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 느려….”
하양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이 느려?”
“으응… 다 피할 수 있어.”
하양이는 의외로 단호했다. 평소 거북이 같은 하양이도 민첩할 때는 민첩할 수 있구나.
그런데 계약자인 나는 왜 하양이의 시각까지 공유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하양이가 성체가 된 이후에 가능한 일이려나?
나는 몸을 부르르 떨다 다시 집중했다. 겹겹이 서 있는 기사들 뒤로 통로가 하나 더 보였다.
앞을 가로막은 기사 두 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곳이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저 안에 가둬둔 모양이었다.
우선 저 안을 파고들어 전기 마법을 이용해 저들을 밀어낸 후, 곧바로 감옥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 마법사들에게 해제 마법을 건다…. 순식간에 해내야 할 마법만 3개군.
좋아. 할 수 있어.
이래 봬도 순발력은 최고다. 마법을 위한 마법진은 확실히 외웠다. 암기력도 무시할 것이 못 된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검까지 챙기도록 할까.
때마침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기사가 보였다.
슈버트가 치명상을 입혔는지 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다. 슈버트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메르시가 걸어준 마법이 있긴 하지만 살벌하게 싸우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는 쓰러진 기사의 손에서 검을 뺏어 들었다. 으으 신음을 내던 기사는 자신의 검이 사라지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이게 어디 갔지?”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한 손에 검을 들고 사람들 속에 숨어들었다. 내 생각보다 검이 훨씬 무거워서 놀랐다.
자신이 싸우는 상대에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구석에서 누가 움직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살살 피하며 나아갔다.
빨간 머리의 남자는 맨 뒤에서 리암과 싸우면서 일사불란하게 명을 내리고 있었다. 그가 아무래도 기사단장인 듯했다.
칼이 허공에서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검무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기사단장의 다소 투박하고 거친 공격을 리암은 우아하게 받아냈다. 펜싱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기회를 엿보다 기사단장의 정신이 팔린 틈을 타 통로를 막고 있는 이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포겟(Forget).”
내가 맨 처음으로 배웠고, 가장 잘 알고 있는 마법. 전기충격을 주는 것보다 지금 상황을 유연하게 넘어가게 해줄 방법.
지팡이를 휘두르며 머릿속에 마법진을 외웠다. 지금 이 사람들이 여기 서 있는 이유를 잊어버리길 바랐다.
기억을 잃게 하는 마법은 사람마다 먹히는 정도가 달랐다. 하지만 누가 걸든 평생 기억을 잊게 할 순 없었다.
물론 이 마법을 쓰는 사람의 마력에 따라 영향을 미치는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였다.
내 마법에 기사들의 눈이 깜빡였다. 초점이 흐릿해진 눈을 보며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어?”
기사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계단을 잽싸게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