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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72화 (72/156)

72화.

“하이드.”

메르시의 지팡이가 휙 움직였다. 저번에 그녀와 함께 숲속을 걸을 때도 걸어줬던 마법이다.

내 몸 주위에 뭔가 일렁였다. 하이드 마법이 제대로 걸렸다는 표시였다.

“이제 리암 공작님과 슈버트, 그리고 마법사들한테만 보일 거예요.”

“선택적 투명 망토네요.”

“망토는 아니지만, 그렇죠…?”

내 비유에 메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명 망토라니, 재미있는 가설이긴 하네요. 마법사들이 쓸 리는 없겠지만. 나중에 개발해 전투에 사용하면….”

마탑 주인 아니랄까 봐, 작은 포인트까지 놓치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어린 나이에 괜히 마탑주가 된 것이 아니다.

“메르시의 마법이 더 대단해요. 환상 마법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 말이에요.”

“제 특성 마법인걸요. 특화 마법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태어나요. 나중에 언니도 발현될 거예요.”

“…특성 마법이라.”

“자신의 소망과 맞닿아 있다고도 하죠. 언니와 어울리는 마법일 텐데, 무얼지 궁금하네요.”

메르시의 설명은 날 다소 당황시켰다. 소망과 맞닿아 있다면, 메르시도 마찬가지잖아.

그녀는 어떤 소망을 가졌길래 이렇게 강력한 환상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메르시의 어두운 이면이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그걸 알 정도로 메르시와 가까워지는 날이 올까?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나는 메르시의 분위기가 좋았다.

나이와 상관없이 강한 의지가 보이는 눈, 시원하게 웃는 모습이.

“그럼 이제 순간이동 해드릴게요.”

로제가 나를 마법진 안으로 데려갔다. 하양이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탔고, 나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저하께서 이 사실을 알면 절 반쯤 죽이실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언니가 도와주셔야 해요. 저도 저하의 복수가 완벽했으면 했다고요.”

“당연하죠.”

메르시의 걱정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시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지팡이를 휘둘렀다.

한순간 눈앞이 뒤바뀌었다.

똑. 똑. 좁은 통로 틈새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가면 가득 찰 통로는 으스스했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벽에 걸린 등이 주위를 밝혀주고 있었다.

나란히 서 있는 리암과 슈버트가 보였다. 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슈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암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무장한 모습은 처음이라서 새로웠다.

슈버트의 갑옷은 리암의 것보다 훨씬 얇았다. 그의 것보다 기동성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그리고 남작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상황이 나쁠수록 예의는 지켜져야 하는 법이니까.

못 믿겠다는 듯 나를 보던 슈버트가 얼굴에 흐른 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물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리고 머리에 그건, 그 드래곤 아냐?”

“맞아요. 하양이에요. 그리고 이곳에는 메르시 님 대신으로 구속구를 풀어주러 왔어요. 이제 마법사라서요.”

“…아, 그렇지. 계약을 했다고 했었지.”

슈버트가 힐끔 하양이를 봤다. 하양이가 몸을 움직이며 그에게 인사하는 것이 느껴졌다.

슈버트가 몸을 움찔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파충류를 싫어한다고 했었던가. 하양이가 슈버트의 반응에 시무룩해하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전달된 것이다.

“네, 마법사로서 왕자님의 반란을 성심성의껏 돕기 위해 왔습니다.”

리암이 나를 관찰하듯 뚫어져라 바라보다 물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초짜 마법사가 아니야. 메르시는 어째서 직접 오지 못한 건가.”

“아직 왕자님께서 로스투라투와의 전투에서 돌아오지 않으셨거든요. 일생일대의 복수를 하고 계시는데 방해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초짜여도 할 일은 제대로 할 줄 압니다.”

나는 리암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그의 차가운 태도에 미약하게 반항했다.

첫 마법도 완벽히 성공했고, 메르시도 내가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생각해서 보내준 거라고.

극한의 상황에 닥치면 사람의 기억력은 좋아진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하나의 임무. 구속구를 풀어주기 위한 언락 마법진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말에 신빙성이 있었던 것일까, 리암의 눈매가 실이 풀리듯 느슨해졌다.

“…저하를 배려하는 행동이었군.”

“왕자님께서 그동안 충분히 고생하셨으니까요.”

내 말에 슈버트가 오오, 소리를 냈다.

“…하녀지만 생각은 제대로 박혀 있구나, 항상.”

그가 나를 칭찬했다. 선심 쓴 듯한 칭찬이지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하녀면 생각 제대로 박혀 있으면 안 돼? 이곳이 계급 사회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구슬릴 수 있는 건 화가 아니라 적당한 비위 맞추기겠지.

알버트도 참아냈는데 슈버트 하나 못 참을까.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헤헤 웃었다.

“별말씀을요. 그럼 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리암과 슈버트가 가리고 있는 통로 뒤쪽을 살피다 갸웃거렸다.

“그런데 구속구를 풀어드릴 마법사분들은 어디 계시나요?”

내 말에 리암이 침묵했다. 뭐지?

“…여기 없다.”

“네?”

“메르시에게 전보를 보내고 난 후, 통로를 들켰거든. 우리야 겨우 도망쳤지만… 민첩성이 떨어지는 마법사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들은 소식에 당황스러웠지만 이해는 갔다.

마법사는 마법을 다루는 사람이지, 리암이나 슈버트처럼 몸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충분한 사유였다.

마법사들을 통해 메르시에게 전보를 보냈을 테니, 그들과 헤어진 후에 메르시에게 상황을 보고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여기에서 메르시를 불러 생각을 물어보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송신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상황을 살펴야 한다.

나는 다음 문제로 화제를 넘겼다.

“마법사들을 바로 죽이려 들까요?”

“아니, 그들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라 생각한다. 둘 다 강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이니까.”

“최대한 빨리 빼내야 한단 얘기군요.”

나는 자리에 선 채로 고민에 잠겼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때 슈버트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혹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나는 슈버트를 한껏 띄워줄 요량으로 힘차게 물었다. 슈버트는 고개를 가만히 가로젓더니 중얼거렸다.

“아, 참고로 도망치면서 통로를 들켰어. 기사단 사람들이 우리 뒤를 쫓는 중이야.”

그런데 잠시만, 뭐라고? 그의 말뜻을 되새기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럼 지금 실시간 추격전을 찍고 있다는 말씀…?”

“그렇지. 자, 그럼 움직여 볼까.”

슈버트가 기지개를 켜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경악한 나는 그들의 뒤를 졸졸 따랐다.

이야기는 움직이며 해야 할 것 같았다.

길은 미로처럼 길었다.

갈래길이 무척 많은데 통로는 정말 일관적인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가 여길 지났는지, 지나지 않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사단이 따라 들어왔는데 못 찾을 법도 했다.

“저희는 어디로 나가나요?”

“궁의 정원. 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대와 연결되는 다른 비밀 통로가 있다. 그곳은 지하 감옥과 연결되지. 우리는 그곳으로 갈 거다.”

리암은 손에 쥔 지도를 살피며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걷는 이들 옆에서 내가 보폭을 맞출 수 있는 건 마법 덕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했던 간단한 마법진 중 달리기가 있었던 덕이다.

마법이 아니었으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다.

좁은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모두 리암과 슈버트 뒤를 군말 없이 따랐다.

눈빛이 매서운 게 아까 전 탑 앞에 있었던 이들과 확실히 달랐다.

불을 밝히는 마법도 쓸 수 있었지만 나는 마력을 아끼기로 했다.

언제 기사들에게 발각돼 공격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럴 때 힘을 써야 했다.

일이 잘못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리암과 슈버트는 침착하게 움직였고, 철저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팠다. 하양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나는 계속 뛰며 하양이를 내 머리 위에서 내렸다.

“하양아,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왜 슈버트가 인사도 안 받지이….”

심각한 목소리로 묻는 모습을 보니 성에서 슈버트와 재미있게 놀던 하양이가 생각났다.

나는 걸음을 부지런히 놀려 앞서가던 슈버트 옆에 섰다.

“남작님. 죄송하지만… 잠시 하양이 좀 안아주세요.”

“아니, 난 파충류 싫어- 으아아악!”

내가 하양이를 품에 안기자 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하양이를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슈버트 님께는 드래곤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하양이가 갑자기 바뀐 태도에 적응 못 하고 서운해하고 있는데 봐주세요. 하양이는 달라진 게 없잖아요.”

그렇게 하양이랑 사이가 좋았는데 이대로 둘이 멀어지게 두기는 아까웠다.

나 다음으로 하양이가 마음을 연 사람 같으니까.

이것도 하양이에게 세상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하양이의 내면도 봐주세요. 같이 놀 때 즐거우셨잖아요”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 슈버트의 품에 안긴 하양이가 정말 파충류 같은 모습이었더라면 이렇게 둘을 붙여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슈버트의 눈에 하양이는 귀여운 고양이일 뿐이었다.

내 말에 슈버트가 흠칫했다. 하양이가 고개를 쭈욱 들어 올려 슈버트를 열심히 바라보았다.

슈버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후 내쉬더니 하양이를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내가 이러고 갈게.”

나는 둘의 사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 이쪽과 용건은 끝났다.

나는 하양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뒤로 처진 슈버트를 지나 리암 옆으로 갔다.

지도를 보며 달리던 그가 덤덤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왕자님에 관해 여쭐 것이 있어서요.”

하양이와 이야기하던 중, 리암을 만나며 묻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통로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지금이 적기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알버트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째서 마법을 가르치는 데는 소극적인지. 탑 안에서 나는 마법을 익히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평소 그답지 않게 최소의 노력만 보여줬다.

그가 그럴 수 있을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왕자님은 드래곤의 계약자를 바꾸는 방법을 알고 계신가요?”

리암이 침묵했다. 시선을 서서히 들어 올린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응시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마치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내게 확신을 주었다.

알버트는 나 대신 하양이의 계약자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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