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무래도 내가 직접 메르시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메르시, 저 아직 이해가 안 되었는데요. 대체 제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거죠?”
“왕자님께서 설명 안 해주셨어요? 쪽지 주고 가신다고 하던데.”
메르시의 말에 그제야 알버트가 나가기 전 이야기하며 손에 뭔가 쥐여줬던 게 생각났다.
…그게 지금을 위한 거였어?
나는 머쓱한 얼굴로 알버트가 곱게 접어둔 편지지를 열었다. 안에는 마법진과 함께 영어 철자로 Electricity(전기)라고 적혀 있었다.
묘하게 낯이 익은 마법진이어서 생각해 보니, 내가 자주 연습하던 포겟(forget)과 닮아 있었다.
내가 제일 잘 그리는 마법진에 맞춰서 이런 자리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알버트는 다 계획이 있구나.
나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은 좀 섭섭하지만… 내가 큰일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릴까 감춘 것으로 보였다.
“마법 지팡이는 있으시죠?”
“네.”
나는 다른 손에 지팡이를 쥐었다. 알버트의 손을 거쳐 다시 내게로 돌아온 지팡이.
정말 마법을 쓰게 되다니. 로제에 빙의한 후에도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어서 그런지 긴장이 되었다.
메르시는 한껏 굳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언니가 할 일은 간단해요. 얼어 있는 사람들 쪽으로 전기를 쏘시면 돼요.”
메르시는 내 뒤로 오더니 지팡이를 같이 쥐었다.
“마법을 거의 처음 쓰시는 거니, 미리 그려놓는 게 좋겠어요.”
그녀의 도움을 받아 나는 땅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 유유히 움직였다.
“…제가 사람들 모두를 감전시키면 어쩌죠?”
알버트가 이들을 모두 죽일 정도로 잔인한 성정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필요할 때만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눈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온몸이 꽁꽁 언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다.
그래서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안심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메르시에게 물었다. 메르시가 하하 웃었다.
“하하, 왕자님께서 언니가 살인을 하길 바라셨을 리가 있나요. 그만큼 섬세히 설정해 두셨으니까 걱정 마세요.”
“…….”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느려졌다. 맞았구나, 내 생각이.
“왕자님은 너그러우신 분이거든요. 매번 배신당해도, 사람을 돌볼 줄 아시죠.”
메르시가 그들을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치 그들이 듣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메르시의 말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아무래도 그녀가 우리 목소리를 증폭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버트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내고는 맞장구를 쳤다.
“왕자님이야말로 진정한 군주시죠. 제가 괜히 왕자님을 모시러 탑에 같이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하는 김에 내 행적도 포장했다. 알버트가 그러라고 했으므로 이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나중에 내 과거의 행적이 알버트의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 잘 먹혀든 모양이네.”
“네?”
희미한 목소리는 생각처럼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되묻자 메르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자 그러면, 마법을 시전할까요?”
“로제, 힘내애!”
메르시 옆에서 하양이도 내게 격려를 건넸다.
그래, 내가 하양이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나는 사람들을 보며 심호흡을 한 후 지팡이를 휘둘렀다.
“일렉트리시티.”
파직, 하는 소리와 지팡이 끝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얼어 있는 사람들 쪽으로 날아갔다.
선명한 노란빛은 마치 태양에서 떼어온 것처럼 선명하게 아름다웠다.
작은 빛이 얼음덩이에 닿는 순간 햇빛을 보게 된 눈사람처럼 얼음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조금씩 얼음이 녹아내리며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마침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금 막 올라오는 햇빛에 사람들 사이의 얼음과 물방울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마치 전설 속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마치 명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 반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얼음 속에서 나온 사람들은 나와 함께 이 광경을 홀린 듯 쳐다보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털썩 누웠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다. 로스투라투가 데려온 사람들은 공격은커녕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었다.
잠은 최고의 적이었으니까.
이조차도 알버트의 설계일 것이 분명했다. 알버트는 사람 하나 죽이지 않고 반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로스투라투만 딱 데리고 갔다.
내 걱정은 참으로 쓸데없는 것이었다. 십만의 군대가 왔어도 같은 결과였을 것 같다.
알버트에게 덤비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다. 그가 방심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언제쯤 돌아오려나….”
나는 주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알버트는 보이지 않았다.
로스투라투와 전투가 길어지는 모양이었다. 전투가 아니라 고문에 가까울 것 같긴 했다.
알버트가 로스투라투를 일방적으로 패고 있을 테니까.
여태 참아야 했던 시간에 대한 복수는 제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알버트의 완전한 복수를 빌며 나는 사람들을 조심스레 살폈다. 밖에서 자면 입 돌아갈 텐데, 이대로 둬도 괜찮으려나.
그렇다고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로제에에!”
하양이가 내 품으로 해맑게 달려왔다. 나는 하양이를 꼭 안아주었다. 하양이가 눈을 반짝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멋있었어….”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 그런데 방금 마법의 대부분은 왕자님 설계였어.”
내가 겨우 전기 마법 하나 썼다고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말에 하양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로제도 힘세!”
울컥한 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하양이 앞에서 알버트를 칭찬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버트가 그렇게 싫어?”
“…나를 싫어하니까.”
“그건 왕자님께서 잘못하셨네. 이렇게 귀여운 하양이를!”
내 능청스러운 말에 하양이가 배시시 웃었다. 하양이가 웃는 모습은 언제 봐도 좋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메르시가 심각한 얼굴로 뭔가 읽고 있는 걸 발견했다.
“메르시?”
“문제가 생겼어요.”
“네?”
“…저희 편 마법사들에게 마법 구속구를 단 모양이에요.”
“풀 수 없나요?”
“구속구는 같은 마법사의 마법으로만 풀려요. 병력만 보자면 저희 쪽이 밀리니 아무래도 이걸 풀어주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메르시가 사람들을 힐끔 살피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는 마법을 쓰고 있는 상태라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요.”
“지금도요?”
“네, 제 마법은 환상이라서. 지금 사람들의 꿈속을 다루고 있어요.”
…괜히 사람들을 잠들게 한 게 아니었어? 다시 한번 놀랐다. 메르시의 힘도 놀라웠다.
“이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그게 가능해요?”
“에이, 이건 저하께 비교도 되지 않는걸요.”
내 칭찬에 기분 좋은 듯 웃던 메르시가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저하를 불러야겠어요.”
“…지금 부르기는 죄송한데.”
알버트는 오늘 로스투라투를 죽인다. 반역이 앞당겨졌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오늘은 그가 궁을 차지하고 새로운 왕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 로스투라투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부르면 바로 오겠지만, 로스투라투를 향한 그의 증오를 제대로 풀 수 없게 되는 건 싫다.
나는 탑 속에서 리암의 보고를 듣던 알버트를 떠올렸다.
자신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들으면서도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던 알버트.
나는 메르시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메르시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나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 가서 푸는 것은 어때요? 저도 마법사인데.”
“…예?”
“메르시는 여기 있어야 하고, 왕자님도 마지막 복수는 제대로 하셔야 하니까 제가 가서 구속구를 풀어줄게요. 같은 마법사만 가능하다면, 저도 가능하겠죠.”
내 말에 메르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표정이 갑자기 구겨진 것도 아니었고. 좋은 사인이었다.
나는 말을 조심히 이어갔다.
“메르시가 저를 순간이동으로 이동시켜 주면 되잖아요, 제가 가서 해야 하는 건 구속구를 푸는 마법을 날리는 거니까, 알맞은 곳으로 보내주기만 하면 돼요. 아니면 정말 위험한 곳에 있어요?”
“…아니요. 지금 잠시 지하 통로에 몸을 숨긴 중이긴 하지만.”
메르시가 얼굴을 굳혔다.
“위험해요. 언니가 다치면 전 저하 얼굴 못 봐요.”
“거기 슈버트랑 리암도 있을 거잖아요. 그들을 믿으면 되죠. 그리고 생각해 봐요, 메르시. 저하의 일생일대의 복수를 여기서 끝내게 둘 순 없잖아요. 저하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나는 살살 메르시를 꼬드겼다. 그녀가 넘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저하의 복수를, 여기서 마치게 둘 거예요?”
그 말이 메르시에게는 기폭제가 된 것 같았다. 메르시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요, 언니.”
“나도요.”
“…그런데 무슨 마법진 써야 하는지는 아세요?”
이건 마지막 시험이다. 여기에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메르시는 날 보내주지 않을 거야!
나는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총동원했다. 구속구는 푸는 거. 푸는 것을 뜻하는 영어 단어…!
“언락(unlock) 맞나요?”
“…맞아요.”
그녀가 다소 놀란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 용어는 잘 외우신 모양이네요. 제가 마법진은 한번 같이 그리면서 보여드릴게요. 지팡이가 기억하면 나중에 그리는 게 훨씬 쉬워지거든요. 가이드처럼 도와줘서.”
“마법진 말고 머릿속에 그려서 하는 건 언제 가능한가요?”
난 초보자니까 그렇다 치고, 언제쯤 그게 가능할지 궁금했다.
“사람마다 달라요. 하지만 적어도 마법진이 뇌리에 박혀야 가능한 일이에요.”
그녀는 지금도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 마법을 행하는 건 가능하다 했다.
하지만 마법의 세기가 매우 약할 거란 말을 덧붙였다.
“마법진도 그리지 않고,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행하는 건 가장 어려운 단계고요. 저하께서 괜히 유명하신 게 아니거든요.”
알버트를 찬양하는 말에, 내가 그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우선 방어 마법은 하나 걸어드릴게요.”
메르시가 자신의 지팡이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