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알버트는 탑으로 향한 채 얼어붙은 아드리안에게 다가섰다.
그의 소드가 아드리안의 턱 끝을 찌르자 아드리안의 몸을 감싼 얇은 얼음이 순식간에 녹았다. 그의 눈을 감싸고 있던 환영도 마찬가지였다. 아드리안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허억….”
알버트가 분명한 목소리로 읖조렸다.
“보십시오.”
그것은 분명 로스투라투를 향한 경고였다. 그에게 삶의 끝을 선고하는 죽음의 사자 같기도 했다.
“네 이놈!”
아드리안은 자신의 앞에서 틈을 보이는 자를 놓칠 정도의 얼간이가 아니었다. 그는 알버트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알버트는 그 검을 잽싸게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 아드리안의 검은 너무 느렸다. 전투 상대로 쳐 줄 수도 없었다. 그의 마법을 푼 이유는 하나, 로스투라투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알버트의 검이 둥그런 궤적을 그리며 아드리안의 몸을 베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로스투라투는 뒤로 물러섰다.
“이, 이게 무슨….”
로스투라투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악마 같은 놈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먹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몸은 일부러 움직이실 수 있도록 놔두었습니다.”
알버트는 로스투라투의 생각을 읽고서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붉은 빛이 그를 감쌌다. 알버트가 나른히 웃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사냥이 아닙니까.”
잔혹한 미소는 로스투라투를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 네가….”
“도망치십시오.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도망에 성공해 살아남으실 수도 있지요.”
로스투라투는 얼어버린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버트는 피가 튄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메르시의 마법은 그들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 로스투라투와 알버트의 모습은 메르시의 마법에 걸린 이들에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일 터였다.
지쳐서 헉헉거리며 멈춘 로스투라투는 덜덜 떨며 알버트를 돌아보았다.
“으, 으으….”
“사냥이 너무 빨리 끝나면 지루한 법이지 않습니까. 이것도 가르쳐 주셨지요.”
알버트의 눈이 곱게 휘었다.
“자, 다시 뛰십시오.”
알버트는 그를 격려하듯 중얼거렸다. 로스투라투는 망연자실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두 손을 잡고 싹싹 빌었다.
“사, 살려줘. 네가 왕이 될 수 있도록 해주마. 다만 목숨만 살려주거라. 제발! 네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제가 직접 이런 마법도 걸어드려야 할 줄은 몰랐는데.”
알버트가 속삭이듯 무언가 중얼거리자 로스투라투의 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그가 알버트에게 등을 돌린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얼어버린 병사들뿐이었다.
“그 낯짝을 보는 순간 바로 죽여 버리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구나.”
속눈썹을 내리깔며, 은총이라도 내리듯 중얼거린 알버트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음미하고 또 음미할 것이다. 로스투라투가 자신의 발밑에서 짓밟히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부르짖다 목이 쉴 때까지.
알버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로스투라투가 발악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별개로 그가 흔적을 남기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나중에 로제가 보면 어쩌려고.’
로제는 그런 쪽에서 또 눈치가 빨랐다.
비틀거리던 로스투라투는 여전히 달렸다. 알버트가 정해놓은 궤적을 따라, 탑에서 벗어나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알버트는 잠시 탑 쪽을 응시했다. 탑의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메르시가 자신의 명을 착실히 따르고 있었다. 로제는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로제는 자신도 마법을 쓸 수 있다 말하며 도울 수 있게 해달라 했지만, 애초에 로스투라투에게 전혀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로제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기에, 보일 생각은 없었다.
로제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알버트는 메르시에게 신호를 날렸다. 메르시에게 로제가 나오기 전에 놀라지 않도록 아드리안의 시체를 처리하라 한 것이었다.
나른히 치켜뜬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청초한 사제처럼 나긋하던 모습은 괴물로 돌변했다.
알버트는 크라바트를 풀었다. 낮은 숨을 내쉰 그는 로스투라투의 뒤를 따라 느긋이 걸었다.
승자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정말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니까요?”
“그런데 왜 창밖도 못 보게 해요?”
“그거야….”
메르시가 내 물음에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나는 메르시와 함께 방에서 알버트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저만한 병력을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잖아. 그가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잘하게 다칠 것은 분명했다. 나 때문에 반란의 시기도 앞당겨졌으니 죄책감도 있었다.
“왕자님, 제가 같이 나가 왕자님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탑 안에 들어온 메르시와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알버트에게 말했다. 이는 이번에 탑에 머무르며 마법을 열심히 배운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 안에 있거라.”
하지만 알버트는 단호했다.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 나을 테다.”
그를 돕고 싶었지만 명을 따르는 것도 중요했다.
“맞아요, 저 탑 구경도 더 하고 싶다고요.”
탑에 볼 것이 얼마나 있다고.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메르시도 알버트의 명을 따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쨌든 메르시가 옆에서 맞장구를 치니 무어라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억지는 부릴 수 없었다. 사실 그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나는 내 주제를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알버트가 밖에 혼자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렇게 강해진 것도 네 덕이고 말이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나를 보며 알버트가 오히려 격려하듯 말했다. 마법사로서 그가 이 정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내 덕이라면서.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어, 엇. 잠시만요.”
창을 들여다보며 바깥 상태를 살피던 메르시가 황급히 움직였다.
“할 일이 있어서요. 커튼 움직이지 마시고 계세요!”
메르시는 황급히 할 일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양아, 우리 진짜 탑을 나간다.”
“…나가서도 공부해야 해애….”
하양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맞아, 공부해야 한다.
“그래도 이제 음식도 원하는 거 만들어 먹고… 디저트도 사 먹고, 옷도 사 입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잖아.”
“로제 들뜬 것 같아….”
“…어떻게 들뜨지 않을 수 있겠어.”
맞다. 나는 흥분했다.
정말 나간다 생각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내 긴 감금 생활이 끝난다 생각하니 후련했다. 아무리 내가 집을 좋아한다 해도 강제적인 집순이는 힘들다. 내가 원할 때 나갈 수 있는 자유는 꼭 필요하다.
…그 전에 해내야 할 일이 있지만.
나는 알버트가 내게 하고 간 말을 떠올렸다.
“로제, 이제 네 역할이 중요하단다.”
내 손을 꼭 잡은 알버트는 자애로운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로스투라투의 뒤를 따라야 해. 네가 남은 사람들을 맡아야 한다는 소리다.”
나는 그의 충실한 하녀이자 이번 반역의 조력자로서 사람들을 항복시켜야 했다.
굳이 메르시가 아닌 내게 시키는 건, 이번에 내가 공을 세우게 만들어 나중에 공적을 치하할 때 들릴 잡음을 줄이기 위해서겠지.
그의 마음이 읽혔다. 계약보다도 알버트의 체면과 위상을 위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네 앞에 사람들을 무릎 꿇려주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알버트를 떠올린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 많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다는 걸까? 아직 마법진 생긴 것 외우기도 힘든데. 마법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었는데.
다시 신입 사원이 된 느낌이야! 끔찍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뇌하던 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
“흐….”
얼마 전 알버트가 치료해 줬던 것과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싸맨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괘, 괜찮아아? 로제? 로제?”
하양이가 옆에서 내 상태를 살폈다.
뭐지? 알버트가 고쳤는데. 다시 두통이 올 이유가 없는데?
그냥 두통인가? 피곤해서 그런가?
그때, 메르시가 내 어깨를 잡았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 나오셔도 돼요.”
메르시의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두통은 사라졌다. 나는 아직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상태를 살피는 하양이를 다독였다.
“괜찮아, 하양아. 밖에 나갈 준비를 하자.”
나는 짐가방을 부엌에 옮겨놓은 채, 메르시와 밖으로 나왔다.
“아, 망토를 걸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나오기 전 메르시가 내게 충고했다. 이곳이 리암의 성이 있는 북부도 아닌데 그런 것이 왜 필요한가 싶었지만….
“진짜 필요했네요.”
밖에 나간 나는 그녀의 말을 실감했다.
나는 얼어붙은 사람들을 응시했다. 서로 이어진 모습이 마치 한 덩이로 이루어진 조각상 같았다.
메르시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마법을 써 사람들을 기절시킬 차례예요. 저기 증인들만 좀 남겨두고.”
“…제가 이 많은 사람들을요?”
“네.”
…메르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황당해졌다.
나 알고 보니 마법 천재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