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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69화 (69/156)

69화.

로스투라투는 탑을 둘러싼 병사들 사이를 위풍당당하게 가로질렀다.

알버트를 죽일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혈색은 좋지 않았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악몽의 잔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길을 잃은 채, 매일 밤 잠이 들 때마다 꿈속의 알버트에게 목을 베였다. 잠을 자는 것이 곧 공포가 되었다.

예프넨 후작을 죽이고 알버트와 결탁할 만한 귀족들도 모조리 누명을 씌워 살해했지만 아직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알버트가 탑에 갇혀 아무것도 못하고 노예 같은 신세로 전락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알버트의 목을 베어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악몽도 오늘이 지나면 끝이다.

로스투라투는 자신이 모은 이들을 만족스레 훑었다. 목숨을 잃어도 별 의미 없는 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퍼뜨린 알버트에 대한 거짓 소문에 선동되어 온 이들은 악마를 처단한다는 사명에 목숨을 바칠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알버트가 반역을 일으킬 거란 소문 때문에 모집된 이들의 수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아직 그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촉박한 시간 때문이기도 했고, 현 상황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이번 년도에 계속되고 있는 가뭄과 올라가는 세금에 대해 불만이 늘어가고 있었다. 로스투라투는 그 모든 일을 알버트 때문이라 명명했다. 비난할 대상이 있으면 자신이 비난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알버트를 탑에 가두며 굳이 살려둔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떠안을 수 있는 좋은 미끼였다.

…자꾸 자신의 목을 조이려 들지만 않는다면.

로스투라투는 미리 준비한 고급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벨벳 소파는 이질적이었다. 알버트의 상태에 대한 보고를 차례대로 떠올리는 로스투라투의 눈이 탐욕스레 빛났다.

탑 안에 하녀와 갇혀 여러 수모를 겪으면서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신이 났다.

“탑의 마법을 풀어라.”

그가 마탑의 주인, 메르시에게 명령했다.

“예.”

메르시는 탑 전체에 걸린 마법을 풀 수 있는 보석을 꺼냈다. 현재 거의 다 참수된-로스투라투는 그들이 아픈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힘이 담긴 보석이 그녀의 지팡이에 의해 허공에 붕 떴다.

“언락(Unlock).”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보석이 산산조각 났다. 탑 주위로 웅웅거리며 소음이 퍼져 나갔다.

물에 파동이 이는 것 같은 이질적인 소리는 이윽고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로 변화했다. 그 순간, 탑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법이 풀렸다.

병사들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를 쓰고 무기를 들었다. 맨 앞에 활을 든 자들이 탑의 입구에 있는 문을 향해 활을 조준했다. 맹독을 묻힌 것이라 조금만 스쳐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자, 누가 들어가 왕자를 데리고 나올 테냐.”

로스투라투의 거만한 말에 모두 웅성거렸다. 하지만 앞에 쉬이 나서는 이는 없었다.

탑 밖에서 다른 이들과 있다면 모를까 좁은 탑 안에 들어가 알버트를 데리고 나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본 것이다. 목숨을 걸고 온 이들이지만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상대가 악마라 알려진 왕자라면 더더욱.

“전하, 제가….”

이글 기사단의 단장 아드리안이 앞으로 나섰지만 로스투라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겨우 알버트를 밖으로 내모는 데 기사단장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아드리안도 이를 예상했기에 뒤로 물러섰다. 체면상 나선 것이지 그 역시 개죽음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들어가기 딱 좋게….’

메르시는 타이밍을 잘 살폈다. 그녀가 들어가는 것이 수상해 보이면 안 됐다. 그녀는 로스투라투가 억지로 사람을 부르려던 때를 맞춰 손을 들었다.

“전하, 제가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직접?”

로스투라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녀의 의중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메르시는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이 전하의 신뢰를 얻을 좋은 기회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탑주가 바뀐 후의 마탑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계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는 바니까요.”

자신을 낮추고 로스투라투를 높이는 화법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간신들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로스투라투는 껄껄 웃었다.

“정확히 알고 있구나.”

정확히는 개뿔. 입에 발린 소리를 좋아하는 건 머릿속에 들어찬 게 쓰레기뿐이라는 소리다.

‘좀 있으면 모가지 떨어질 고자가 말은 많아서.’

속으로 로스투라투의 미래를 신랄히 평가하던 메르시는 감격한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비록 이번 기회가 제 목숨을 앗아간다 하더라도,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나마 고개를 숙여 로스투라투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내 기꺼이 허락하도록 하지.”

로스투라투는 으스대며 메르시가 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메르시는 표정 관리에 온 힘을 쏟으며 탑 안으로 향했다.

“모두 준비하거라.”

로스투라투는 병사들에게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말라 명했다.

“예!”

병사들은 우렁차게 답했다. 활을 조준하고, 뒤에 있는 병사들은 검과 창을 들었다.

로스투라투의 양쪽 옆으로는 메르시와 함께 온 마법사들이 도열해 지팡이를 조준했다. 메르시가 탑의 문을 열었다.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끼익. 탑의 문이 닫혔다.

“바, 바로 들어갈까요?”

“아니, 기다려 보거라. 마탑주지 않느냐.”

로스투라투는 알버트가 아무리 뛰어난 검사고, 마법사라지만 마탑주만큼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금방 나올 줄 알았던 메르시는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전하는 듯 보였다.

로스투라투는 조급해졌다. 이렇게 기다리기 위해 많은 병사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다.

좁쌀만 한 믿음은 금방 바닥났다. 혹 마탑주가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물론 메르시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탑 안을 구경한 후 태평히 아침 식사를 끝내고 있었다. 아침은 남은 채소를 넣어 만든 수제비였다. 알버트에게 맞춘 뽀얀 국물은 메르시의 마음에도 꼭 들었다.

화기애애한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로스투라투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장렬히 고민하던 로스투라투는 아드리안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기사단장.”

이름만 기사단장이었지 사실 낙하산 인사였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전하, 이러지 않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가 속으로 절규하고 있을 때, 탑의 문이 다시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수제비 냄새가 흘러나왔다. 솔솔 풍기는 음식 냄새에 로스투라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식 냄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우리를 현혹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

로스투라투가 벌컥 화를 내자 병사들이 다시 집중했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로스투라투는 메르시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하지도 않고서 활을 쏘라 고함쳤다.

“쏴라!”

슈우욱. 수십 개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은 얼마 전 온 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그중 사람에게 맞은 화살은 한 개도 없었다.

모든 화살이 문 앞에서 힘을 잃고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마법?”

로스투라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안한 시선 끝에 그늘에서 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서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은, 제가 탑에 처넣었던 인물이 틀림없었다.

“…알버트 그레이.”

로스투라투가 이를 악물며 읊조렸다.

신이 빚어 만든 완벽한 피조물. 그의 열등감의 대상. 우아하게 웃는 얼굴은 병사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 순간 잊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멍하니 알버트를 응시했다.

알버트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로스투라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은 그를 잡아먹으려는 악귀처럼 보였다.

로스투라투와 맞닿은 시선이 공중에서 팍 튀었다. 알버트의 눈매가 고이 접혔다.

“제가 죽으면 후계자도 없으실 분께서 환영이 너무 격하십니다.”

“…뭐라고?”

로스투라투가 알버트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반응한 건 그의 말을 한참이나 곱씹은 후였다. 탑에 들어가기 전 알버트의 성정이 꽤 고분고분했던 것도 한몫했다.

“쏴, 다시 쏴라! 모두 달려들어!”

로스투라투는 알버트에게서 황급히 멀어지며 삿대질했다. 병사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알버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함성이 귀를 매섭게 찔렀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탑 앞에 선 남자를 향해 뜀박질했다. 상대는 한 명. 그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이만한 병력은 이길 수 없을 테다!

하지만 알버트의 입에서 봄처럼 나긋한 음성이 흘러나온 순간-

“프리즈(Freeze).”

사람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주위에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사람들이 자리에서 멈췄다. 병사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허공에 뛰다 멈춘 이들도 있었고, 칼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멈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버트에게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병사들이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우렁찼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한 침묵만 남았다.

그때 탑 안에서 메르시의 마법이 안개와 같은 형상으로 빠져나와 알버트와 로스투라투 주변의 병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안개는 사람들의 눈을 감싸고, 알버트와 로스투라투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눈앞에 새로운 화면이 펼쳐졌다.

[왜 저를 탑에 가두셨습니까…!]

[네가 두려웠기 때문이지.]

[저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트린 건 어째서였습니까!]

[그조차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디 왕자의 재목이라 할 수 있겠느냐.]

현실에 기반한 환영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막고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속으로 경악했다.

‘세상에, 그 소문이 진짜였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들은 믿어온 왕이 숨겨왔던 추악한 진실에 같은 인간으로서 환멸을 느꼈다.

“마법사들은 무얼 하는가! 공격해!”

로스투라투가 자신의 양쪽 옆에 서 있는 마법사들에게 목청껏 소리쳤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하지만 알버트는 그들조차 얼려 버린 후였다.

“아, 아드리안!”

로스투라투는 자신을 도울 인물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하지만 기사단 전체도 환영에 빠진 후였다.

알버트는 로스투라투의 발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검집에서 자신의 검을 꺼냈다. 검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유난히 짙었다.

자신을 데려왔고, 어쩌면 삶이 정말 달라질지도 모른단 희망을 주었던 자.

하지만 그 후 자신을 무자비하게 이용하며 깎아내리기 바빴던 자.

그래도 어차피 자신이 왕이 되면 끝날 일이라 생각하며 감내하고 견뎠던 시간의 기억에 알버트는 잠시 휩쓸렸다 돌아왔다.

“기다리는데 어찌나 조바심이 나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습니다.”

검을 내린 알버트와 로스투라투의 시선이 다시 맞닿았다. 로스투라투가 움찔했다. 알버트는 자애롭게 웃었다.

“현실도 아닌 꿈 때문에 그리 괴로워하시면, 제가 억울하지 않습니까.”

현실에서 더한 것을 선물해 드릴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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