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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68화 (68/156)

68화.

메르시와의 통화를 끝내고 창밖을 보니 아직 밖에는 달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알버트는 침대 한쪽에서 자고 있는 로제에게 다가섰다.

“잘도 자는구나.”

침대에서 자는 게 익숙하지 않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원래 그곳이 제 자리인 양 잘 자고 있었다. 자기 전까지는 그리 긴장하면서, 그가 자는 척을 하면 순식간에 긴장을 풀었다.

알버트는 자리에 누웠다. 옆에 들리는 숨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그는 한쪽으로 기대어 자는 로제의 등에 머리를 댔다.

“넌 내 미소가 좋다 했지.”

난 네 모든 것이 좋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무채색의 삶을 점차 물들이는 네가 좋다.

계약서를 가져왔을 때부터, 저는 절대 만지지 않겠다 말하던 얼굴이, 웃음이, 함께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보내던 시간들이 좋다.

탑에 오는 순간,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 여자’의 말을 믿은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고, 탑을 나가자마자 로스투라투에게 복수할 것이라 결심했다. 그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로제 아티어스가 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전까지는.

그녀가 변한 후부터 이곳은 알버트에게 쉼터이자 구원이었다.

탑에서의 생활은 평생 그의 삶을 채웠던 악의와 욕망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녀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바랐다.

‘…그리고 떠올리게 했지.’

로제와의 시간은 옛 기억을 일깨웠다. 한번 떠올리기 시작한 기억은 점차 선명해졌다.

알버트는 상실밖에 남지 않았던 때, 만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던 때 제 손을 붙잡고 삶은 가치가 있다 말하던 여자를.

“넌 꼭 행복해질 테니까, 살아야 해. 네 삶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웃는 모습이 맑은 하늘 같고, 말투와 성격은 지금의 로제 아티어스를 꼭 닮은 여자.

그는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잡고 고롱고롱 자고 있는 드래곤 새끼를 떠올렸다. 하양이라는 깜찍한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놈이었다.

어릴 적 기억은 잊었던 것이 더 신기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간 기억을 지우는 마법에라도 걸려 있던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희미한 기억을 짚던 알버트는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어차피 드래곤과 함께 떠나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드래곤이 더 싫은 걸지도 모르지.”

만일 그 여자가 드래곤의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홀연듯 사라지지 못했을 테니까.

어쩌면 로제가 시련을 이겨내고 그때의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로제와 그 여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내게는 너만으로도 충분해.’

알버트는 로제의 볼을 간질이고 있는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의 입술이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닿았다. 같이 있는데 제대로 만지지 못하는 건 고문이었다. 미간을 좁히던 알버트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이것도 함께 있는 시간이다.

앞으로 나가서 2주. 그 후 한 달. 로제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예기간이었다.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려 주는 것 아니냐.”

그의 속삭임은 로제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로제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나지막이 숨을 내쉰 알버트는 로제에게서 거리를 두고 누웠다.

더 이상 가까이 몸을 붙였다간 로제를 깨워야 할지도 몰랐다.

***

로스투라투가 쳐들어오는 날, 나는 새벽이 되자마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알람을 맞출 필요도 없었다.

…진짜 이 탑을 나가는 날이다. 정말 나가는데, 이게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다. 로스투라투와 3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라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콘서트를 가도 볼까 말까 한 숫자가 아닌가. 나는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빨리 일어났구나.”

검을 휘두르던 알버트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근육들에 내 눈이 호강했다.

조각상을 가져다 놓아도 저 정도로 완벽하지는 못할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삶아준 달걀이 도움이 되었을까? 나 진짜 열심히 삶았는데.

“그만 보고 옷 갈아입거라.”

알버트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피식 웃었다. 땀에 젖은 얼굴에 색기가 흘렀다. 나른하면서 섹시한 분위기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몸매가?”

“…여기서 맞다 하면 기분이 나쁘실까요?”

몸을 칭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서, 조심스레 묻자 알버트가 고개를 저었다.

“너라면 괜찮단다. 그러면, 맞다는 얘기구나.”

“네.”

나는 솔직한 여자기에 순순히 토로했다. 알버트는 수건으로 마저 땀을 닦으며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안 봐도, 나중에 계속 볼 테니 걱정 말라는 얘기다.”

알버트가 눈웃음과 함께 욕실 쪽으로 몸을 감추었다.

…나중에 계속 볼 테니.

볼 테니!

나는 그가 하고 간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눈을 꾹 감았다. 아직 몸이 더웠다. 얼굴만 아니라 온몸에 열이 올랐다. 아까 전과 다른 의미로 몸이 긴장했다.

심호흡을 계속하다 겨우 눈을 뜬 나는 침대 바로 옆에 올라와 있는 하양이를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 알버트와 이야기하느라고 여기 있는 줄도 제대로 몰랐다.

…그 말인즉슨 알버트의 몸을 보고 삽시간 변하던 내 표정을 모두 봤다는 얘기인데.

심지어 하양이가 듣기에는 다소 민망한 말-500살은 인간으로 치자면 할아버지지만, 내가 보기에 하양이는 언제나 어린애였다-도….

하양이가 먼저 입을 떼었다.

“로제….”

나는 눈을 굴리다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을 유지하려 온 힘을 다했다.

“언제 일어난 거니, 하양아.”

“아까 전에….”

“왜 더 안 자고.”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런데 로제, 저런 모습 정말 좋아하는구나아….”

“…저런 모습이라니.”

그렇게 불안한 말 하지 말아줄래, 하양아. 눈은 왜 놀란 사람처럼 동그래진 거야.

“걱정 마아… 나도 성체 드래곤 되어서 폴리모프하면 저런 모습 보여줄 수 이써.”

이내 하양이가 결연한 얼굴로 내게 선언했다. 하지만 내용물은 망측했다. 아니, 난 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하양아, 난 네 지금 모습도 좋아.”

“아냐… 로제가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좋아하는 건 처음 봤는걸….”

이미 하양이는 결심을 한 듯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 옷부터 갈아입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깨끗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로제의 화려한 드레스는 모두 알버트가 마법으로 없앴고, 하녀가 입기에 적당히 소박한 드레스였다. 박음질은 투박하지만, 튼튼한 옷이었다.

알버트가 몸을 씻는 동안, 나는 창밖을 관찰했다. 탑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어제에 비해 급속도로 늘어나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무장한 채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와.”

진짜 시작이구나.

나는 알버트가 내게 물려준 지팡이를 꼭 잡았다. 아직 마법의 기초밖에 모르고, 제대로 써본 적도 없지만 마법을 쓸 준비는 되어 있었다.

“메르시가 거의 도착했다고 신호를 보냈다.”

등 뒤에서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벽에 붙으며 물었다.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아까 전에. 기척을 지웠는데 먹혔던 모양이구나.”

“…밖에 보셨어요?”

“그래. 아까 전에도 보았단다.”

알버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와 나른한 눈빛은 여전했다.

“나를 생각해 열심히도 데리고 오셨구나.”

턱을 쓰다듬는 모습이, 조금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로스투라투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복수이니 당연할지도. 강자에게서 나오는 여유였다.

이내 그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이 풀렸다.”

알버트가 커튼을 치며 시선을 차단했다.

“자, 로제. 우리도 손님을 맞을 시간이다.”

나는 그제야 알버트의 옷차림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갈아입은 옷은 평소 입는 것과 달랐다. 크라바트를 매고, 비단 소재의 옷을 입었으며 왕실의 백합 문장이 수놓인 망토를 걸쳤다. 호화스럽게 차려입었지만, 전혀 과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옷이 오로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허리에 검집까지 찬 알버트는 승리의 신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지금 그를 본다면 그 누구도 그가 왕이 되지 못할 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자.”

알버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홀린 듯 잡았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부엌으로 내려갔다.

끼이이… 계단을 다 내려가기 전부터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내 몸이 딱딱히 굳었다. 사람이 들어온다. 누구일까. 마법사인가, 병사인가. 그도 아니면 로스투라투인가.

“걱정할 필요 없단다.”

내가 긴장한 것을 눈치챈 알버트가 손을 꽉 잡아주며 나를 다독였다.

“네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네? 문이 열렸는데….”

“네가 아는 사람이다.”

“…예?”

마법을 배우느라 바빠 알버트에게서 이번 반란 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꾸 알쏭달쏭한 말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엌의 문을 연 순간, 나는 알버트의 말뜻을 바로 깨달았다.

“배고픈데 우리 아침부터 먹고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곳에는 태연한 얼굴로 얘기하는 메르시가 있었다. 메르시는 마치 친구 집에 놀러 온 사람처럼 여유가 넘쳤다.

“…메르시 혼자 왔어요?”

내가 믿을 수 없어 묻자 메르시가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요, 밖에 사람들이 왕자님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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