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오늘 새벽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난 알버트는 책상에 앉아 메르시의 한탄을 듣고 있었다.
[마탑이 아직 자기편이라 생각하는지 모든 병력을 모으라 하더군요. 와, 마법사들 들들 볶는데 어찌나 피곤하던지.]
지팡이에서 흘러나오는 지친 음성에 알버트는 그녀의 얼굴에 낀 다크써클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드래곤이 보여준 악몽이 그만큼 생생했던 거겠지.”
드래곤이 죽을 때 발산하는 힘은 강력하다. 예프넨 후작의 비참한 최후를 바랐던 드래곤이라면, 후작의 가장 큰 뒷배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던 로스투라투의 최후도 끔찍하길 바랐을 테다.
[이제 내일입니다. 내일 새벽 다섯 시, 저하가 계신 탑으로 출발합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어느덧 로스투라투와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알버트는 제 손에 쥔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결전을 앞둔 사람치고 한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탑에 와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설명하던가?”
[아니요. 저희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지 계획은 거의 말해주지 않았어요. 이미 예상하던 바였지만.]
비록 정신이 나가 온갖 사병들과 귀족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왕이라지만, 적과 아군은 구분할 줄 알았다.
예전 마탑주야 그의 개처럼 충성했다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동안 로스투라투는 메르시를 협박하며 마법사들을 이용하려 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다. 마법사들에게 너무 의지하면 배신당할 때 타격도 커지는 법이니까.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본래 의심이 많은 자니까.
“네 임무는 탑을 여는 것뿐이겠지.”
[네,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마법사들은 현재 마탑에서 나와 궁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내일 탑에 가는 시간을 최대한 앞당기기 위해서였다.
메르시의 말소리 너머로 병사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악의 근원인 왕자를 처단한다며, 그들은 숭고한 임무를 앞둔 용사라도 되는 것처럼 사기가 높아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가는 게 쪽팔리지도 않는지….]
“미친 자라고 하지만, 이게 그저 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테지. 나를 완벽히 이용할 작정이구나.”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건 단순히 그를 공격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그의 최후를 보이기 위해서다. 더 많은 사람이 볼수록 소문은 커지고, 빠르게 퍼질 테니까.
“역시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지.”
궁에 있을 때도 현왕은 언제나 그를 깎아내리는 데 바빴다. 허영심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에게 그 ‘알버트 왕자’를 완전히 뭉개는 모습을 보이려 하는 것이다.
어쨌든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성질이 로스투라투의 수를 읽는 데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일 저도 싸워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직접 나를 데리러 오지는 않겠지. 병사들이 좁은 탑 안에 들어오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마법사들을 투입할 거다. 그때 네가 들어오거라.”
메르시는 알버트의 가장 큰 병력 중 한 명이다. 대놓고 그를 돕는 모습을 보인다면 병사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를 데리고 나온다는 핑계로 탑 안에 들어가면, 메르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탑 안에서 리암이 궁으로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도록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수상해 보이지 않게 행동하도록.”
[에이, 그 정도야 당연합니다.]
메르시는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탑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드디어 보겠네요.]
알버트가 탑에 들어간 순간부터 준비해 온 결전을 앞둔 날이지만, 긴장하지 않은 건 메르시도 마찬가지였다.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환상 마법은.”
[준비해 놓았습니다~]
메르시는 웃으며 답했다. 악몽과 다르지만, 사람을 현혹할 수 있는 환상 마법은 메르시의 특기였다
마법사는 각자 살아온 환경과 재능에 따라 마법이 특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알버트는 로스투라투가 왕성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탑에 발을 묶어둘 생각이었다.
현왕은 탑에 사병들과 왕성의 세 기사단 중 가장 높은 왕족 직속 호위 기사단인 이글(Eagle) 기사단을 데리고 온다. 나머지 두 기사단은 궁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로스투라투는 성군이었던 전대 왕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어서, 각 기사단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리암의 비밀 사병은 뛰어났지만 수가 현저히 적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협력을 요청했지만, 아직 알버트가 탑에 갇혀 있다 여기는 귀족들은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면 협조할 수 없다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속도와 두뇌 싸움이다. 알버트는 리암에게 궁의 지하 통로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적은 숫자는 작전으로 보완한다.
마법사들과 리암, 슈버트는 궁을 친다. 메르시를 제외하면 마탑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자 빙결 마법에 특화된 아이시와, 화염 마법에 능한 피어리가 리암을 도울 것이다.
즉, 이곳에서 로스투라투와 3만 명의 병사들을 상대할 사람은 메르시와 알버트뿐이라는 소리였다.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죠?]
로제에게는 탑 쪽에도 병력이 붙는다 이야기했지만 그건 거의 거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반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궁을 선점하는 것.
두 번째, 로스투라투의 목을 베는 것.
로스투라투의 목을 베기 위해서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알버트는 로스투라투가 뿌려둔 소문에 대항하기 위해, 제 과거를 풀었다.
그가 밖에 뿌려둔 소문은 계속해서 퍼져 수도에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아직 로스투라투의 귀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탑에서 아티어스 양과 구경하겠습니다, 저하. 저도 저하가 마법 쓰시는 건 오랜만에 봐서.]
메르시의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픽 웃었다. 팔짱을 낀 얼굴에 두려움이란 없었다.
“너도 일은 해야겠지.”
[어차피 혼자 다 하실 수 있으면서.]
“두려워하는 이들의 목숨을 굳이 빼앗고 싶지는 않구나.”
압도적인 무력으로 로스투라투를 죽인다면, 다른 귀족들은 그에게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만일 맞선다 해도 다스릴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이들의 죄 없는 목숨까지 앗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흘릴 피는 넘쳐날 테니 줄일 수 있을 때 줄이고 싶었다. 알버트는 퍽 자애로운 편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메르시는 마지못해 답했다. 그녀의 환상은 한 번에 많은 사람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그럼 아티어스 양은요?]
“너와 함께 탑 안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나중에 나오라 사인을 주실 거고요.]
“그래, 너도 말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얼마나 로제 덕을 보았는지.”
처음 탑 안에서 메르시와 소통한 사람은 알버트가 아닌 로제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다. 알버트는 이번 기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로제를 위한 증인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계획은 순조로웠고, 걱정할 것도 없었다.
[일 진행이 너무 순조로워서 신기할 지경이네요….]
마탑의 반란도 이리 쉽지는 않았다. 중간에 배신자도 나왔고, 서로 맞붙던 현장도 치열했다.
…하지만 훨씬 더 규모가 큰 이번 일은 그저 한쪽의 일방적인 구타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저 한 사람 때문에.
“그만큼 준비했으니까.”
알버트는 턱을 괴며 느른한 숨을 쉬었다.
모든 노력이 결과에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들인 노력 이상의 결과를 내놓았다.
그건 알버트 그레이의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했다.
“할 말은 다 끝난 듯하구나.”
딱 필요한 이야기를 끝낸 알버트가 통화를 끊으려던 참에, 메르시가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이번 일 끝나면 감옥에 다녀오겠습니다.]
메르시는 결연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감옥에 갇혀 있는 제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 였던 자가 맞았다. 사람으로서의 도덕성을 버리고, 마법사로서의 긍지조차 잊은 채 로스투라투의 개처럼 살아오던 남자. 딸의 혐오스러운 눈길을 견디다 못해 구타를 이어가던 남자.
[끈을 끊을 때가 되었으니까.]
그녀가 마탑주가 된 이후, 전대 마탑주의 처분은 즉결로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미뤄지고 있었다. 메르시 자신도 놀랐다.
제 속에 없다 생각했던 애증은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때 자신에게 애정을 줬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메르시는 고뇌했다. 남자의 목을 자신이 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알버트는 그녀에게 기회와 시간을 주었고 메르시는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살아남는다면 자신의 목을 벨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녀는 완벽한 복수를 할 것이다.
제 아버지에게, 그가 그토록 지켜오던 부패한 세상이 무너졌노라 알려줄 것이다.
반란이 성공하고 아버지가 가두었던 왕자는 탑을 나와 로스투라투를 죽였다고.
당신이 그렇게 모시던 왕은 이제 없다고.
[그래도 깔끔히 죽여드리는 게 좋겠죠.]
“목을 베는 것이 가장 깔끔하겠지. 하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고통스러운 게 좋다면 갈비뼈를 하나씩 부러뜨리거라.”
[그동안 받은 걸 생각하면 그러고 싶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게 그들 사이에선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알버트는 문득 로제를 떠올렸다.
“가족이란… 이렇듯 덧없는 것인데.”
로제는 가족을 보내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로제가 왜 드래곤을 위해 계약까지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예?]
메르시는 알버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말꼬리를 올렸다.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덤덤히 답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도 될 수 있는 모양이더구나.”
그의 길다란 속눈썹이 팔랑였다. 로제에 대해 이야기하니, 물어야 할 것이 기억났다.
“예프넨 후작과 흑마법은?”
[아, 맞다. 때가 절묘해서, 저택을 샅샅이 수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꽤 잘 숨겨뒀었던데.]
“보고.”
알버트가 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마저 보고하라 재촉했다.
자신이 계속 물어봤자 알버트가 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메르시는 어깨를 으쓱인 후 보고를 이어나갔다.
[예프넨 후작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제물로 아이들을 바쳤던 모양이에요. 몇 번 해보고 포기한 모양이지만요.]
후작의 저택을 샅샅이 뒤지라는 로스투라투의 명에 따라 메르시는 얼씨구나 하며 신나서 저택을 뒤졌다.
예프넨 후작이 흑마법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버트가 저번 감옥에서 만났을 때 넌지시 말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다.
이윽고 메르시는 예프넨 후작이 마법으로 숨겨두었던 제단을 찾아냈다. 흑마법사와 내통했을 것이 분명한 증거로 제단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싹 지웠는지 없더라고요.]
하지만 찾을 수 있는 증거는 그게 전부였다. 예프넨 후작과 내통한 흑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살려두지 않았다, 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알버트는 깔끔한 일 처리를 좋아했다. 계속 미궁에 빠지는 사건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찾을 수 없는 흑마법사라면 살아 있지 않다 보는 것이 타당했다.
‘로제와 더 이상 연결 고리는 없겠군.’
예프넨 후작의 악행은 처벌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녀의 스승이었을지 모르는 흑마법사의 행방이 묘연한 건 다행이었다.
그녀가 흑마법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알버트는 메르시의 보고를 찬찬히 들으며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