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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66화 (66/156)

66화.

“기초는 어느 정도 되어 있는 모양이니, 네게 필요한 마법진들은 먼저 살펴보자꾸나.”

알버트는 책을 펼쳐 각 마법에 쓰이는 마법진을 보여주었다. 동그란 원 안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각 마법진을 정확히 외우고 그릴 줄 알아야 진정한 힘도 쓸 수 있단다. 힘의 세기는 각자 가진 마력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알버트는 빗금 하나, 마법진의 모양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강조했다.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데요.

“비슷해 보이기는 하는데….”

“이 마법진의 서쪽 문양은 자연을 뜻하는 거고, 오른쪽 마법진의 서쪽 문양은 물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뜻이지. 마법진을 잘못 그리면 마법을 시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꼭 제대로 외워야 한다.”

마법을 하는 게 아니라 수학과 화학을 하는 느낌인걸. 오랜만에 학구열이 불탔다.

“잠시만요.”

원래 외우는 건 직접 적어가면서 하는 게 제일이지.

“하양아, 이리로 와!”

나는 우리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책을 보고 있던 하양이를 불렀다.

방바닥에 이번에 가져온 책들을 나란히 놓은 나는 위에 담요를 올려 작은 테이블을 완성했다. 이번에도 책을 열심히 가져온 게 톡톡히 도움이 됐다.

“하양아, 너도 여기 앉아서 같이 공부하자.”

쪼르르 달려온 하양이는 헤벌쭉 웃으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발로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내가 만든 간이 테이블을 보며 알버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나와 하양이가 나란히 앉은 테이블 맞은편에 섰다.

“책상에 앉는 것은 어떠니, 로제.”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나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굳이 책상을 두고 이렇게 앉은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여기도 편해요.”

알버트가 화날 것 같아 말하지는 않았지만… 책상에는 하양이가 같이 앉을 수 없잖아.

나는 바로 펜에 잉크를 묻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게 가장 필요한 마법진이라고 생각되는 것부터 외우기로 했다.

어릴 적 미적감각까지 모조리 끌어모은 나는 마법진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그리는 마법진의 두루뭉술한 선만 보고서 알버트는 어떤 마법인지 정확히 알아맞혔다.

“포겟이라… 나쁘지는 않지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포겟(Forget).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생각나는 건 마취제였다. 고통을 없앨 수 없다면,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을 테니까.

“제 마법이 끝난 후 왕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슬쩍 알버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 그러마.”

알버트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진심이 담긴 얼굴은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고 여겼던 나마저 넋을 놓게 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구나.”

내가 잠시 뜸을 들이자 알버트가 알았다는 듯 눈을 반쯤 접었다. 덧그리는 미소가 저녁 노을처럼 진해졌다.

나도 알버트가 무슨 말을 생각했는지 안다. 하지만 잘생겼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세요.”

막 올라온 봄의 새순도, 그의 미소만큼 화사하지는 못하다. 나는 그가 웃을 때가 좋다. 웃을 때 한 움큼 드러내는 순수한 감정이 좋다.

“왕자님께서 진심으로 웃으실 수 있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평소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가장하는 게 그의 삶이라는 것을 안다. 남들에게 표정을 쉽사리 드러낼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힘들 때도 웃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이런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꾹꾹 마음을 눌러 담아 한 말에, 알버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나를 응시하던 눈동자가, 뜻밖이라는 듯 깜빡였다. 눈매가 서서히 휘어지며 반달을 그렸다.

“…작업을 거는 건 내 쪽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미소를 띠고서 그가 그윽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진심인걸요.”

“이미 넘어간 사람을 얼마나 더 넘어가게 하려고.”

맞은편에 앉아 허리를 숙인 알버트가 간이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나른히 뜬 눈동자의 시선이 짙게 내려앉았다.

“…이런 말은 자제할까요?”

“아니, 그러지는 말거라. 그러면 벌할 것이다.”

알버트는 바로 답했다. 절대로 그러지 말라는 단호한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배시시 웃었다.

“왕자님, 제가 어떻게 왕자님 칭찬을 그만둘 수 있겠어요. 이렇게 완벽하신데.”

“네 눈에는 내가 완벽해 보이더냐.”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완벽이라는 말과 가장 맞는 분이죠.”

나를 물끄러미 보던 알버트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눈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면 되었다.”

내 말이면 족하다고 말하는 음성이 가슴에 박혔다.

그는 항상 날 설레게 했다.

***

아쉽게도 아직 탑에는 마법 제한이 걸려 있었고, 지팡이로 행할 수 있는 마법은 그를 제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자면 알버트를 무릎 꿇린다든가, 그를 묶는다든가.

…내가 빙의하기 전 로제의 취향이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팡이를 바로 알버트에게 넘겨줬던 터라 그 지팡이에 이런 종류의 마법만 있을 줄은 몰랐지.

어쨌든 알버트는 나보고 지팡이를 사용해 보라며 넘겨주었다.

나는 손에 지팡이를 쥐고서 x리포터에 빙의한 것처럼 휘둘렀다. 가느다란 지팡이가 손에 착 잡히는 감각이 생각보다 좋았다.

내가 비록 11살 때 마법 학교에는 못 갔지만 마법은 배운다! 오랜만에 학구열에 불타던 학생 때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벌써 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공부했던 것이다.

하녀로서의 본분은 잊지 말아야 했는데, 머쓱해졌다.

“왕자님, 말을 해주시지….”

“네가 너무 집중한 것 같아서 그리했다. 배도 그리 고프지 않았으니까.”

내 원망 어린 말에 알버트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생각해 준 사람한테 뭐라 하기도 그래서, 얼른 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하양이도 조용했다. 나는 아직도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하양이에게 소곤거렸다.

“하양아, 배 안 고파?”

내 말에 하양이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했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 까먹고 있었어…. 책도 재미있었고오….”

하양이가 변하는 과정을 보는 건 즐거웠다. 나와의 계약이 하양이에게 삶의 동기를 부여해 준 건 맞는 모양이다.

“얼른 저녁 준비해 올게요.”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나는 옆에서 구경할래애!”

내 품에 안겨드는 하양이를 보는 알버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그 모습을 외면하며 얼른 부엌으로 내려갔다.

***

지금 남아 있는 재료는 채소가 대부분이었다. 감자, 호박, 양파를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은 나는 창고에 남은 재료를 살피며 고민했다.

점심도 걸렀으니 원래 점심때 하려고 했던 부침개를 부치고, 메인 요리도 하나 더 해야겠다.

마침 돼지고기가 눈에 띄었다. 한 사람 몫도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문제는 없었다.

“고기 넣고 고추장찌개 해야겠다.”

돼지고기와 고추장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부침개는 기름에 튀기듯이 부쳐야 맛있지만 그러면 느끼할 수 있으니, 칼칼한 국을 같이 해야지. 원래 비 오는 날 국물이 당기기도 하고….

메뉴 선정을 끝낸 나는 재료를 모두 바구니 안에 넣어 창고 밖으로 나왔다.

“…어?”

그리고 부엌의 의자에 앉아 있는 알버트를 발견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앉은 하양이와 한창 눈싸움 중이었다.

“왕자님이 어떻게 여기 계세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알버트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동안 들어오지 못한 것이 억울하여 왔단다.”

“음….”

“밖에도 다녀왔는데 이곳에 오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냐.”

“…부엌에는 들어올 수 없다 하셨었잖아요.”

지금까지 들어오지 못한 부엌을 어떻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알버트가 화사하게 웃었다.

“전쟁 준비를 하느라 탑을 관리하던 마법사들이 차출되었거든. 덕분에 경계가 느슨해져 가능했단다.”

하긴, 로스투라투가 알버트를 죽이려 모든 사람을 끌어모으는 중이니 마법사들이 차출된 것도 당연했다.

이유는 타당하다. 하지만 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알버트는 하양이가 거슬려서 왔다. 저 눈싸움이 그 증거다.

하양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눈을 부라리며 알버트와 맞섰다. 이제 피하지만은 않았다.

…저 둘은 평생 서로를 원수 취급하면서 살 셈인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알버트가 내게서 바구니를 가져가 테이블 위로 옮겨주었다.

“로제 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기도 했고.”

알버트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의 음성은 듣기 좋았지만, 아무래도 빨리 요리를 끝내고 밥을 먹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요리를 하면서 둘의 싸움을 중재하는 건 어려우니까.

“별것도 없는데. 그러면 저는 최대한 빨리 요리를 해보겠습니다.”

다행히 내가 요리를 시작하자 둘 사이의 눈싸움이 멈췄다. 그저 자취생의 요리를 이렇게 구경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둘이서 맞붙는 것보다야 이게 낫지.

채소를 물에 담가 씻은 나는 채썰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감자였다. 감자 뒤에는 호박을 썰고, 양파도 껍질을 깠다.

“아이고….”

유독 매운 양파 때문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개를 높이 쳐들었지만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으으, 눈 아파. 팔을 올려 눈물을 쓱 닦는 나를 보던 알버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요리가 이리 힘든 것이었구나.”

“아니, 항상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양파가 유독 매워서요.”

“맵다고?”

“양파 까고 다지면서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고글을 쓰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눈물을 멈추기 위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알버트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하마.”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요리하는 왕자님이 어디 있어! 상사가 요리하는 걸 보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이라고!

나는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알버트의 반응은 나보다 훨씬 빨랐다.

내 손에서 칼을 가져간 알버트는 자리를 잡고 섰다. 알버트와 부엌, 그리고 손에 든 칼이라는 오묘한 조합이 완성되었다.

“돌려주십시오오….”

내가 칼을 되찾기 위해 낑낑거렸지만 알버트는 나보다 키도 컸고, 팔도 길었다.

숨을 고르던 나는 눈을 부릅뜨며 경고했다.

“…왕자님, 안 됩니다. 부엌과 왕자님의 조합도 미묘한데 요리하는 왕자님이라니요.”

“너보다는 빨리 끝낼 수 있을 거란다.”

“저도 요리 오래 했는데, 나름.”

이래 봬도 자취 경력도 있고 칼로 썰기는 잘하거든요? 양파 까면서 우는 게 대체 뭐가 대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내가 힘에서 알버트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양이까지 합세해 그의 손에서 칼을 되찾으려 했지만 우리는 알버트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

…남주의 힘과 민첩성을 이런 곳에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고!

“내, 내가 도와줄 거야!”

“네가 무슨 수로, 드래곤 새끼야.”

알버트는 여유롭게 하양이의 앞발질을 피했다. 하양이의 얼굴이 차츰 붉어졌다.

“나도 나중에… 사람 모습으로 변하면 로제 꼬옥 도와줄 거야….”

하양이는 예쁜 말만 아는 게 아닐까? 나를 위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나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알버트를 보며 결연히 말했다.

“그럼 왕자님,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알버트가 칼을 잘 다룰 줄은 몰랐다. 애초에 칼을 잡은 자세가 영 이상해서 기대도 하지 않았다. 평생 부엌에 드나든 적은 없을 테니 당연한 걸지도.

하지만 어색한 자세와 대조되게 그는 평생 칼만 쓴 장인처럼, 양파를 완벽히 채 써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곳에서도 완벽하실 줄은 몰랐는데.”

“칼을 다루는 거니까.”

…먼치킨력이 이런 곳에서도 발휘될 줄이야. 더군다나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왕자님 우시는 모습 못 본 건 아쉽네요.”

“내가 우는 모습이 보고 싶으니.”

“…조금요? 왕자님은 우는 모습도 예쁘실 것 같아서.”

미인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우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칼을 쥐여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쉽게도 우는 건 네가 먼저겠구나, 로제.”

“…밖에 나가면 힘들 거라 알려주시는 건가요.”

“아니, 침대 위에서를 말한 거란다.”

…알버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미소를 띤 채, 나긋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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