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부슬부슬. 밖에 비가 내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알버트의 옆에 슬쩍 앉았다.
“왕자님, 저 마법을 배울 준비도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알버트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책 페이지를 넘겼다.
“…안 가르쳐 주세요?”
“글쎄.”
“제가 정말 배우고 싶습니다.”
“나는 네가 마법을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의 시선은 여전히 책을 향해 있었다. 나는 다소 당황해 말문을 잃었다. 사실 알버트가 여기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오히려 나한테 죽기 살기로 마법을 가르칠 거라 생각했는데?
“왕자님, 화가 나신 것은 알지만 제가 살길 바라지 않으시나요…?”
그가 화내지 않도록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내가 계약자가 된 이상, 시련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그건 알버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네가 죽는 일은 없어.”
“…그런데 왕자님한테 마법도 배우지 않고서 제가 무슨 수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나요?”
“글쎄다.”
빙긋 웃으며 말문을 돌리는 모습에 혼란은 배가 되었다.
…알버트가 사실 회피형이었나?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마주했을 때 우선 부정부터 하고 보는 형인 건가. 문제 해결은 뒤로하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건 내가 여태 보아온 알버트와 전혀 달랐다. 뭔가 숨기는 게 더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알버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모습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남자를.
한번 계약자가 되면 바꿀 수 없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계약을 아예 없애 버릴 방법이라도 찾은 걸까?
“계약을 풀 방법이라도 알고 계신 건가요?”
“그럴 리가. 계약은 한번 끝내면 영원하단다. 그게 가장 무서운 점이지.”
능청스레 말하며 책 페이지를 넘기는 알버트의 얼굴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감정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나는 안다. 처음 내가 계약을 했을 때 그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얼마나 분노했는지도 안다.
뭔가 더 있다. 분명했다. 알버트는 내게 마법을 가르치지 않고도, 계약을 없애지 않고서도 일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에게 몇 번이고 캐물어도 나오는 게 없을 것은 분명했다. 지금 무슨 꿍꿍이가 있더라도, 로스투라투가 먼저일 테니 시간은 있었다. 이건 나중에 리암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하고, 우선 마법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좋아, 두려운 모습을 보여서 알버트의 동정심을 자극하자. 더군다나 나는 알버트의 애정을 받는 몸이다.
“그러면 더 가르쳐 주셔야 해요. 왕자님. 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밤에 잠도 안 오고….”
나는 입꼬리를 축 내리며 불쌍한 강아지처럼 보일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알버트가 팔짱을 끼더니 내 연기가 가소롭다는 듯 눈꼬리를 휘었다.
“어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자더구나.”
들켰다.
“…왕자님께서 더 빨리 주무셨는데?”
“그리고 더 빨리 깼지.”
하긴, 알버트가 나보다 빨리 일어나 새벽마다 훈련하던 건 사실이니까.
잠시만 훈련? 훈련?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알버트가 새벽마다 하양이의 체력 단련을 도와주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왕자님, 오늘 새벽 훈련 혼자 하셨잖아요.”
내가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자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머리 좋은 알버트답게 지금 내가 꺼낼 이야기가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나는 과제를 발표하는 학생이 된 기분으로 장렬히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양이와 함께 훈련해 주신다고 하셨었지요. 왕자님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멋진 군주시고….”
“너도 함께 일어나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만.”
“내일부터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훈련 대신에 마법에 대해서 배우면 완벽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밖에 나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새벽마다 일어나는 건 일주일 강행군이라고 치고 해내면 되지!
…하지만 내 말에도 알버트는 전혀 생각을 바꿀 기미가 없어 보였다. 후, 철벽도 이런 철벽이 따로 없다. 공략하려 할 때는 이렇게 안 넘어오는 사람이, 어쩌다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좀 나르시스트 같은 발언이었어.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지만, 방법을 전혀 모르는 것과 다소 서툴더라도 방법을 알고 있는 건 다르니까.”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양쪽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일 다 저질러 놓고 이렇게 행동하는 게 이기적인 거라는 거 알지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묻는 부탁과 함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후, 한숨을 내쉰 알버트가 책을 덮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내 쪽으로 돌아갔다.
서늘한 눈동자는 노을과 같은 빛깔이었다. 타협이란 말은 모르는 남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눈 안에 담고서, 나를 맹렬히 응시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알버트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 손이 멈칫하다 왼쪽 귓불을 어루만졌다.
그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를 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의 손을 꼭 잡는 것은 덤이었다. 내 생애 부려본 애교란 애교는 모조리 다 끌어모았다.
“네에…?”
알버트가 순간 굳었다. 무표정하고, 담담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알버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나와 거리를 좁혀왔다.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거절하지 못할 것 같더냐.”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높낮이 없는 음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일부러 애교를 부려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이게 먹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화가 난 것도 같다. 음, 역효과인가? 하긴 내 행동이 어색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귓불에 축축하고 따듯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파드득 떨었다.
“와, 왕자님?”
“이제 제법 나를 네 마음대로 끌어갈 줄도 알고.”
삽시간에 낮아진 음성은 생각보다 더 그윽했다. 귓가에 내려앉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내가 그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그가 내 허리를 휘어잡으며 나를 자신의 품에 감쌌다.
“내가 지금 무얼 참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를 마주한 얼굴이 평소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 전과 다른 열기를 품은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확실히 저번 키스 이후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행동이 많아졌고, 키스를 비롯한 스킨십이 늘어났다. 우리 둘의 계약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행하는 사람이 접촉에 대한 사항은 철저히 외면했다.
…뭐 이건 쌍방과실이지만.
아무튼 알버트와 여기서 끝까지 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흣.”
생각에 빠진 와중에 알버트가 내 목에 입술을 맞췄다. 점점 내려가는 입술을 막기 위해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멈춰야 해. 멈춰야 해! 여기는 하양이도 있다고! 물론, 하양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다지만!
마치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알버트가 혹할 만한 거, 혹할 만한 거!
“왕자님, 마법 기초에 대해 알려주시면 저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네 이야기?”
손바닥에 느껴지는 숨이 뜨거웠다. 웅얼거리듯 말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네, 왕자님께서 궁금하신 거 다 물어보셔도 좋아요. 제가 기억하는 대로 다 이야기할게요.”
“…확실히 저번에도 부모에 대해서도 말해줬었지.”
“네, 그러니까….”
나는 숨을 내쉬며 말꼬리를 흐렸다. 알버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조금 더 하면 울 것 같은 얼굴이구나.”
“이런 접촉에는 약해요, 저도.”
…뭐, 알버트와 이런 접촉을 하고도 태연히 넘어갈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싶지만.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입을 맞추는 것보다?”
“네.”
“그럼 지금은 입을 더 맞춰야겠구나.”
“왜 굳이 ‘지금은’이라는 전제가 붙는 것인가요?”
“다른 건 그 후에 차근차근 익숙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약오른 나는 그를 열심히 노려보았다.
“너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란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알버트는 이윽고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
마력의 원천은 마나다.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을수록 많은 마나를 다루는 힘을 가졌다는 말이다.
마법진은 이 마나를 끌어모으는 방법이다. 지팡이는 마법의 힘을 증폭시키며, 마법진을 매번 그리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준다. 처음 마법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지팡이에 의존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팡이 없이 마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수많은 마법진을 정확히 기억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알버트는 이를 아무 문제 없이 해내고 있었다.
“마법진을 그린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지. 시동어가 필요하단다. 시동어는 마법을 쓸 수 있는 말. 즉 마나를 모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는 힘이다.”
“그렇군요….”
“저번에 보니 시동어는 좀 아는 듯하더니.”
“조금은요…?”
“한번 말해보거라.”
시동어가 영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아는 단어를 줄줄이 말해보았다.
알버트가 썼던 플라이(Fly)나 메르시가 썼던 하이드(Hide)를 제외하고서도, 워터(Water)나 파이어(Fire)같이 형상화가 가능한 단어들이었다.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한 게 다 맞는 모양이었다. 음, 마법진만 좀 익히면 마법 자체를 쓰는 데는 문제없는 건가?
선행학습을 한 기분이라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그런 나를 보며 알버트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네가 이렇게 잘 알 리가 없는데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건가….”
“네?”
“기억이 없는 사람치고는 시동어들을 꽤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란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곳 언어는 영어와 전혀 달랐고, 그에 따라 시동어를 익히는 데도 꽤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버트가 잠깐 뜸을 들인 후 물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니, 로제?”
“예?”
“네 진짜 모습에 대해서라든가.”
뭐 기억난 게 있나 물어보는 것 같은데 걱정이 많다. 난 로제 아티어스가 아닌걸.
“네, 전혀 없어요.”
나는 그의 걱정을 덜기 위해 바로 힘차게 답했다.
그리고 한편 그의 오해를 풀어줄 길이 없는 나로서는 꽤 머쓱해졌다.
아니, 이건 그냥….
주입식 교육의 힘일 뿐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