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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64화 (64/156)

64화.

내가 바꿔놓은 원작의 흐름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아무리 알버트라도 3만 명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건 좀 힘들지 않을까?

살그머니 알버트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메르시가 시간에 맞춰 마법사들을 데리고 올 거고… 슈버트는 기사단에서 제 일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니 걱정 말거라, 로제.”

오히려 내게 우리 쪽 상황을 설명해 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마법사의 수는 얼마나 되나요?”

“탑에 남아 있는 마법사는 아마… 300명 정도 될 거다.”

“예?”

아무리 마법사가 귀한 존재라고는 하지만, 이건 숫자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알버트가 연이어 설명했다. 본래 마탑에 등록해 살고 있는 마법사의 수는 2천 명 정도였다. 그러나 메르시가 마탑주로 부상하며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고, 감옥에 갇히거나 죽은 마법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마탑의 극악무도한 행태에 질려 떠난 마법사들도 있다 보니, 그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세상에… 고작 300명으로 3만 명을 상대해야 한다니….”

나, 이 책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숫자에 압도당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숫자는 딱히 큰 문제가 아니란다.”

알버트가 날 다독이며 흘리듯 말했다.

알버트의 무심한 태도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읽혔다.

제대로 가늠해 본 적 없는 알버트의 능력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게 보여준 능력은 정말 일부에 불과할 테니까.

턱을 괸 알버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우선 궁에 들어가면 네 공부터 치하해 주마.”

태연한 말은 이미 반란의 성공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때, 돌연 알버트가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뭐 문제라도 생긴 걸까 덩달아 고민하는데 그가 넌지시 물었다.

“돈과 영지 중에서 무엇이 더 좋으니.”

“…예?”

“풍족하게 살 만큼의 돈을 마련해 달라 하지 않았느냐.”

“아, 그게….”

계약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 계약 내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니.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 우리 목숨이 달려 있는 심각한 주제가 있잖아! 나는 다시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오기 위해 애썼다.

“굳이 바로 그러실 이유 없어요. 좀 기다리셨다가 해도 되고. 그러면 병사들은….”

하지만 알버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혼란스러울 때가 기회다. 나중에는 토를 다는 인물들이 많아질 테니.”

“그건 그렇지만….”

나에게 제일 이득이 될 일이 뭔지 몰라서 쉬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빨리 끝내야 하는 문제인 건 사실이었다.

궁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원래 하녀라는 사실이 밝혀질 건 확실했다. 알버트와 이렇게 엮인 만큼 신상을 비밀로 하긴 어려우니까.

하녀가 왕자님과 계약을 하고 재물을 얻는 걸 좋아하는 귀족이 어디 있겠어?

그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 조항을 말없이 찬찬히 훑은 알버트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영지라면, 좋아하는 곳이 있느냐.”

“…….”

“비옥한 영지가 좋으니. 아니면 바다를 낀 곳이 나을까? 호수를 낀 곳도 있고… 광산을 낀 곳도 있구나.”

내 소유의 땅…! 처음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고민을 거듭할수록, 영지 대신 돈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건물을 살 만큼, 평생 놀고먹고 살 만큼 많은 돈.

영주가 되는 것도 피곤한 일 아닌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하고, 세금도 걷어야 하고, 매년 식량 비축과 겨울나기 등등….

“왕자님, 저는 돈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돈?”

“아, 건물도 괜찮아요!”

“건물이라면?”

“수도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이라든가.”

“…….”

“아니면 디저트 가게?”

“…디저트를 좋아한다 말하긴 했었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매달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것이면 만족합니다. 제가 어딜 다니든 간에 보조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다닌다고.”

“네, 그렇습니다. 제 꿈이 세계 일주기도 하고, 여행도 좋아해서!”

매달 돈을 받으며 다니는 세계 일주. 이 얼마나 낭만적이야?

“여행이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책상 끄트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지가 좋겠다.”

그가 단언하듯 말했다.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이런 날벼락이.

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왕자님, 저는 영지를 받을 만한 인물이 못 돼요. 애초에 영지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사람들을 붙이는 거지. 귀족들도 다 아는 것은 아니란다. 평생 연금까지 합쳐서 주려면 돈보다는 영지가 낫지 않겠니, 로제.”

그거야 알버트의 말이 맞지만!

“내가 이곳에 감금된 것을 알고 목숨을 바쳐 이곳까지 잠입하여 내 곁을 충실히 지켰던 충신이, 이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알버트가 한 말이, 밖에 나갔을 때 퍼질 서사라는 걸 깨닫는 건 쉬웠다. 그는 이야기를 푸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저는 돈이 더….”

내 말을 깔끔히 자른 알버트가 말했다.

“네게 묻는 사람이 있거든, 그렇게 대답하거라.”

알버트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리암이 전해준 소문이 있다.”

“네?”

“성에서 네가 만들어줬던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더구나.”

성에서 해준 음식이라면, 수제비나 치킨이었다. 이곳에서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주인공 서이나뿐이다.

“혹시 너와 아는 사람이냐 물어보던데.”

“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뜸을 들였다. 서이나와 친분이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서이나에 대해 이렇게 듣게 되는 건 좀 신기했다. 진짜 원작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구나.

내가 원작 상관없이 돌아다니며 내용을 바꿨으니 서이나의 이야기도 바뀔 것은 분명했다.

알버트가 날 좋아하지 않게 되는 미래면 몰라도, 지금 알버트와 서이나가 이어지는 건 불가능하겠지.

나도 알버트가 직접 서이나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좋아하는 사람을 보내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알버트와 서이나의 러브 라인 때문은 아니었다. 둘이 만나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도 아니었다.

“어째서.”

나는 서이나가 만드는 음식이 궁금했다. 내가 요리계의 믹스커피라면 서이나는 TOP니까.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높이 사는 만큼, 요리는 중요했다.

이렇게 영지를 가지게 된 거, 여주인공 언니를 데리고 오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진지했다.

“음식 잘하실 것 같아서요.”

알버트가 나를 물끄러미 보다 픽 웃었다.

“네가 원하면 나중에 궁으로 한번 불러오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왕자님!”

고민에 잠긴 듯 엄지로 턱을 쓸던 알버트가 연이어 말했다.

“나가서 당분간은 별궁에 머무르거라.”

“별궁에요?”

“왕궁 동쪽에 별궁 두 채가 있다. 하나는 내가 쓸 거고….”

그가 나를 응시했다.

“다른 한 곳에는 네가 머무르거라.”

어차피 이곳을 나가면 알버트가 내게 상을 주기 전까지 머무를 곳이 없어 곤란하던 참이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영지를 하사하는 것까지 마치면… 그 후에는 리암과 궁을 나가줘야겠구나. 궁을 대대적으로 청소해야 하거든.”

리암의 예상대로였다. 알버트는 나를 리암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선선히 말하는 알버트를 보니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리 그와 헤어져 있는 시간은 잠깐일 거라 해도.

대대적인 궁 청소라는 말의 어감이 오로지 건물 자체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터다. 로스투라투에게 빌붙어 목숨을 연명해 오던 사람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가 되었다.

“꽤 긴 청소가 될 거라, 너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시선이 낮은 목소리처럼 깊게 내려앉았다. 나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은 피곤해 보였다.

“궁에서 여러 사람도 만나시고… 예전 삶으로 돌아가시겠네요.”

나는 넌지시 운을 떼었다.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바닥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래, 네가 원했던 것처럼.”

로제 아티어스가 망쳐놓았던 그의 삶이 드디어 정상 궤도에 오른다.

그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너를 찾겠지.”

그윽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한 달.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정확한 날짜 확인이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 계획이 알버트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리암이 일부러 말했을 리는 없었다. 그저, 알버트의 눈치가 너무 빠른 것뿐이다.

하지만 왜일까. 계획을 알고 있는 알버트를 보면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은 것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로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로 했었지.”

이윽고 그는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내 인내심도 점점 바닥이 나는 참이라서, 이쯤 하면 믿어줄 거라 생각하고 있단다.”

그는 내 손을 제 심장께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한 달이다.”

그가 내 손을 움켜쥐고 제 가슴께에 짓눌렀다. 그의 심장이 세차게 박동했다. 단단한 근육과 함께 느껴지는 감촉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소 덤덤하고, 차분하기까지 한 모습과 다르게 그의 심장은 격렬히 뛰고 있었다. 내 손끝을 타고 흐르는 심장박동 소리가 더 이상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을 때쯤….

“내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기다리마. 그 후에는….”

알버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가 오는 거다.”

네가 오는 거야. 그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물컹한 감촉과 숨결에 몸이 간질간질했다. 입맞춤은 성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경건했고, 흑심이 없다 보기에는 길었다.

이윽고 입술을 뗀 알버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네가 오지 않아도 내가 갈 터지만.”

그가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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