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나마 다행인 건 일주일간 탑을 비운 덕에 예전에 주고 간 식량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춧가루나 고추장은 애초에 양이 많아 창고에 쌓여 있었고, 쌀도 남아 있었다. 정 안 되면 그냥 간장계란밥을 해 먹어도 무방했다.
창고 안에 들어간 나는 재료를 차례대로 살폈다. 감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호박도 보였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데, 저녁에 부침개나 해 먹을까. 기름에 바싹 튀긴 바삭바삭한 반죽을 생각하니 군침이 돌았다.
“우선 아침부터 준비해 볼까.”
감자와 배추, 양념 재료들을 꺼내 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탑에서의 아침은 평화로웠다.
감자와 파를 송송 썰어 넣고 오랜만에 고춧가루도 뿌렸다. 어느 정도 끓이고 나서는 간을 봤다. 칼칼하니 좋았다.
역시 한국인은 매운 걸 먹어줘야 한다. 나가 있는 동안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못 보고 살았더니 더 그렇다. 자극적인 거 최고야, 짜릿해!
“뭐 만드는 거야아?”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깬 건지 하양이가 눈을 비비며 내 쪽으로 날아왔다. 거의 없는 것 같은 조그만 날개로 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잘 잤어, 하양아?”
“으응.”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웃거리는 게 뭔가 얻어먹고 싶은 모양새였다. 어제 지쳐 잠든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마침 밥이 다 되었다. 뜸을 들인 냄비를 연 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뒤집어주었다. 쌀알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막 한 쌀밥이 또 얼마나 맛있게요. 나는 숟가락으로 밥을 퍼 하양이에게 내밀었다. 하양이가 숟가락을 덥석 물었다.
우물우물. 밥을 먹은 하양이가 입을 벌리며 웃었다.
“맛있다아아….”
“점심때도 맛있는 거 먹을 거니까 기대해.”
메뉴는 부침개로 정했다. 내 말에 하양이가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때, 이상하게도 가슴속에 낯선 감정이 솔솔 피어올랐다. 설렘, 기쁨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뭔가 이질적이었다. 내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하양이를 응시했다. 하양이가 내 질문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네 감정이구나.”
하양이가 얼마나 신나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생생히 들어찼다. 감정이 오롯이 전달될 수 있다니, 신기했다.
“감정도 서로 공유하는 거야?”
“원할 때마안.”
다행이다. 알버트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이 모두 하양이에게 전달되는 건 곤란했다. 알버트를 보면 내 감정은 널을 뛰니까.
그 모든 감정을 하양이에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양이가 나중에 직접 그런 감정을 느껴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만.
아직 순수한 하양이를 보면 좀 먼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하양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인사했다.
“무슨 마음인지 알려줘서 고마워.”
내 말에 하양이가 헤벌쭉 웃었다. 아이 같은 미소는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내 감정을 전달해 주고 싶었어.”
“왜?”
“내 설명은 항상… 부족하니까.”
인간의 말을 쓰는 게 익숙해 보였던 알렉산더와 달리, 하양이는 아직 말이 서툴렀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차이겠지.
하양이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로제가 해주는 음식 좋아.”
“…….”
“로제도 좋아.”
하양이에게 가식이란 없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직구뿐이다. 난 그게 참 좋다.
하양이의 순수한 감정이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이렇게 기뻐하는 하양이를 보며 어떻게 계약을 후회할 수 있겠어.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국을 옆에 내려놓은 후 다른 냄비에 물을 넣어 올렸다. 알버트에게 항상 챙겨주는 삶은 달걀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게서 밥을 얻어먹은 후 하양이는 다시 폴폴 날아가 책을 펼쳤다. 앞발로 페이지를 넘기며 보고 있는 하양이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 보였다.
“책은 어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아….”
하양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드래곤마다 진화하는 속도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고….”
드래곤으로 태어났다지만, 하양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정보는 본능적인 것뿐이다. 자신의 500살 생일날, 진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 모든 드래곤의 머리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나도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할 작정이었다. 알버트에게 기초도 배워볼 셈이었다.
“힘내자.”
나는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격려했다. 하양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삶의 이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는 정 붙일 곳이 없었으니까.
팔팔 끓는 물에 달걀을 집어넣은 후 나는 하양이가 보는 책을 마저 읽었다.
성체 드래곤이 되는 고통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사실 담고 있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 가지 이목을 끄는 구절이 있긴 했다.
-드래곤이 태어나는 곳은 드래곤의 둥지, 혹은 무덤이라 한다. 그곳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계약자는 성공적으로 진화를 마친 드래곤과 이곳을 방문하고, 그들의 흔적은 벽화로 남겨진다.
드래곤의 둥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둥지는 아무나 갈 수 없었고,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했다. 고위 마법사가 아니라면 위치를 알아내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알버트는 알고 있으려나.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팔팔 끓는 물에서 달걀을 건져낸 나는 아침상을 마저 차렸다.
미리 해둔 겉절이와 달걀말이를 그릇에 옮겨 담았다. 감자국을 뜨고 삶은 달걀까지 놓으니 완벽한 아침상이 완성되었다.
계란으로 만든 요리가 좀 많은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당당했다. 가장 만만한 게 계란 요리인걸?
트레이 가득 요리를 담은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음식이 많아서 꽤 무거웠다.
…조금만 덜까? 고민하던 찰나에 방으로 향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왕자님, 하고 부르기도 전에 알버트가 내 손에 있던 트레이를 가져갔다. 잽싼 손길에 나는 멍하니 멈춰 섰다. 알버트는 트레이를 자연스레 들며 무게를 가늠하듯 이리저리 움직이다 미간을 좁혔다.
“다치면 어쩌려고….”
“왕자님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다치겠어요.”
나는 능청스레 그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알버트가 나와줘서 기뻤다.
신기한 일이었다. 알버트는 항상 내가 뭐라 말하기 전에 먼저 나서서 도와줬다. 먼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채고, 먼저 내가 할 행동을 예견했다.
난 그런 그가 좋다.
***
우리는 책상 위에 그릇을 차례대로 내려놓았다. 알버트는 감자국을 보곤 픽 웃었고, 나는 매운 게 최고라며 덧붙였다.
제 앞에 놓인 삶은 달걀을 보는 알버트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표정을 읽기 힘들 때처럼.
“오늘도 새벽에 훈련하셨을 테니까 왕자님의 근육을 위해 단백질을 준비했어요.”
“그렇지.”
“먹기 싫으면 안 드셔도 돼요.”
“아니, 좋다. 네가 해주는 것이라면.”
…이렇게 훅 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어? 심장이 감자기 뜀박질을 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수저를 들었다.
“다행이에요. 왕자님 표정이 좀 걱정되어서….”
“내 표정이 어떻길래.”
“음, 읽기 힘들어서 무슨 표정이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묘했어요.”
내 말에 알버트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반쯤 뜬 눈에 미미하게 씁쓸함이 비쳤다.
“이 순간이 그리워질 것 같다 생각했다.”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이,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가 내가 쉽사리 꺼내놓지 않는 진심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탑에서 나가면, 이곳 같은 삶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에게 주어진 의무도 다소 가벼워진 채, 평범히 생활할 수 있었던 나날.
이전의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나날이기에.
“이곳에서 너를 만나게 되어 다행이었다, 로제.”
알버트의 눈매가 우아하게 접혔다. 웃는 얼굴은 흐드러진 꽃처럼 아름다웠지만, 그의 목소리, 말, 행동이 내 가슴을 더 세차게 두드렸다.
그의 음성은 심장 깊숙이 녹아내렸다.
“저도 이곳에서 왕자님을 만나 다행이었어요.”
처음 로제의 몸에 빙의했을 때는 왜 하필 로제인가 싶었고, 계속되는 감금 생활에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떠나 알버트를 만날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내 생애 알버트처럼 완벽한 남자는 만날 수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으니까.
***
비가 세차게 내렸다. 창문에 빗방울이 닿으며 소리를 냈다.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하양이와 함께 위로 올라왔다. 하양이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나는 알버트에게 마법에 대해 가르쳐 달라 했지만, 알버트는 단호한 얼굴로 거절했다.
“이곳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왜요?”
“아직 마법 제한이 걸려 있거든. 저주를 건 마법사들을 뛰어넘는 마력을 가지지 못하면 거의 아무런 마법도 쓸 수 없어. 원하면 풀 수야 있지만… 일주일 정도면 나갈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구나.”
내가 설거지를 하고 오는 동안, 알버트는 지팡이를 통해 메르시와 리암의 연락을 받았다.
“로스투라투가 귀족들의 사병까지 모두 모으고 있다더구나. 내가 두렵긴 한 모양이지.”
알버트가 해사하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병사들이 모두 궁으로 집결하고 있단다. 대단하신 부성애지 않느냐?”
덤덤히 이야기하지만,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밖에 보이던 병사들의 숫자는 그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던 것이다.
알버트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현재 동원되는 병사는 무려 3만 명. 어디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줄 알겠다.
이만한 수의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한 법. 그냥 오는 것도 아닐 테고 무장도 하고 올 텐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탑을 둘러싸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로스투라투는 후폭풍 따위 상관없이 알버트를 죽이기 위해 정말 전력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하….”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알렉산더의 악몽은 그에게 현재의 상황을 읽고 행동하게 하는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시켰다.
로스투라투 그레이는 이미 단단히 미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