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을 정정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알버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태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잠자리도 없는 다락에 널 재우는 게 마음 편할 줄 알았더냐.”
…여태 그렇게 재우셨는데요. 그리고 멀쩡했는데요?
“어차피 두 사람이 자도록 제작된 침대지 않으냐. 옷 갈아입고 내려오거라.”
“아니에요, 왕자님. 제가 어찌 왕자님과 같은 침대에서….”
“처음에는 먼저 달려들더니.”
나는 알버트에게 정말 강하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원해 침대로 기어들어 간 여자는 내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같은 로제 아티어스인 만큼 이 행동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이유를 찾아냈다.
“하지만 왕자님, 계약도 아직 남아 있고.”
“접촉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합의된 것으로 아는데.”
겨우 찾아 가져다 붙인 이유가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 내 뒷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알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제대로 말한 적 없다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로제? 그럼 다시 알려줄 수 있다만.”
말이 정말 청산유수다. 내 생애 나는 알버트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그는 금방이라도 내 목덜미를 잡아채고, 입술을 훔칠 것 같았다.
내가 흠칫 뒤로 물러서자 알버트가 웃었다.
“안심하거라. 아직 다른 뜻은 없단다.”
저 왕자님은 그 말이 더 나를 긴장시킨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아직이라면, 나중엔 달라질 거란 뜻인가.
“말싸움에 이길 수 없다면 빨리 순응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지.”
“…….”
“네가 말을 잘 따라주면, 화가 좀 풀릴 것 같기도 하고.”
살살 사람을 회유하는 말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핑계를 대도 알버트는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일 테고, 나는 결국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겠지.
그래, 그냥 자기만 하는 거잖아.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그냥 자는 거다. 속으로 주문 외듯 중얼거린 나는 알버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왕자님을 이길 수 있을 날이 올까요?”
한탄하듯 뱉은 말에 알버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너를 진정으로 이기는 날이 올까 궁금하구나.”
매번 내게 져주고 있다는 말일까.
알버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먼저 침대에 누워 있으마.”
그의 목소리가 온몸을 간질였다.
알버트가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언제 준비한 건지, 욕실 안에는 내가 갈아입을 옷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녀의 옷을 챙겨주는 왕자라니,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이야.
하지만 내심 알버트가 나를 챙겨줬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괜히 야릇하게 느껴지는 지금의 상황도 나쁘진 않았다.
…나 알고 보니 변태였던 건가. 하지만 알버트 같은 남자가 이렇게 행동하는데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칙칙하기 그지없는 슈미즈로 갈아입는데 머릿속이 여러 생각들로 가득 찼다. 성에서 했던 입맞춤을 떠올리니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무 일도. 아무것도… 그냥 잠만 자는 거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왕자님?”
알버트는 정자세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달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긴 속눈썹 덕에 그늘이 졌다.
고요히 그의 숨소리만 울렸다. 정자세로 잠들어 있는 모습이 마치 성자 같았다.
하긴 피곤하겠지. 알버트에게도 긴 여행이었을 터다.
몸에 탁 긴장이 풀렸다. 알버트는 정말 사심 없이 날 걱정해서 한 말인데, 거기에 별생각을 다 한 내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살풋 웃었다.
“진짜 거절할 수 없는 부탁만 하고.”
“…….”
“그래도 당신이 이걸로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면 괜찮겠다, 생각하는 내가 바보인지도 모르겠고.”
나는 알버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커튼을 쳤다. 달빛에 눈이 부셔 알버트가 깰까 걱정되었다.
그의 옆에 누우니 새삼스레 또 마음이 콩닥거렸다. 품에 안긴 적도 있고, 입을 맞춘 적도 있는데 이게 뭐라고.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알버트를 가만히 보았다. 그가 자고 있으니 이렇게 훔쳐봐도 괜찮다는 게 큰 이득이었다.
“진짜 잘생겼다….”
나도 몸이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점점 눈꺼풀이 감겼다. 하암. 크게 하품을 한 나는 이미 잠든 알버트에게, 그가 깨어 있을 때는 하지 못할 말을 건넸다.
“잘 자요, 알버트.”
한 번쯤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꿀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목소리까지도 참을 만했다.
제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숨이 턱 막혔다. 겨우 가라앉혔던 열망의 불씨에 로제가 기름을 냅다 쏟아부은 격이었다.
항상 왕자님, 왕자님, 해서 이름을 부르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한 번 상상해 본 적 있었다. 꽤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여겼을 뿐, 실감이 나진 않았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니, 기분이 좋은 것을 초월해 몸의 상태를 난감하게 만드는 수준이어서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제 몸 상태를 그렇게 만든 로제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얄밉기 그지없는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 들어찼다.
“하….”
네가 날 이길 수 없기는 무슨. 속으로 중얼거린 알버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몸을 식혀야 할 듯했다.
***
알버트의 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로제, 일어나거라.”
나는 부신 눈을 비볐다. 바깥 하늘이 생각보다 우중충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찾아올 시간이다. 내려가서 준비하거라.”
“아, 그렇지.”
일주일마다 식량을 보급하는 병사들이 문을 두드리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뭘 가져다주려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자님, 빨리 일어나셨네요?”
“…누구 덕에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데 왜 뒤에 불길이 솟는지 모르겠다. 이 안에 있는 건 나뿐인데 어제 나보다 먼저 잠들어놓고 왜 죄를 뒤집어씌우는지, 억울하다.
알버트는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를 손에 쥐었다. 이미 갈아입은 옷을 보아하니 한참 전에 일어난 모양이었다.
책상 옆에 놓인 검을 보니 아침 훈련도 마친 듯 보였다. 고급스러운 검집이 알버트와 잘 어울렸다.
머리를 쓸어 넘긴 알버트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자, 보고서다.”
“와, 거의 잊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벼락치기로 쓰던 보고서까지 알버트가 대신 써주다니. 왕자를 부려먹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나는 묘한 기분으로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로스투라투의 말을 떠올렸다
“왕자님, 저 대신에 보고서 써주신 것은 감사한데… 대체 뭐라고 쓰신 거예요?”
“저번 보고서?”
“로스투라투도 크게 떠들었거든요. 연회에서.”
“아아, 뭐라고 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군.”
알버트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말한 대로일 거다. 나름대로 열심히 썼는데 먹혔던 모양이구나.”
“이번에도 비슷하게 쓰셨나요.”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이번에는 더 수위를 높였다.”
“…예?”
금방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턱을 매만지는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지막으로 왕을 방심하게 할 기회니까.”
“…그렇군요.”
“너도 오늘 이야기를 나눌 때 열심히 살을 붙여보는 것은 어떠냐. 내가 아프다고 해도 좋겠구나.”
“명 받들겠습니다.”
낮은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로스투라투를 친다는 게 조금 더 실감이 났다.
“아, 편지는 읽고 싶다면 읽어보아도 좋아.”
알버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날 당황하게 만들려는 모습이 얄미웠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극구 사양했다. 읽으면 얼굴이 빨개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알버트에게 나를 또 놀릴 기회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요즘 들어서 내게 거는 장난이 확실히 늘어났다. 당연히 나도 그의 말이나 행동에 당황하는 빈도수가 늘었다.
“마음대로 하거라.”
알버트가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어제처럼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로스투라투를 무너뜨릴 생각에 신이라도 난 걸까.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오늘 아침은 감자국으로 결정했다.
“그럼 아침도 같이 준비해 올게요, 왕자님!”
부엌의 테이블 위에는 하양이가 고롱고롱 잠들어 있었다. 테이블 바로 옆에는 하양이가 보다 만 듯한 책이 떨어져 있었다.
-드래곤과 계약자.
책의 표지를 흐뭇하게 쳐다본 나는 떨어진 책을 주워 먼지를 털고 하양이 옆에 놓아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식사 준비에 돌입할 때였다.
오랜만에 부엌에 있으니 전투력이 상승했다. 알버트의 마음에 들 만한 밥을 해야지!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문 가까이 다가섰다.
“네, 로제입니다.”
“일주일 동안 아팠다 하더니… 상태를 보고해라!”
식량을 전달해 주던 밥과 존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을 아예 바꿔 버린 듯했다.
아예 병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어쩌면 로스투라투의 명을 받드는 귀족이 알버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일 수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몸살이었습니다. 당연히 밥도 제대로 해 먹지 못했고요. 죄송합니다.”
“…왕자의 상태는?”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심하게 옮아 왕자도 지금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참에 제 욕망을 채우려 해요!”
하하! 나는 악역처럼 사악하게 웃었다. 아까 알버트에게 편지를 어떻게 썼냐 묻던 사람은 없었다.
로스투라투를 방심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도 열심히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역이 앞당겨진 것은 분명 내 탓이다. 그렇다면 그의 반역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도 노력해야 했다.
문밖의 남자가 솔깃한 듯 물었다.
“많이 아픈가?”
“네, 그렇습니다.”
알버트의 불운에 기뻐하는 모습이 보지 않아도 선했다.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이 우스웠다.
그러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번 주 식량은….”
“안에 있는 걸로 대충 해치워라. 이번 주 식량은 없다.”
“네?”
“그럼 우리는 이만 물러가지.”
알버트 목을 칠 때가 되니 그에게 주는 음식마저 아까워진 모양이다. 그들은 원하는 말만 들은 후 사라졌다.
“아니, 사람이 밥은 먹어야 하는데….”
나쁜 놈들. 밥 없이 어떻게 살라고! 한국인에게 밥이 얼마나 중요한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