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S공금]
“모든 것을 해보고 싶다 했던 아이다. 내 곁에서 그냥 도망칠 순 없단 사실은 애초에 알았을 테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말고 방법이 더 있겠느냐.”
리암은 여기서 숨겨보았자 알버트의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저 침묵하는 것이 소리 내어 말하는 것보다 더한 긍정이란 건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만.”
리암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알버트는 먼지를 쓸어주듯 툭툭 만졌다. 사려 깊기 그지없는 행동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줄 작정이다. 하지만 나도 어떤 생각인지 정도는 알아야 공평한 것 아니냐.”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리암은, 여기서 숨겨보았자 결국 알버트가 제 입을 열게 만들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자신보다 그 여자가 직접 이 일을 진행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알버트가 수긍할 수도 있었다.
“저하의 행복을 위해 잠시 거리를 두고 싶다고 했습니다.”
알버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가슴을 갈라 심장을 보여줘야 믿어줄까. 기간은?”
“…한 달 정도라고 했습니다.”
“한 달 정도는, 괜찮겠지.”
검을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으며,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생각 외로 선선히 나온 말에 리암은 당혹스러웠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탑에 나가 로제의 공을 치하하고 나서 한 달은 네게 맡기마. 궁을 한바탕 청소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거다. 평생을 끼고 살 텐데 한 달 정도야.”
로제의 공은 빠르게, 그리고 신속히 치하되어야 했다. 아직 궁이 부산할 때 일을 처리해야 로제에게 많은 것을 몰아줄 수 있었다.
“다녀올 곳이 있기도 하고.”
“예?”
“드래곤의 둥지에 다녀와야겠다.”
드래곤의 둥지는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새로운 드래곤들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둥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동굴에 가까웠고, 안에 드래곤들에 대한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어째서입니까?”
“드래곤의 계약자를 바꾸는 법을 확인하기 위해서.”
리암이 헉, 소리를 삼켰다. 왜 알버트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택한 길입니다. 저하께서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왕으로서의 위엄도 보일 수 있으니 내게도 이득이지. 오로지 로제를 위한 것은 아니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다. 표정과 목소리에는 전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리암은 그 모든 말이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긴다 해서, 숨겨지지 않는 게 있다.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띠던 알버트의 눈이 동요하고 있었다. 물가에 던져진 돌멩이가 수면에 파동을 일으킨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더 이상 부정하는 게 바보 같을 지경이 되었다.
제 주군은, 정체와 출신도 제대로 모르는 그 하녀에게 기어코 마음을 주고 만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지. 제 주군도 사람이니까.
‘…어차피 사라질 감정인 것을.’
리암은 로제가 말한 것을 믿는 쪽이었다. 밖에 나오면, 탑이라는 좁은 공간이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착각은 사라질 터다. 그러면, 이성을 잃은 알버트도 여태 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한 달.’
로제 아티어스는 이곳에서 최대한 떨어진 남부 바닷가로 보내야겠다. 나중에 연락이 끊어지면 더 안성맞춤이었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도록 해야겠군.’
…음식은 생각보다 맛있었고 생각도 제대로 박힌 하녀였지만, 그게 알버트의 곁에 둘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괜찮을 것이다.
제가 아는 알버트는 사람 한 명 사라진다고 해서, 미쳐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
“악몽? 괜찮던데? 생각 못 한 것도 아니었고.”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슈버트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당분간 저하의 얼굴을 제대로 뵙지도 못할 거라니….”
악몽 때문에 우울한 줄 알았더니 기사단에서 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길고 긴 설교에 지쳐 그런 모양이었다.
마침 잘되었다. 나는 슈버트를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아까 준비한 치킨을 주기 위해서였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저도 선물을 준비해 봤어요.”
“뭔데?”
“제가 저번에 얘기했던 치킨이라는 음식. 식었지만, 식은 것도 맛있어요.”
슈버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치킨을 보고서 내가 독을 뿌린 것은 아닌지, 이게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인지 관찰하기 바빴다.
이내 자신이 한 행동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슈버트는 치킨을 포크로 찍었다.
식긴 했지만, 치킨은 또 식은 대로 맛이 있는 법이지. 그가 치킨을 한입 물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괜히 저하가 좋아하신 게 아니구나.”
그가 치킨의 바삭한 겉껍질을 씹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치킨의 매력에 빠진 슈버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쵸? 납득할 만하다니까요.”
“아니! 납득한 것은 아니고.”
슈버트는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남은 치킨을 열심히 집어 먹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손등을 향했다.
그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너.”
“아, 계약했어요. 저.”
“목숨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눈을 휘둥그레 뜨는 슈버트를 보며 내가 머쓱한 얼굴로 답했다.
“목숨 무서운 줄 알아서 한 건데요.”
내 말에 슈버트는 이해할 수 없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던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 목숨도 아닌데.”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말하는 슈버트의 시선이 내게 유난히 길게 머물렀다.
“죽는 게 취미야?”
“…아니요?”
그런 게 취미인 사람이 어딨어?
“그렇구나. 그럼 저하 명 거부하는 게 취미인가?”
“…그것도 아닌데요?”
“됐어.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슈버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다시 치킨을 먹는 데 집중했다.
뭐야, 걱정해 주는 거 맞네.
아무래도 내 걱정을 하는 그 자신을 인정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달라진 말투가 낯설긴 했지만, 이쪽의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이번 외출은 생각보다 수확이 컸다. 슈버트와 리암의 경계심을 낮추기도 하고, 메르시도 만났고.
생각도 정리해 하양이의 계약자도 되었지. 나는 후 숨을 내쉬며 손을 꽉 쥐었다.
몸에 흐르는 마력이 확실히 느껴졌다.
드래곤마다 마력의 정도도 다르다던데, 하양이는 대단한 잠재력을 가진 것 같았다.
한 가지, 로제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으로 계약한 게 마음에 좀 걸렸다.
하양이는 로제 아티어스와 계약한 게 아니라, 나 유정인과 계약한 건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아, 가봐야겠다.”
슈버트가 시간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버트에게 보고를 올릴 시간이 된 듯했다.
“그럼 나중에 봐.”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낸 슈버트는 리암 다음으로 알버트와 이야기를 하러 들어갔다. 그런 그의 등에 대고 리암에게도 치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라고 부탁한 후, 나는 하양이가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법에 대한 책을 몇 권 골랐다. 마력을 운용하는 법 등,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리암에게 허락을 받고 난 후 하양이와 마저 짐을 꾸린 나는 알버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방 앞에 앉았다.
주위 시종을 전부 물린 탓에 쪽팔리지는 않았다.
“고로롱….”
내가 악몽을 꾸는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었던 하양이는 결국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다. 알버트가 문고리를 잡은 채 나를 발견하곤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웃었다.
“갈 준비 끝났어요, 왕자님.”
“수고했구나. 잘했다.”
다소 덤덤한 대답과 휘어지는 눈매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무겁겠구나. 도와주마.”
알버트는 내 짐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가자, 로제.”
알버트는 예전과 다름없이 웃어주었다.
뭔가 이상했다. 알버트가 내가 계약자가 된 상황을 쉬이 납득할 리 만무했다.
나는 하양이를 품에 꼭 안았다. 하지만 알버트의 눈길은 하양이 대신 내 손등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준비하느라 수고했다.”
던지듯 말한 알버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작별 인사를 간단히 끝낸 후, 우리는 공터로 순간이동을 하고 하늘로 올라갔다.
알버트의 주문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메르시의 것보다 훨씬.
탑에 가까워질수록, 탑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탑 주변을 철저히 감시했다.
수는 나갈 때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했다.
“쓸데없는 짓이군.”
알버트가 병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에게 사람의 수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우리는 마저 길을 걸어 탑의 다락으로 돌아갔다. 탑의 다락은 떠날 때처럼 조용했다.
우리는 다락에서 내려갔다. 나는 우선 잠든 하양이를 부엌으로 옮겨주었다. 정말 피곤했던지 하양이는 오늘 길에도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간 나는 옷을 갈아입은 알버트와 마주쳤다. 리암의 성에 있을 때와 다르게 수수하고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셔츠였지만 나는 이쪽이 훨씬 익숙했다.
새삼스레 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앞으로 탑에 있을 시간은 얼마 되지 않겠지만….
알버트와 단둘이서 있을 기회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러면, 이 기회를 확실히 이용하는 게 좋았다.
“왕자님, 정말 화 풀린 거 아니시잖아요.”
나는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물었다.
알버트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했다.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게 네게 중요하더냐.”
…이렇게 말하는데 화가 풀렸을 리가 있어? 나는 그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알버트는 제 감정을 삭이는 데 너무 익숙한 사람이었다.
“탑에 있는 동안, 제가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뭐든 맡겨만 주세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테고.”
역시나 들켰다. 나는 헤헤 웃으며 힘차게 말을 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도 드리고 싶습니다!”
알버트가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내 화를 풀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네.”
알버트의 눈꼬리가 밤하늘을 밝히는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그럼 오늘부터 내 곁에서 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