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뒷말을 삼킨 나는 다시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제 말의 요점이 그게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로제.”
그가 나를 안았다. 꽉 안긴 품 안은 그의 손보다 훨씬 따듯했다.
나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거 아세요, 왕자님? 꿈에 왕자님도 나왔어요.”
“…….”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떠나가셨다고요. 저는 혼자 있었는데….”
“잊거라.”
꿈을 떠올리며 말을 잇는데 알버트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마음 한구석에 욱여넣은 채 외면하던 불안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제가 제일 두려웠던 건 왕자님께서 저를 떠나는 게 아니라, 다시는 왕자님을 보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
“알아요, 저도. 혼자 남는 게 어떤 기분인지. 왕자님, 제 말을 들어주세요. 할 수 있다고 믿고 도와주세요. 전 모두가 행복해지길 원해요.”
나를 껴안은 알버트의 몸에 힘이 빠졌다. 바위처럼 무거운 한숨 소리가 귓가를, 내 양심을 콕콕 찔렀다.
나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나를 껴안은 알버트의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믿어주세요. 그리고 도와주세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때맞춰 하양이가 온 것이다.
“제가 문 열게요.”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하양이가 주춤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나는 허락할 수 없다.”
하양이를 품에 안은 순간, 알버트의 나지막한 말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고저 없는 목소리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알리는 듯했다.
그가 순식간에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매끄러운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니 입맛이 썼다. 하기야 알버트 성격에 여태 들어준 것만 해도 대단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알버트가 하양이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때, 나는 쓰게 웃으며 하양이의 입속에 상처를 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닦지 않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내 의사를 알아차린 하양이가 내 피를 핥았다.
드래곤과의 계약에 필요한 가장 간단하고 원초적인 재료는 혈액이었다. 서로의 영혼을 공유한다는 의미로 나누는 피가 계약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드래곤이 인간을 계약자라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서로 목숨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니까.
하양이와 내 주변에 하얀색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이 새하얗게 반짝이며 내 몸을 감쌌다.
하양이가 입을 움직이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로제, 네 이름을 말해줘.]
계약자의 성명을 묻는 간단한 절차에 나는 멈칫했다. 로제 아티어스의 삶이 익숙해졌지만… 아직 마음은 정인으로 살아온 기간이 더 긴 탓이다.
…어차피 알버트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내 진짜 이름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하양이에게는 적당히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유정인.]
하양이의 눈에 순간 붉은 기가 돌았다가 사라졌다. 나와 하양이는 동시에 숨을 헐떡였다.
따끔하는 통증에 손등을 보니 하양이를 닮은 하얀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양이의 목덜미를 움켜쥔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알버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을 뜬 그는 하양이를 매섭게 응시했다.
“넌 로제를 죽일 거다.”
“아니야.”
하양이는 한결 또렷해진 말투로 알버트에게 맞섰다.
“나도 로제가 죽길 원하지 않으니까.”
“…….”
“나도 로제랑 같이 살고 싶으니까.”
나와 함께한 시간이 하양이에게 삶을 살아갈 동기를 부여했다면, 알렉산더는 하양이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줬다. 하양이의 마음이 성장한 것이다.
내 결심을 다시금 말해주듯, 하양이가 느릿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절대 죽지 않을 거야.”
“…….”
“지금부터… 공부할 거야.”
알버트 앞에서 제 결심을 말하며 말을 흐리고 싶지는 않았던지, 하양이의 말소리는 무척 느렸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공부할 책, 가지러 갈 거야.”
하양이는 알버트를 응시하며 제 결심을 보여주겠다는 듯 굳은 얼굴을 했다. 하양이의 앞발이 알버트의 손을 목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포르르 날아갔다.
계약이 끝났다. 하양이가 방을 나갔다.
하양이와 나는 이제 생을 공유한다. 내가 죽으면 하양이가 죽고, 하양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하양이의 500살 생일날, 나는 그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
짧은 실소 후 알버트가 머리를 헝클었다. 알버트가 공허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텅 빈 눈을 나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네가.”
무표정한 얼굴인데, 나는 그가 울 것 같다 생각했다. 허탈한 듯, 숨을 내쉬며 알버트가 나를 응시했다.
“로제, 내 스승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
“드래곤의 계약자였던 스승님은 드래곤이 500살이 되는 날, 시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내 말문이 막혔다.
“마법을 모르는 분도 아니었는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자결하셨어.”
알버트도 마법을 혼자 배우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의 스승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럼 꽤 오래전에 죽었다는 걸 텐데….
알버트 주위에 있는 사람 중 죽지 않은 사람을 찾기는 드물었다. 그게, 그가 그레텐을 곁에 두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각은 경험에서 비롯되는 법. 나는 그의 두려움에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 듯했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 안 죽어요.”
나는 알버트에게 다가가서 그를 안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세게 껴안았다. 아늑한 품은 되려 내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안 죽어요.”
나는 다시 선명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를 안심시킬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었다.
“진짜로요.”
알버트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가 내 몸을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순간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 들어찼다.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다. 잘 웃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고.
나를 한참이나 껴안은 그는 내 턱을 쥐었다.
나른하게 치켜뜬 눈 사이로 보이는 시선은 여전히 따스했다.
“로제, 우리 키스할까.”
낮게 드리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처음 이 질문을 할 때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하지만 지금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훅, 그의 향기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과 전혀 다른 키스였다.
한 치의 숨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가 고개를 비틀었다. 긴 입맞춤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부르르 떨자, 알버트가 아주 잠깐 입을 뗐다. 나는 물에서 나온 아이처럼, 허겁지겁 숨을 들이마셨다.
낮게 웃는 알버트는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끝난 듯했던 입맞춤은 다시 이어졌다.
내가 숨을 들이마신 후에, 알버트가 다시금 입술을 붙여왔기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은 예전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흘렀다. 알버트가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격렬했던 키스와 달리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의 눈길이 나를 집요히 보고 있었다.
“…지금은 안 되겠구나.”
내게 말하는 건지, 그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노크 소리에 그가 내 턱을 쥔 손을 놓았다.
“넌 절대 죽을 수 없어, 로제.”
짓씹듯 말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전과 다름없는 여유를 갖춘 그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 같았다.
“돌아갈 채비를 하거라.”
그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리암과 퀭한 얼굴의 슈버트가 서 있었다.
***
로제 아티어스가 나간 후, 리암은 알버트의 기분이 무척 저조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유는 알 만했다. 해서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상황 보고를 마쳤다. 알버트가 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하는 보고였다.
반역이 앞당겨져 사람들을 모으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예프넨 후작의 참수는 많은 사람을 동요하게 했다.
알버트 편에 붙으려는 사람도 물론 존재했지만, 알버트가 이기지 못할 시 그들에게 주어질 형벌이 두려워 차마 로스투라투에게서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로스투라투가 탑에 갈 시간에 맞춰 병사들을 준비하고, 로스투라투가 없는 궁을 먼저 습격한다. 본래 그와 정면으로 맞서려 준비하던 것과 전혀 다른 계획이 되었지만 사상자는 훨씬 줄어들 터였다.
“검은.”
“가져왔습니다.”
리암은 슈버트와 함께 찾아온 알버트의 검을 내밀었다.
오로지 알버트를 위해 제작된 바스타드 소드였다.
보통 검이 아니라 마력을 넣어 쓸 수 있는 검은 그의 키와 몸무게, 검을 휘두르는 방식까지 모두 고려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알버트는 리암이 건넨 마검을 받아 들었다.
그가 검집에서 검을 꺼냈다. 제대로 날이 선 검신에서 푸르른 빛이 났다. 알버트의 손가락이 칼의 날을 슬슬 쓸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알버트가 직접 고른 것이 아니라, 그가 탑에 있을 때 리암에게 명령해 만들게 한 것이었다. 그의 눈에 차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던 리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득, 알버트가 물었다.
“로제가 네게 무슨 도움을 청하더냐.”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리암이 당황스레 눈을 깜빡일 때, 검을 살피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알버트가 비스듬히 고개를 올리며 그를 응시했다.
“말하거라.”
덤덤한 눈은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