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미 알고 있었겠지. 내게 요리를 해오라던 순간부터 이미 작정했을 거다. 내가 할 말을 준비하는 동안, 그도 나를 설득할 말을 준비한 것이다.
처음 다이닝룸에 들어왔을 때 그가 보고 있던 책이 그 증거였다.
나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붉은 노을처럼 타오르는 시선은 강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고목 같았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생각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과연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
“어디 한번 말해보거라.”
그가 오만한 군주의 얼굴로 명했다. 이미 나를 다 읽고 있는 것처럼.
알버트가 나를 잘 읽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본디 사람은 서로 가까울수록, 선입견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재해를 겪었어요, 왕자님.”
나는 덤덤히 이야기했다. 그는 메르시에게 이미 알렉산더가 선택한 재해가 무엇이었는지 들었을 테다.
역시나, 알버트는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덤덤히 나를 응시하는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잘 알겠구나. 계약자가 되면 얼마나 큰 고통이 오는지 이미 겪었을 테니까.”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는 모른다. 내가 겪은 악몽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왕자님, 저는 거기에서 하양이가 죽는 모습을 봤어요.”
그제야, 그가 동요했다. 여태 산처럼 꿈쩍도 않던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당혹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생일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하양이를 보며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저는 그 순간을 후회했어요.”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건 저와 왕자님 사이에도 해당되는 말이잖아요.”
“드래곤과 사람은 다르단다, 로제. 살아가는 시간도, 삶도.”
“왕자님, 저는 하양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차마 그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시선을 조용히 내리깐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요, 더 이상.”
“…….”
“가족을 그렇게 보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어떤 표정을 할까, 궁금했다. 내 과거는 처음으로 털어놓는 것이었으니까.
고개를 살짝 올렸다. 알버트의 얼굴은 읽기 어려웠다. 그가 일부러 얼굴에 표정을 지웠는지도 몰랐다.
“그게 제게 가장 큰 고통이었어요.”
샹들리에의 빛 아래 진 그림자가 그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그는 지독하게 피곤해 보였다. 눈두덩이를 짓누른 알버트가 짓씹듯 내뱉었다.
“안 돼.”
단번에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로제, 이건 그냥 네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계약을 한다고 해서, 네가 그 드래곤 새끼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바로 말을 잇는 것을 보니, 그렇게 생각한 걸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적어도 제가 계약을 한다면 하양이가 살 확률은 높아지겠죠. 저도 살아남아 성체 드래곤의 계약자가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거고요.”
“이상적이기 그지없구나. 네 말대로 되면 좋겠지만,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란다.”
알버트가 냉소적으로 빈정거렸다. 사선으로 변한 짙은 눈썹 아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여전히 우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채찍처럼 사실을 내리쳤다. 알고 있다.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도 이야기하러 온 거예요. 말씀드렸듯, 저는 하양이가 그냥 죽게 놔둘 수 없어요.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몰라도, 이제 와 외면할 수는 없어요.”
만일 내가 하양이가 탑에 들어왔던 순간 바로 내보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드래곤을 안에 들였다. 알버트에게 온 정신을 쏟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알버트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오갔다. 어느 한쪽도 의견을 굽힐 마음은 없다. 평소처럼 적당히 그의 생각에 맞춰 이야기할 생각도 없다.
알버트가 나를 보았다.
그는 어느새 식탁을 돌아 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미간을 좁히는 얼굴마저 한 폭의 그림이다. 그가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팔짱을 낀 알버트가 나를 응시했다. 아니, 내 쪽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네가 바보같이 정을 줄 줄 알았어.”
“…….”
“내 자신을 탓해야겠지. 그 드래곤이 처음 탑에 기어들어 왔을 때 죽여야 했다. 네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섬뜩했다. 현대사회에 살던 나와는 전혀 다른 윤리관을 지닌 사람이다. 그와의 차이가 퍼뜩 실감이 났다.
알버트 그레이는 생명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 없는 남자다.
알버트는 제 시선 속의 살기를 부러 숨기지 않았다. 내가 알길 바라는 것처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왕자님, 하양이를 죽이시면 안 돼요.”
알버트의 눈꼬리가 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을 가면처럼 뒤집어쓰고, 내게 말했다.
“로제, 증오도 살아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거란다.”
“그저 살아 있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르죠.”
나는 그 차이를 잘 안다. 하양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죄책감에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게, 정말 사는 걸까?
아니, 그건 알버트의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난 네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전혀 없단다. 난 네게 설득시킬 시간을 줬고 넌 실패했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고개를 숙인 알버트와 시선을 맞췄다.
“…잔인하시네요, 왕자님. 전혀 설득당할 생각이 없으셨잖아요. 제가 당장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오지 않았던 건 왕자님을 존중하기 때문이었어요.”
“존중이라.”
내 말이 우습다는 듯 조소한 알버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 같은 살벌한 눈으로 알버트는 내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네가, 내게 감히 잔인하다 할 수 있느냐.”
주먹에 불거진 핏줄이 그의 목소리처럼 선명했다. 답답한 듯 풀어 헤친 단추 사이로 보이는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래곤 새끼의 안위 걱정에 바빠, 나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으면서.”
단언컨대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혼자 남을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존중이라 할 수 있느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내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건 습관에 가까운 건지, 이 와중에도 희미한 미소가 남아 있어 오히려 그가 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혼자 남는 건 지긋지긋하게 겪었다.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하는 건 존중이 아니라 기만이라 하는 거란다, 로제.”
한 글자씩 새겨 넣듯 느리게 말하는 얼굴에 가득 찬 감정은 복잡했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망설인다면, 그에게 불안만 심어주는 꼴이다.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급해 보이지 않도록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죽지 않는다면 기만이 아니죠.”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구나.”
“왕자님께서 슬퍼하실 거 알아요. 저도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아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고서 계약을 해버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부딪칠 것을 알면서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을게요. 진심이에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다시 웃는 법을 배웠고 갑자기 다른 세계로 뚝 떨어졌을 때도 살아남았다. 심지어 나를 죽일 사람이었던 알버트와 사랑에 빠졌다.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하려 애썼다. 신기하게도, 방법을 찾으니 해답은 나타났다.
나는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믿는다.
“그 어떤 고통이라도 버티면 되잖아요.”
승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로제는 본래 흑마법사였고, 그에 따라 몸에 마력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하양이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면 계약자와 드래곤은 서로의 마력을 공유하게 된다.
드래곤은 아직 성체가 되기 전이라 마법을 쓸 수 없지만 계약자는 이야기가 다르다. 드래곤의 마력으로 다른 마법사들을 상회하는 재능을 가질 수 있었다. 새끼 드래곤도 계약자의 비호로 성체가 되기 전까지 수월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계약은 시작점이다. 그 후에 드래곤의 가능성을 얼마나 확장시키고 바꾸어 나가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물론 한번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면 무를 수 없다는 치명적인 사실 때문에 마력만 보고 군침을 흘리며 계약을 하려 드는 마법사들은 드물었지만.
“왕자님,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요.”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알버트의 손을 감쌌다. 그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차갑게 내리꽂았던 말과 다르게 그의 손은 여전히 따듯했다. 한숨을 내쉬는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네 노력이 결과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제가 고통 때문에 왕자님을 두고 떠날 만큼 비겁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저도 겪었고, 알아요. 그러니까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낼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그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왕자님께서 도와주실 테니까.”
책 속에서 드래곤이 언급된 적은 없지만, 알버트가 가장 강한 마법사로서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그런 그에게 배운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지 않겠어?
나는 계약의 좋은 점을 어필하기 위해 애썼다.
“생각해 보자면 왕자님과 더 가까워질 기회기도 하잖아요. 드래곤의 계약자면, 그 혈통이 본래 어떠했는지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알버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그건 본래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뒷말이 돌게 놔둘 듯싶으냐?”
“으음, 아무튼 얼마 되지 않는 드래곤의 계약자는 매력적인 타이틀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날 보며 다정히 말했다.
“네게 칭호나 명예가 중하다면, 원하는 대로 주마.”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그리고 그렇게 나한테 다 퍼주면 폭군이나 다름없잖아!
나는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