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오랜만이에요. 너스레를 떨며 맞이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가 둘러준 로브는 안쪽에 누벼진 솜 덕에 따듯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난 이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악몽 속 차디찬 얼음 같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진짜 목소리. 나를 보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알버트를 만나니 새삼스레 악몽이 끔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경험이었지만, 차가운 그를 마주하는 건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었다.
깊이 숨을 내쉰 나는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보라 속에서도 그의 품은 따듯했다.
코끝에 감도는 냄새가 좋다. 방금 목욕이라도 하고 온 걸까?
“…로제?”
알버트가 어깨를 흠칫했다. 놀랄 법도 했다. 내가 그에게 이렇게 들이대는 건 처음이니까.
평소 그와의 접촉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편이지만, 지금은 좀 위로받고 싶었다.
그의 가슴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맞춰 숨을 들이마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지만, 비현실적인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가 내게 웃어주었듯이.
“저도 오랜만이에요, 왕자님.”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당혹감은 찰나에 녹는 눈처럼 금방 사라졌다.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가자꾸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잡았다. 누구도 계약 조항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떠나기 전에 키스했던 그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하양이는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 내 머리 위에 앉았다. 생각보다 균형을 잘 잡아 놀랐다.
하양이가 알버트를 응시했다. 뭔가 열심히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하양이가 알버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오오… 오랜만이야아….”
하양이가 먼저 용감히 말을 걸었다. 알버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눈을 내리깐 그는 하양이를 가만히 보다 말했다.
“…그렇군.”
다소 어색한 대화지만 마음은 흐뭇해졌다. 드래곤을 좋아하지 않는 알버트가 하양이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준 것만도 어디냐 싶었다.
***
성으로 돌아가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난 알버트에게 하양이와 계약을 할 작정이고, 죽지 않게 도와달라 말해야 했다.
아, 내가 드래곤의 재해를 겪고 악몽을 꿨었다는 사실도 말해야 한다. 그저 멀리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시종 분장을 하고 저택으로 숨어들었다고.
알버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간다. 왜 리암이 내게 모든 일을 떠넘겼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우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제일 먼저 급한 일부터 물었다.
“왕자님, 저희 당장 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괜찮다. 로스투라투는 병사들 모으기에 여념이 없으니, 오늘 쳐들어오진 못해. 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하는 마법이 아직 걸려 있거든.”
그 안에 드나들 수 있는 건 오직 너와 나뿐이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덧붙이는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게 탑에 돌아가는 시간을 틈타 할 말을 정리하려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다. 나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마침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나는 성문을 지나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냉큼 입을 열었다.
“아, 하양아, 방에 가서 쉬고 있어. 내가 데리러 갈게.”
“알겠어어어….”
하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 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계약을 하기로 결정하고 하양이와 논의하면서, 한 가지 정한 사실이 있었다. 알버트에게 계약에 대해 말할 때, 하양이는 다른 곳에 몸을 피하고 있는 거였다.
알버트가 화를 낼 것은 뻔했고, 분노한 그가 하양이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알버트가 내게 유한 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하양이가 복도를 지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 나서 알버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왕자님, 배고프시죠? 제가 저녁 만들어올게요.”
그의 손을 재빨리 놓으려던 순간, 알버트가 내 손을 외려 꽉 잡으며 그 쪽으로 끌어당겼다.
생각지 않았던 힘에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알버트가 내 허리를 감싸며 나를 낚아채듯 품에 안았다.
넘어질 뻔했다.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기대는데, 뭔가 단단한 것이 닿았다.
…알버트의 가슴팍이었다.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게 분명한 단단한 가슴은 내가 안기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내 얼굴이 알버트에게 보이지 않음에 감사했다.
“조심해야지.”
“…그러게요. 앞으로 조심해 주세요, 왕자님.”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한 내 너스레에 알버트가 나지막이 웃었다.
알버트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아래로 내렸다. 내 얼굴에 가까워지기 위함이었다. 오른쪽 뺨과 귀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가려고 해서 그랬다. 그리고 네가 다칠 일은 없었어.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으냐.”
“…아니요.”
그건 확실히 인정했다. 알버트의 반응 속도는 사람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네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저 저녁도 못 먹고 왔어요, 왕자님. 밖에 있는 동안 제 음식이 그립지는 않으셨나요? 예전에 해드렸던 궁극의 치킨도 해드릴 수 있는데!”
나는 알버트에게 해다 바친 요리 중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을 택했다.
“나보다는 네가 더 적극적인 모양새야.”
“그야 저는 치킨을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시간도 필요하고요. 뒷말을 삼킨 나는 어깨를 축 내렸다.
“안 된다 하시면 바로 방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무방합니다. 그렇죠, 왕자님께서 이야기하자 하시는데 제가 어찌….”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알버트가 날 그에게서 살며시 밀어냈다.
“능청 그만 떨고. 네가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오거라.”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니, 계속 달려가려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완벽한 설명 기대하고 있으마.”
알버트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다면.
진짜 난 알버트의 손바닥 안인 모양이다.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난 어쩐지 진 기분이 되어 부엌으로 향했다.
***
리암의 성은 정말 질 좋은 재료가 많았다. 알버트의 말에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나는 즐겁게 요리를 시작했다.
가끔 하는 요리는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요리하면서도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우선은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하니 꿈 얘기로 시작해야겠지.
…왜 내가 마음에 둔 이들과 헤어지는 것을 싫어하는지.
누군가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친구들은 나에 대해 아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를 모르는 이들은 모르기 때문에 입에 담지 않았던 주제였다.
로제의 과거가 어떤지 모르니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알버트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거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었다.
닭을 조각내 핏물을 빼고 미리 준비한 밀가루 반죽에 넣어 옷을 입혀주었다.
낯선 공간에서 음식을 하고 있으니 탑이 생각났다.
치이익. 기름 속에 떨어트린 반죽이 튀겨진다. 적당한 온도다. 나는 기름 속에 잘 손질된 닭을 차례대로 집어넣었다.
반죽을 머금은 닭다리가 기름 속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중간중간 치킨을 뒤집으며 속까지 촉촉하게 익혔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치킨 사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사업은 아무나 하나. 나는 그냥 소시민으로 살련다.
일부러 양은 늘려 리암과 슈버트의 몫도 남겼다. 둘에게 신세를 지고 있기도 하니까.
슈버트는 특히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바로 불려갔다니 더 미안했다. 내가 따라가는 바람에 함께 있다가 잠들었던 거니까.
…로스투라투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면, 긴급 소집 명령도 내리지 않았을 것 같아서 찔리는 마음도 있었다.
나는 잘 튀긴 치킨 위에 미리 준비한 파를 얹었다. 물에 꽤 오래 담가 매운맛을 쏙 뺀 것이었다.
“양념을 못 한 건 아쉽네.”
리암의 성에는 고추장이나 간장 같은 양념과 조미료가 없었다. 아마 대중적이지 않은 재료들이라 아예 성 안에 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알버트에게 올릴 요리를 만드는 걸 허락해 준 거겠지. 출처와 맛, 구성이 보증된 재료만 들여놓으면 내가 독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이상 그를 독살하긴 힘들 테니까.
요리가 끝났다.
나는 치킨을 물끄러미 보다가 과도를 들어 손가락에 작은 상처를 냈다. 슥 긋는 순간 쓰라림이 느껴졌다.
으으, 싫다. 하지만 그 몰래 상처를 만들어두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상처를 꾹 누르자 손끝에 핏방울이 몽글몽글 솟았다. 나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치킨을 트레이에 올렸다.
…나는 부디 내 예상이 틀렸길 바라며 주방을 나섰다.
나는 지나가던 시종에게 하양이 몫의 치킨을 전해달라 하고는, 하양이가 치킨을 다 먹고 나면 다이닝룸으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확실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두었더니 마음이 편했다. 이래서 마음의 준비가 중요한 법이다. 나는 트레이를 끌며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노크 후 안에 들어서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알버트가 보였다.
…드래곤에 대한 책이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식탁에 치킨을 내려놓았다. 알버트가 책을 덮어 의자에 내려놓았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다, 로제.”
나는 책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리며 웃었다.
“네, 이야기할 준비도 되었어요. 먹고 바로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파닭으로 준비해 봤어요. 고추장 같은 양념이 없어서.”
먹을 때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었다.
내가 해온 치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먹어야겠지.”
알버트와 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먹을 때도 이야기하면 체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는 조용했다. 나는 마지막 만찬을 먹는 기분으로 닭다리를 크게 물었다.
아삭. 매운 기를 뺀 파와 바삭한 치킨 껍데기, 촉촉하면서 부드러운 살결이 동시에 씹혔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치킨의 기름진 맛을 아삭한 파가 완벽히 잡아줬다. 맛있다. 역시 양념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지!
알버트도 꽤 잘 먹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마시고 있으니 음료수가 그리웠다. 아, 치킨에는 역시 맥주인데. 탑에서도, 여기서도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왕자님, 이 음식에는 맥주가 잘 어울려요. 나중에 같이 먹어야 하는 아주 좋은 조합입니다.”
내 비장한 말에 알버트가 눈을 깜빡였다.
“나와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는 거냐, 로제. 퍽 유혹적이구나.”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흑심은 없었다!
“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거부하니 좀 섭하구나.”
그가 웃었다. 알버트의 미소는 북풍에도 굴하지 않는 화사한 봄이다. 사람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제 아랫입술을 잠시 짓누른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계약자가 되려는 이유가 무어냐.”
이미 내 답을 알고서 묻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