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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7화 (57/156)

57화.

잠에서 깨어난 나는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부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겨우 든 나는 내 가슴 위에 앉아 펑펑 울고 있는 하양이를 발견했다.

“허어엉… 로제에에… 일어나아….”

나와 알버트가 아플 때도 이 정도로 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손을 올려 하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쉬이, 괜찮아. 괜찮아, 하양아. 그만 울어.”

“나, 나….”

내가 눈을 뜬 모습을 봤는데도 하양이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직감했다.

악몽을 꾼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너도, 악몽을 꿨구나.

알렉산더는 하양이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맞설 기회를 준 것이었다.

진짜 인생 선배 노릇 제대로 해주고 가네. 나는 하양이의 등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하양아, 네 악몽은 뭐였어?”

“내가 죽고….”

하양이의 두려움은 더 이상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꾸, 꿈에서 로제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제 너 같은 드래곤 새끼는 필요 없다고….”

자신이 완전히 잊히는 것이다.

나는 하양이의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마저 닦아주었다.

“하양아, 내가 네 계약자가 되게 해줘.”

“하지마안-”

“나는 고통보다 너를 잃는 게 더 두렵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나는 하양이에게 내가 꾼 꿈을 알려주었다. 하양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죽고 싶지도 않다.

알버트가 나와 하양이의 계약을 막은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죽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하양이를 잃고 싶지 않아 결정한 계약으로 알버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얼마나 트라우마로 남을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 세상은 그대로 끝나는 듯했지만, 나는 살았다. 계속 살아갔다. 그 속에서 나는 삶의 다른 의미를 찾고 다시 웃는 법을 배웠다.

회사에 다닐 때도, 이 세계에 처음 떨어져 로제의 몸에 빙의했을 때도 눈앞은 깜깜했다. 하지만 난 방법을 찾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양이의 계약자가 되고 나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을.

내 모든 가정에, 내가 죽는다는 전제는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

로스투라투가 예프넨 후작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우 몇 시간 전 깨어난 로스투라투는 예프넨 후작의 저택에 쳐들어가 직접 그의 목을 잘랐다 했다.

광기에 물든 눈동자. 부들부들 떠는 몸. 그의 주변에 고인 예프넨 후작의 핏물은 그를 괴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알버트를 죽이려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책 속의 로스투라투는 알버트가 탑에서 나오기 전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 권력을 만끽하며 방탕하게 놀기 바빴다.

내가 알렉산더를 만났기 때문에 알렉산더의 재해가 바뀌었고, 바뀐 꿈 때문에 로스투라투와 예프넨 후작의 운명이 변했다.

로스투라투는 알버트를 잔인하게 죽일 셈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로스투라투가 병사들과 기사들을 모으는 데 바빠 아직 탑으로 쳐들어가진 못했다는 거다.

“병사들이 찾아와 탑 안을 확인할지 모르니 빨리 탑으로 돌아가야 해. 그나마 마법진이 발동하기 전에 일어나 다행이군.”

내게 상황을 설명해 준 리암이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메르시는 알버트에게 지금 상황을 알리러 갔고, 리암은 마법진 발동 시간 전에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업고서라도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따라 헐레벌떡 지하로 내려가 마법진 안에 섰다. 하양이를 품에 꼭 안은 채였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뭐가 빠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슈버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려 이 저택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 슈버트는요?”

“급하게 불려갔다. 로스투라투가 기사들을 모두 불러들였어. 긴급 소집이니 적어도 두 시간 후에야 저택에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아, 맞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었지.

…그것보다 날쌔고 촐랑거리는 다람쥐 같던 모습이 진짜에 가까운 것 같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 날 걱정하며 옆에 있던 슈버트를 떠올렸다. 알렉산더의 범위 안에 있었으니 잠들었을 테지.

슈버트가 우리 편이었음을 아는 만큼 알렉산더가 나처럼 배려해 줬을 것 같긴 하지만, 악몽을 겪었을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몸은 괜찮은 건가요?”

내가 슈버트를 걱정할 줄은 몰랐는지 눈을 크게 뜨던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이다. 그런데….”

리암이 말문을 흐렸다.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둠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그렸다.

새까만 밤하늘 같은 흑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 속 녹음이 푸르렀다.

“너도 나빠 보이지는 않는군. 재해를 겪은 것치고는.”

리암이 덤덤히 말한 후에야, 나는 그가 내 안부를 물었다는 것을 알았다.

“네, 저도 괜찮아요.”

“새끼 드래곤은 깨어나자마자 계속 울었다. 네게 데려다주면 그칠까 싶어 함께 두었는데도 그치질 않더군.”

그가 흘끔 하양이를 응시했다. 물론 그의 눈에 드래곤으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리암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계약자가 될 건가?”

알버트가 나를 왜 이번 일에 끼웠는지 알고 있기에 묻는 거겠지.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거예요.”

“꿈속에서 그 고통을 겪었음에도?”

“…제가 겪은 악몽은, 하양이의 계약자로서 겪을 고통이 아니었거든요.”

“그럼 무엇이었지?”

“소중한 이들을 잃고 혼자 남는 것이었어요.”

벽에 기대어 있던 리암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나를 올곧이 응시했다.

‘소중한 이’가 아니라 ‘소중한 이들’이라 하는 내 말에서, 꿈에 알버트가 나왔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조금의 침묵 끝에 리암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저하의 곁에서 도망칠 생각인가?”

악몽을 꾼 후 내 생각에 바뀐 것은 아닌지 궁금한 모양이다. 로스투라투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한 것처럼.

그의 눈빛이 나를 샅샅이 훑었다. 내 진심을 읽기 위해서.

“왕자님 곁에서 멀어질 것은 맞는데….”

말꼬리를 흐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도망이라기보다는 서로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에게 도와달라고 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말을 바꾸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닌데.

나는 찬찬히 내 생각을 설명했다.

“탑에서의 상황은 특수했으니까요. 저를 아끼시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것 알아요. 그래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아주 솔직히 말하면 이 행동엔 내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와 함께할수록 난 그에게 더 빠져들 텐데, 나중에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할 때의 절망을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알버트의 얼굴을 떠올리다 웃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전 왕자님이 행복하시길 바라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저하가 행복하길 바란다라….”

리암이 내 말을 되뇌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행히 내 말을 듣고 화난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알버트가 한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왕자님께서 직접, 원하는 건 한번 다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렇군.”

리암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스투라투를 친다 해서 바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 상황도 안정시켜야 하고, 그를 따르던 귀족들도 차례대로 처리해야 한다.”

나는 리암의 말에서 많은 게 생략되어 있다 느꼈다.

“피가 꽤 많이 튀겠군요.”

“그렇지. 저하는 널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 하실 테고 아마 내게 네 안위를 맡기시겠지. 혹은 슈버트에게.”

“…그럼.”

“이때를 노리는 것으로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준비를 끝내두마.”

“네.”

리암의 말에 그가 생각보다 알버트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랐다.

나라도 알버트가 그럴 것 같긴 했다. 반역의 현장에 나를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고민이 됐다. 내가 알버트에게서 멀어지려 한다는 건 알버트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는 모른다.

…그에게 그것까지 귀띔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말하는 순간, 알버트는 그곳에 찾아올 것이다. 그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좋아, 딱 한 달. 한 달만 멀어진 후에 알버트가 변하지 않는다면, 날 여전히 찾는다면 그를 찾아가는 거다. 그때는 내 의심을 꼭꼭 지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그를 사랑하자.

생각에 잠겼던 나는 리암이 마법진 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공작님은 같이 안 가세요?”

“나는 이곳에 더 머무를 예정이다. 여기에서 귀족들의 동태를 더 봐야 하기도 하고…. 네 새끼 드래곤이 말해준 대로 이번에 죽은 청색 드래곤의 장례식도 치러야 하거든.”

“하양이가요?”

“메르시에게 전해 들었다.”

아, 메르시는 마법사니까 하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겠지. 알렉산더의 장례식을 챙기고 싶었지만,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를 대신해 하양이가 말을 전해준 모양이다.

대견하다, 우리 하양이.

뿌듯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리암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다. 참고로….”

그가 날 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 그의 인상이 평소와 전혀 다른 따스함을 풍겼다.

새삼스레 그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무려 북부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남자라는 걸 실감했다.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리암이 아, 소리를 내며 내게 말했다.

“이번 일 보고는 네가 한다, 아티어스.”

“…예?”

내가 멍청히 되묻자 리암이 못 박듯 선고를 내렸다.

“재해의 내용이 바뀐 순간부터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조목조목 저하께 보고하도록.”

“…아니.”

“며칠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메르시에게 언질은 해두라 했으니… 아마 널 기다리고 계시겠군.”

“…아니!”

그러잖아도 오늘 알버트와 이야기할 생각이긴 했지만, 그의 방을 찾아가기 전 생각을 좀 할 작정이었다! 저번에도 그의 유도신문에 당해 얼마나 땀을 뻘뻘 흘렸던가!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요! 나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행운을 빈다.”

네가 북부 공작이면 다냐,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쳐? 리암을 향한 원망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때, 시야가 뒤바뀌었다.

휘이잉. 나는 다시 눈보라 속에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뭐가 흩날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로제.”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악몽 속에서 날 괴롭혔던 목소리는 따스한 봄날처럼 날 감쌌다.

“춥겠어.”

알버트의 손이 내 몸 주변에 로브를 둘러씌웠다. 방금 전까지 한 모든 고민이 자취를 감추고 알버트, 그만 남았다.

“오랜만이구나.”

알버트가 눈부시게 미소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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