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로스투라투는 고자고, 제 몸뚱아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천치다. 만일 알버트가 탑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가 왕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시기를 조금 더 당긴다고 달라질 사실은 없다. 그저….
단둘이 있을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못내 아쉬울 뿐이다.
탑은 사람들에게서 완벽히 두 사람을 분리하는 공간이었으니까.
알버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빨간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알버트는 로제를 떠올렸다. 누워 있을 때도, 마법사를 고문할 때도 문득문득 떠오르던 얼굴을.
너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는 이번 재해가 그녀에게 계약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리라 확신했다. 그저 너무 놀라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알버트는 로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겨우 며칠 보지 않았다고, 특유의 말투와 어조, 웃는 얼굴, 그를 칭찬하는 모습까지 전부 눈에 담고 싶었다.
‘로제, 난 네가 보고 싶어.’
알버트는 오늘 하루 종일 휘두른 칼을 가지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칼끝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한숨을 깊게 내쉰 후, 가볍게 입고 왔던 셔츠를 벗었다. 감옥 바닥에 떨어진 옷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늘 사람들을 고문하며 묻은 피였다.
검에 묻은 피는 이미 차게 식어 검게 달라붙어 있었다. 알버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검을 닦았다.
발소리가 울렸다.
‘이곳에 올 사람이라면.’
리암과 슈버트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둘 다 아니라면….
방금 전까지 고문한 수장, 마탑주의 딸이자 현 수장인 메르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저하!”
멀리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오는 메르시가 보였다. 알버트는 미리 준비했던 새 셔츠를 입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달려올 이유가 있던가. 어차피 오늘 봐야 했던 것으로 아는데.”
메르시는 말을 잇지 못한 채 헥헥거렸다. 마법을 쓸 수 없는 곳이라 알버트를 찾아 감옥 곳곳을 뛰어다니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탓이다.
“로제는?”
숨을 헐떡이는 메르시를 응시하던 알버트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은 로제의 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메르시는 눈을 휘둥그레 뜨다 투덜거렸다.
“저하, 연인을 챙기시려는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그래, 문제.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면 되겠구나. 재해를 겪고 나서 로제는 어땠지?”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지금은?”
그럼 그 전에는 괜찮지 않았다는 소리 아닌가. 알버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메르시가 몸을 움찔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직접 들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깁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냐.”
“로스투라투가 예프넨 후작을 죽였습니다.”
“…뭐?”
알버트는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메르시는 알버트가 되물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가.
“…죽었다고.”
알버트는 턱을 매만지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이번 일이 로스투라투와 예프넨 후작의 사이를 갈라놓길 바라며 만든 일이긴 했지만, 로스투라투가 예프넨 후작을 쉬이 놓지 못할 것은 알고 있었다.
예프넨 후작은 로스투라투의 비위를 잘 맞췄고, 왕실–정확히 말하면 로스투라투-에 충성하는 자였으며, 뇌물도 꼬박꼬박 가져다 바쳤다. 심지어 로스투라투가 가장 신뢰하는 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지금은 죽은 로스투라투의 왕비도 예프넨 후작의 여동생이었다.
예프넨 후작은 로스투라투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제 잇속을 확실히 챙겼다. 그러면서도 제 위치는 정확히 알아서, 절대 주제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로스투라투가 측근을 마음대로 죽여 버렸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호재다. 아니, 사실 호재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흑마법에 대해 물어야 했는데.’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무엇이 그를 이리 조급하게 만들었지.’
로스투라투는 알버트를 탑에 처박아두며 현재 일어나는 가뭄, 귀족들의 횡포 등을 알버트의 탓이라고 떠넘겼다. 고아에 천박하기 그지없는 왕자를 데려온 것에 하늘이 노하여 이런 사달이 났다고.
반발하던 귀족들은 예프넨 후작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했고, 점점 쉬쉬하며 넘어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 과정만 보아도 로스투라투가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비겁한 자인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토록 신임하던 자를 단숨에 죽일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미쳐 버리지 않은 한.
알버트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가 감옥 출구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메르시는 헐레벌떡 그의 뒤를 따랐다.
“재해가 무엇이었지?”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꿈에서 겪게 하는 재해였습니다. 아마 로스투라투는 꿈속에서 억겁의 세월을 겪었을 겁니다.”
외투를 위에 챙겨 입던 알버트가 미간을 좁혔다. 재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던 탓이다.
두려움이라.
“원래 그것이던가.”
“본래 예정되었던 것은 지진이었습니다. 저택을 완전히 반으로 갈라놓으려 했었는데, 그 드래곤이 저녁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메르시가 잠시 멈칫하다 덧붙였다.
“아티어스 양을 만난 이후에요.”
알버트가 검 손잡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고 목소리가 낮게 변했다.
“그게 현 로제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고.”
메르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알버트도 굳이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로제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나을 터였다.
두려움. 공포. 로제와 너무 관련 있는 주제들 아닌가.
“리암은.”
“당분간은 수도에 계속 계셔야 할 듯합니다. 로스투라투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요.”
“또 다른 일이 있는 모양이지.”
“예, 로스투라투가 마탑을 뒤집어놓겠다 협박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드래곤의 재해는 마지막 발악이다. 예프넨 후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지만, 그 강대한 힘은 로스투라투에게도 악몽을 선사했다. 그렇다면 로스투라투가 겪은 악몽이 어떤 내용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래부터 심신이 미약하고 질투심이 강한 자였다. 알버트 역시 그놈의 질투심 때문에 탑에 갇힌 것이 아니었나.
드래곤의 재해. 예프넨 후작의 죽음. 알버트는 그 뒤에 무엇이 이어질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쩌면 너무 뻔한 수순이었다.
“직접 내 목을 치실 기세인가 보구나. 탑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하겠지.”
“심지어 이번 일에 협조하지 않으면 마탑을 허물겠다 했습니다.”
로스투라투가 썩어빠진 왕이라는 건 모두 알지만, 그는 권력 관리에는 꽤 예민한 편이었다. 전대 왕이 성군으로 일궈놓은 이미지와 권력도 한몫했다.
예프넨 후작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들이며 그와 견고한 동맹을 쌓았고, 기사단을 키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권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력이 최고라 믿는 이였다.
이 때문에 로스투라투에게 있어 마법사들은 골칫거리였다. 그는 마탑을 최소한의 지원으로 관리했고,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예 지원을 끊어버리겠다 협박했다.
마탑은 오로지 왕실의 지원만 받을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스투라투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로스투라투는 특히 마탑주에게 뇌물을 얹어주며 마법사들을 관리했다.
그걸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자가 바로 메르시였다.
마탑의 실세가 바뀌고 썩어빠진 로스투라투에 대한 믿음을 도려내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알버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일이었다.
알버트는 명을 내렸을 뿐이고, 실제로 온 건 슈버트였지만.
이게 메르시와 슈버트가 서로를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비슷한 또래였던 둘은 꽤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메르시는 출구 문을 열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로스투라투에게 흔들리는 마법사들을 처리하기 위해 슈버트를 부를지, 혹은 회유할지 생각에 잠긴 메르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버지가 그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메르시는 흘끔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알버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메르시에게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 마무리는 나중에 네가 할 수 있게 해주겠다 하지 않았느냐.”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메르시가 잠시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제 아버지를 떠올리는 그녀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그녀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끝은 제가 내야겠지요. 그것보다 지금 제일 큰 문제는 로스투라투가 왕자님을 직접 죽이겠다며 병사들을 몰고 달려올 기세라는 겁니다.”
“아아, 탑에 가만히 박혀 있으라 가두실 때는 언제고, 참 자애롭기 그지없으시군.”
알버트가 피식 웃으며 허공에 손을 올렸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시선이 섬뜩했다.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는 직접 맞아드려야지. 계획을 앞당기자. 어차피 지금 궁은 혼란스러울 거다. 제 수족을 죽인 사람을 어찌 믿겠어.”
때마침 떠도는 소문은 귀족들에게 설마, 하는 마음을 심어줄 것이다. 왕자가 정말 제 자리를 찾으려 든다면 차라리 그쪽에 붙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소문 말이다.
피해를 최소화할 기회다. 알버트는 이 반역에 불필요한 살인은 줄이고자 했다.
“리암에게 귀족들과 접촉하고 병사들을 모으라 하거라. 기사단에 있는 슈버트에게도 마찬가지다.”
“예, 알겠습니다.”
알버트는 제 명을 착실히 따르는 메르시를 보며, 반역의 때가 정말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긴 시간 공들여 준비하는 것이 본래 그의 성미에 맞았지만, 상황은 언제나 변하는 법이다. 그는 상황에 맞춰 달라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회가 새롭군.’
알버트는 로제가 제게 처음 키스를 요구하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과 다르게 집요한 눈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숨기지 못해 흘러나오는 열망은 끈적했다.
그때 그는 이 하녀가, 저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바로 깨달았다.
어렵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제게 그런 눈을 하고 다가오는 이들은 허다했으니까.
기분 더러운 신체 접촉을 하며, 이 하녀를 바로 죽이고 시체를 난도질하고 싶다는 충동이 하루에 몇 번이고 일었다. 하지만 하녀를 죽인 뒤 허무하게 죽어버릴 그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살아났는데.
어떻게 다시 살 마음을 먹었는데.
결국 알버트는 하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녀를 이용하는 것은 쉬웠다. 이제껏 그의 매력을 거부하는 이는 없었던 데다, 결국 이 하녀가 원하는 것 역시 그의 몸이었으니까.
나가자마자 이 하녀를 베자. 다시는 볼 일이 없도록.
그 후에는 왕의 목을 베고 그 정점에 설 것이다. 저를 아무렇지 않게 다루던 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말 것이다.
복수는 그를 다시 살게 하는 삶의 목표가 되었다.
로제 아티어스가 변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던가.’
로제를 떠올리던 알버트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그가 주문을 외우며 허공을 날았다. 메르시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