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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5화 (55/156)

55화.

나는 혼자였다.

“아….”

끈적끈적한 절망이 나를 잡아당겼다. 안개처럼 뿌연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떠나보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하양이를 허무하게 죽였다. 내가 그 조그만 드래곤에게 얼마나 마음을 주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후회할 줄도 모르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속으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때.

“로제.”

나를 부르는 알버트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조차 쉴 수 없던 순간에, 그의 목소리는 내게 산소를 불어넣었다. 그는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니까.

사막 속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난 허겁지겁 그에게 달려갔다.

나는 알버트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원했다. 평소처럼 가까이 오라 말하고,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왕자님?”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의 모습이 이전과 달랐다.

평소 봄바람 같은 따스한 눈으로 나를 보던 알버트가 아니었다.

맨 처음, 로제에게 빙의해 키스한 직후 마주쳤던 서늘한 시선이 나를 덤덤히 응시했다.

덜컹. 심장이 떨어졌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이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그를 밀어냈던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그는 잔인하게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한때에 불과했어. 네 말대로 탑에서 단둘이서만 있으니 내가 돌아버렸던 모양이구나.”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을 했다.

“한낱 하녀에, 나를 가두기까지 했던 인물이 대체 뭐가 좋다고.”

그가 하는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더 슬펐다.

“계약 내용은 지켜줄 테니 앞으로 얼굴 보지 말고 살자꾸나.”

알버트는 끝까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등을 돌리는 건 찰나였다.

내게서 멀어지는 건,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상하고 있었는데.”

나는 씁쓸히 웃었다.

드디어 나는 탑을 나왔다. 알버트는 계약서의 내용을 착실히 지켜줬다. 나는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알버트는 볼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왕이었고, 일개 하녀가 사사로이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고귀한 사람이었다.

“국왕 폐하 만세!”

“공정한 국왕 폐하 만세!”

저택 밖에서 사람들이 알버트를 칭송하며 떠들어댔다. 그의 초상화가 시민들 사이에 인기 상품으로 돌았다. 모두 알버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까마득히 먼 곳에 있었다.

몇 번, 알버트를 보고 싶어 궁에 찾아갔다. 하지만 난 궁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쫓겨났다.

알버트는 언제든 나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의 무력감이 나를 짓눌렀다.

시야가 아직까지 흐릿했다.

나는 이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생애 가장 곤두박질쳤던 순간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아버지를 동시에 잃고 혼자 남았던 시간으로.

집에 처박혀 한참을 울었다. 계속해서 울어 탈수 증상이 왔던 때, 친척 언니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에 갔다.

그때부터였다.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이들을 사랑하고, 내 모든 것을 주는 게 어려워진 건.

나는 혼자 남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잃는 상실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외로움과 고독.

내게 그건 육체적인 고통을 뛰어넘는 공포였다.

시간이 지나며 부모님과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았고, 나는 적당히 웃으며 지낼 수 있을 정도로 무뎌졌다.

트라우마도 점점 괜찮아지던 중이었다.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결해 주니까.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후.”

나는 얕은 숨을 내쉬며 눈가에 남은 눈물을 닦았다.

나는 처음 꿈이 시작되었던 탑 안에 돌아와 있었다.

점차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 이곳은 현실이 아니고, 내가 겪은 건 알렉산더의 마지막 재해이자 선물이었다는 사실까지도.

가슴이 아직 쿵쿵 뛰었다.

“…이게 심하지 않은 거면, 대체 다른 사람들은 뭘 겪고 있는 거야?”

악몽에서 깨어난다면 로스투라투가 바로 예프넨 후작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나는 드래곤의 힘에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정도의 힘을 고통으로 환산한다면… 엄청날 것이란 사실은 어렴풋이 안다. 알렉산더가 남기고 간 재해에 맞먹는 고통이라면, 더.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았다.

“역시, 계약자가 되어야겠다.”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물론 알버트에게는 말하고 난 후에 계약할 거였다. 그는 날 이곳으로 보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없이 계약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가 이 계약을 탐탁지 않아 하더라도, 이건 내 결정이다. 모든 걸 알버트가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다.

나는 날 차갑게 바라보던 알버트를 떠올렸다. 끙, 머리가 아팠다.

“…곤란하네.”

알렉산더의 꿈은 너무 효과적이었다.

그의 재해는 계약에 관한 답을 주었지만, 내가 지워 나가던 트라우마도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이는 내가 알버트와 거리를 두려던 이유였다.

꿈에서 알렉산더는 내 두려움, 공포를 꺼내 보여주었다. 꿈의 첫 부분은 하양이의 죽음으로 끝났다.

두 번째 부분은 알버트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나려 애쓰다 끝났다.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알버트를 사랑한다.

꿈의 끝은, 더 이상 그 없이 홀로 남은 나 자신이었다. 알버트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두려웠던 건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그가 쌓았던 시간이, 그저 한때의 추억에 불과해져 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렸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두려워하고 후회할 일은 그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탑에서 나간 후 그와 잠시 거리를 둬야겠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나와 알버트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저 한때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알버트를 알면서도 모르니까.

하지만….

탑에서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닌, 그가 원래 살아오던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그의 곁에 계속 있고 싶었다.

소문 같은 것에 굴하지 않고.

집안이나 신분 차이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현실과 같은 꿈을 겪고 난 후, 나는 그런 현실적인 이유에 초월해져 있었다.

***

횃불 옆에 기대어 선 알버트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고개를 삐딱하게 숙인 그는 검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무려 전대 수장이었던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이라니, 섭섭하구나.”

“아는 건 정말 다 말했소! 몇 번이나 말했지 않은가!”

남자가 절규하며 벽에 벌레처럼 착 붙었다. 알버트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의 몸 곳곳에는 칼로 베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은 정말 사람이 아니야!”

그는 제 모습을 보며 울부짖었다. 그의 손가락은 이미 사람의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어딘가? 정신이 나간 이들도 있었어.”

“…….”

“너무 큰 소란 피우지 마. 다리나 팔은 멀쩡하잖아? 검을 쓰게 해주려고 부러 배려해 준 것이거든.”

알버트가 웃으며 위로를 건넸다.

남자는 체면을 모두 벗어던진 채 알버트 앞에서 싹싹 빌었다.

“제발… 차라리 죽여주시오….”

“저런, 난 그대를 죽일 마음이 없어.”

알버트는 눈썹을 모으며 짐짓 슬픈 얼굴을 했다. 순식간에 변한 표정은 마치 연극배우 같았다.

“죽으면 더 이상 그대가 좋아하는 돈과 명예를 가질 수 없지 않은가.”

“…….”

“그것 때문에 날 탑에 가둔 건데.”

“그, 그건….”

그는 손에 쥔 검을 고쳐 잡았다.

“아직 살아 있는데 죽여달라니, 어림도 없는 말이야.”

알버트의 눈꼬리가 휘었다. 눈만 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현자였다.

하지만 그의 입매는 굳게 다물려 있었다. 붉은 눈에 언뜻 광기가 비쳤다.

“로스투라투와 작당할 때는 내가 복수하러 돌아올 거란 생각을 못 했나 보지. 이렇게 쉽게 겁에 질리면 곤란한데.”

알버트는 남자의 곁에 다가가 그의 손에 검을 쥐여주었다.

“일어나.”

남자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 검 손잡이를 잡을 수 있도록 친히 도와준 후,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일어나지 않으면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은가.”

“…….”

“아무리 로스투라투의 꾐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닐 거라 믿어.”

남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검을 잡고 섰다.

“그래도 아직 생각이란 걸 할 줄 알았군?”

알버트는 진심으로 놀란 듯 눈썹을 올리더니, 바로 검을 휘둘렀다.

알버트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남자의 어깨를 베었다. 순간 일어난 바람에 알버트의 앞머리가 흩날렸다.

그의 숨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이 다시 움직였다.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는 황급히 방어하기 바빴다. 알버트의 검은 다시 움직여 남자의 다리를 벴다.

검은 정교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정제된 동작들은 마치 검무를 연상시켰다.

“더, 더는….”

남자는 결국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알버트는 피가 묻은 칼로 남자의 목을 툭툭 쳤다.

겁이 많은 인간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말도 못 했다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겨우 이런 이들이 내 뒤를 쳤구나.”

알버트는 씁쓸히 웃었다. 이내 표정을 굳힌 그는 마법사들에게서 알아낸 사실을 되새겼다.

로제 아티어스의 스승이 누군지는 불분명하다. 우선 이곳에 있는 마법사는 아니었다. 그녀의 인상착의를 듣고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처음엔 모른다고 발뺌하던 이들은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알고 있는 걸 아무거나 주절거렸다.

예프넨 후작이 흑마법과 가장 가까운 사람일 거라는 말이었다.

예프넨 후작이 흑마법에 대해 알려달라며 비밀스레 마탑을 찾은 적도 많다 했다. 물론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건 흑마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적힌 서적을 주는 것밖에 없었다.

흑마법사들은 마탑에서 추방당했으니까.

‘예프넨 후작을 만나봐야겠어.’

그에게 실마리가 있다. 알버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로제가 흑마법사였다는 게 밝혀질 위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에 있는 마법사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을 다른 이가 아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장담하긴 어렵다.

‘소문이 퍼진다 해도 바로 덮고 없앨 수 있어야겠지.’

로제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언제쯤 사실을 이야기하려나.’

알버트는 로제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안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자신이 직접 말하겠지.

언제든 로제에 대해 불리한 사실이 밝혀지면 바로 덮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알버트는 로스투라투가 앉아 있던 왕좌를 떠올렸다.

‘왕.’

어차피 돌려받아야 했던 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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