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게 뭐냐! 누가 저 개새끼를 어떻게 좀 하거라!”
주변에서 픽픽 쓰러지는 귀족들을 본 로스투라투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절대로 잊지 못할 공포를 선사해 주지.”
알렉산더가 입꼬리를 죽 올렸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소름 돋는 미소였다.
처음으로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알렉산더는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상자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던 몸은 연회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커질수록 투명해졌다.
그의 몸에는 실체가 없었다. 점점 커지는 몸은 뚜렷하게 보였지만 만져지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천장 가까이 알렉산더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본래 알렉산더의 몸이었던 부분은 청색 안개처럼 뿌옇게 주위를 감쌌다. 연회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의 몸 안에 있었다.
청색 드래곤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성체의 모습을 한 것이 더없이 처연해 보였다.
사람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크기와 위압감이 모두를 짓눌렀다.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날 해치지 않을 것을 알지만, 원초적인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덜덜 떨던 내 품에 뭔가 쏙 들어왔다.
“로제에… 괜차나아….”
하양이가 내 품으로 파고들며 위로했다. 나는 하양이를 꽉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게 무슨…!”
알렉산더를 보며 삿대질하던 로스투라투도 결국 픽 쓰러졌다. 소파에 기절한 모습이 가관이었다.
알렉산더와 예프넨 후작은 아직 이야기 중이었다.
자기보다 훨씬 커진 투명한 드래곤 앞에서 예프넨 후작은 덜덜 떨며 주저앉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래도 알렉산더에게 복수할 시간을 좀 주어야 할 듯했다.
좋아, 지금이 기회다.
나는 쓰러진 로스투라투에게 다가갔다. 손에 와인병을 잡은 나는 고민하다 하양이에게 물었다.
“내가 건드린다고 깨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아… 이건… 알렉산더의 재해인 거어얼….”
하양이의 단호한 답에 나는 와인병을 열었다. 그리고 로스투라투의 얼굴에 와인을 콸콸 부었다. 그가 켁켁거렸다.
난 멈추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액체란 액체는 모조리 부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슈버트가 물었다. 나는 웃으며 와인을 로스투라투의 코 주변에 더 열심히 부었다.
“어, 슈버트 안 갔어요?”
“아니, 아까 드래곤이 얘기하는 걸로 봐서는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런데 진짜 뭐 하는….”
“감기라도 걸리라고요. 이왕이면 많이, 많이 아팠으면 해서.”
때릴까 생각도 했는데, 로스투라투를 만지는 건 싫다.
“살이 닿는 건 질색이니 물하고 와인을 열심히 부어 체온을 떨어뜨려 보려고요. 나이도 있으니 병에 약할 것 같고요.”
건강도 챙기지 않는 것 같은데, 몸의 면역력이 아주 나빴으면 좋겠다. 슈버트가 황당하다는 듯 날 봤다.
“…이상한 데서 지능적이구나, 넌.”
“불공평하잖아요. 왕자님은 지금도 누워 계시는데, 이 고자는 이러고 있다는 게.”
역시, 슈버트는 알버트에게 약했다. 방금 전까지 날 미친 여자 보듯 했던 눈이 온순하게 변했다.
“그건 맞는 말이네. 나도 같이 하지, 뭐.”
슈버트는 잽싸게 물병과 와인을 챙겨왔다. 우리는 로스투라투의 온몸에 와인과 물을 부었다.
슈버트는 왕자님을 위하는 일이라며 그의 겉옷을 벗겨 체온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와인이 소파 밑에 고이며 웅덩이를 만들었다. 로스투라투의 몸을 타고 뚝뚝 흐르는 게 피 같았다.
마치 살해 현장 같았다.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알버트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로스투라투가 머리를 부여잡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그가 절규했다. 나는 그의 흑역사를 열심히 관찰했다. 나중에 알버트에게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왕의 가장 큰 두려움은 왕자가 돌아오는 거군.”
알렉산더의 목소리였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성체 드래곤처럼 변한 알렉산더는 나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나의 재해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두려움이다.”
그가 내뱉는 말은 바람 같은 숨을 동반했다. 이에 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환상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두려움이지.”
알버트가 왜 드래곤을 좋아하지 않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들은 너무 압도적인 존재니까.
“네가 지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고, 필요하면 조종하지.”
그가 예프넨 후작을 한심하다는 듯 응시했다.
“날 그렇게 이용하려던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고작 지위를 잃는 거라니.”
재해를 일으킨 당사자이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보이는 모양이다.
알렉산더가 로스투라투를 흘끔 보았다.
“왕의 꿈속에 예프넨 후작도 집어넣었다. 현실보다 더 생생할 꿈이니, 잊지 못할 거다. 깨어나면 꿈의 잔상에 괴로워하다 그를 죽이려 들겠지.”
“…….”
“예프넨 후작가는 몰락할 것이다.”
로스투라투는 알버트와 예프넨 후작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짖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아까 전 느긋하던 모습과 대조되어 보였다.
“완벽한 결말이네.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예프넨 후작의 소행으로 예정되어 있기도 하니까.”
슈버트가 뒤에서 덧붙였다.
로스투라투의 최측근을 몰아내기 위해 더없이 완벽한 작전이었다. 슈버트가 모두 잠든 연회장을 보며 손뼉을 쳤다.
“네 완벽한 복수다, 드래곤.”
“…그렇군.”
알렉산더가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물에 비치는 잔상처럼 흐릿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이윽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 윽!
“원래는 좀 더 육체적인 고통을 생각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군.”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은 전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너희들도 잠들 시간이다.”
악몽에 빠져든 사람들은 지금 이 연회장 안에 있는 이들뿐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날 가까이 둔 것이다.
이건 알렉산더가 내게 해주는 배려다. 그는 내게 가장 큰 공포가 뭔지 알 기회를 준 것이었다.
“…….”
처음 내가 오두막에 들어왔을 때 인간을 증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 그는 나를 도우려 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겪었던 세상에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는 행동 같아서 뭔가 울컥했다.
알렉산더는 하양이와 닮아 있었다.
사람을 믿는 모습이.
그렇게 사람을 증오하고 배신당해 복수하러 이 자리에 왔으면서. 제 마지막에 남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내 주저함을 다른 의미로 알아들은 건지, 알렉산더가 덧붙였다.
“안심해도 돼, 넌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빨리 깨어날 거거든. 네게는 재해가 아닐 거야.”
“그래서 주저하던 게 아니었어요.”
“그럼 왜?”
알렉산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마워서 그랬어요.”
“…….”
“당신이 인간을 도와주는 게 고마워서.”
알렉산더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그가 웃었다.
“혹시 모르잖아? 어쩌면 네가 그 공포를 이겨내고 저 하얀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어서 저 조그만 새끼 드래곤이 진짜 성체 드래곤이 될지도.”
알렉산더가 하양이를 응시했다.
“만일 내 덕에 네가 진짜 성체 드래곤이 된다면, 이런 드래곤이 있었노라 역사에 남겨줘.”
“…….”
“나 같은 드래곤이 있었다고.”
하양이와 알렉산더는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응.”
하양이가 분명히 말했다.
“응. 그럴 거야.”
나는 알렉산더에게, 내 최선의 말을 건넸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알렉산더 님을 만나 다행이었어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가 아니었다면, 난 내가 겪을 시련과 이렇게까지 직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편안한 미소를 띠었다.
“다시 태어나면, 이제는 정말 차원을 뛰어넘어 보고 싶네.”
알렉산더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네 공포와 직면하고 싶다 했지.”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궁금하군. 고통에 의한 두려움이 더 클지, 상실감이 더 클지….”
의문을 담은 말을 끝으로, 나는 알렉산더가 만들어낸 재해-
“부디 해답을 찾길 바라.”
두려움 속에 빠져들었다.
***
나는 탑 안에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완벽히 알았다. 여기 날 데려온 이가 누구인지도.
흐릿한 안개 같던 주위 풍경이 점차 선명해졌다. 동시에 여기가 꿈속에 불과하다는 자각은 흐릿해졌다.
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오늘은 하양이의 500번째 생일이었다.
나는 하양이에게 좋은 추억을 쌓아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우리는 항상 함께 생활했고, 하양이는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나는 감히 계약자가 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계약자는 드래곤이 성체로 성장할 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육체적인 고통이라 생각했고, 그 고통을 이겨낼 용기가 없었다.
“미안해, 하양아. 계약자가 되어주지 못해서.”
내 사과에 하양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차나아….”
하양이는 오히려 날 다독였다. 자신이라도 그런 공포는 이겨낼 수 없을 거라며,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
“흐으으….”
하양이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 아파….”
어린 새끼 드래곤은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음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아파!!!”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하양이를 위로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하양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하양이가 죽어가는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계속 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계약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하양이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다 나를 응시했다. 원망의 그림자조차 없는 맑은 눈빛이 내게 죄책감을 더했다.
나를 보며 아스라이 웃던 하양이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서 사라졌다.
하양이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