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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3화 (53/156)

53화.

저택 후원에서 우리는 메르시와 다시 만났다. 메르시는 안에 로스투라투를 비롯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작전의 상태를 살핀 듯했다. 옷을 갈아입은 슈버트와 나는 저택에 시종으로 잠입했다.

나는 부엌에서 요리를 건네받아 트레이에 올린 채 연회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복도에도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자정이 되었지만 저택은 훤한 대낮처럼 밝았다.

겉으로 보기엔 소박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택 안은 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지는 건 모두 금으로 변했다는 미다스의 저택이라 해도 믿었을 터였다.

…이 고자 왕의 뇌는 정말 스펀지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이런 곳에 돈을 쏟아붓다니.

어서 알버트가 왕이 되어야 할 텐데.

나는 원작에서 알버트가 탑을 나가는 시점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몇 달은 남았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았다.

슈버트는 곁눈질로 내 상태를 확인하며 소곤거렸다.

“안경은?”

“잘 끼고 있습니다.”

아무리 바지를 입었다지만, 다른 남자 시종들에 비해 체격이 작은 내가 저택 안에 자연스럽게 숨어들 수 있었던 건 모두 마법 덕분이었다.

나는 성별, 얼굴이 모호할 정도로 흐릿한 인상을 주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내게 신경 쓰지 않아 체격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일하는 시종, 정도로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슈버트는 바퀴가 달린 2단 트레이를 밀고 있었는데, 아래 칸의 상자 안에 알렉산더가 들어 있었다.

내 2단 트레이 밑쪽 상자에는 하양이가 숨어 있었다. 메르시의 하이드 마법이 걸린 상자를 이용한 수법이었다.

“술과 음식을 나르다 드래곤이 상자를 세 번 쿵쿵 두드리면 우리는 자리를 피할 거야.”

슈버트가 알렉산더가 있는 상자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그때 네가 멀리 있으면 내가 세 번 손을 흔들어 알려줄게. 그런데 정말 안 피할 거야?”

“알렉산더가 제게 거짓말하면 평생 소멸한다는 맹세도 했잖아요.”

아까 전 리암은 몇 번이나 내 안전을 확인했다.

“…그건 그렇지.”

슈버트는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하더니, 그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걱정하는 거 아닌데.”

“네, 아닌가 봐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걱정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답해줬더니 또 꿍얼거린다. 슈버트가 구시렁거리며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나는 로스투라투가 있는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눈부시게 빛나는 샹들리에가 높다란 천장을 채우고 빛을 내고 있었고, 소파가 여러 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그냥 연회장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은근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손을 잡은 남녀가 자리를 피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저게 로스투라투군요.”

여자들 사이에 군림하듯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유일하게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게 누가 봐도 나 권력자다, 말하고 있는 꼴이었다.

로제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로스투라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보는 순간 알았다.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욕망, 탁하게 가라앉은 눈. 삶을 방탕하게 살아온 인물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오래 살수록 성격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로스투라투의 경우가 딱 그러했다. 그의 삶이 얼굴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그는 알버트보다 작은 체구였는데, 살집이 훨씬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육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 초라했다.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고는 있었지만, 사람들 사이에 있는 로스투라투는 형편없이 조그맣게 보였다.

탑에 살면서도 매일 자신을 관리하는 것에 여념 없던 알버트가 생각났다. 그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지도.

겨우 저런 사람 때문에.

알버트는 제 삶을 빼앗겼다.

책 속에서 알버트가 로스투라투를 죽이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짧았다.

반역이 성공했고, 알버트는 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로제’를 죽였던 검을 들고 단번에 로스투라투를 베었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나락까지 몰고 간 사람들의 허무한 죽음 뒤에,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나는 부디 그랬길 바랐다. 알버트가 저런 왕은 더 이상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행복했기를.

나는 트레이 손잡이를 꽉 잡았다.

시선을 돌린 나는 주변 테이블 위로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입가에는 서비스용 미소를 띤 채였다.

***

시종의 일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귀족들은 배 속에 청소기라도 들어 있는 건지, 음식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난잡하게 놀기 바빴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영화에서 보았던 귀족들처럼 서로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떠드는 사람들.

그러나 그토록 우아하게 행동하던 사람들도 시종 앞에서는 돌변했다. 깔보듯 그들을 다루며 자신이 갑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마주할 사교계가 이런 곳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나와 정말 안 맞을 것 같다는 사실도.

…알버트의 곁에 남아 있기로 한다면 마주해야 할 것들.

로제 아티어스는 하녀였다. 그 사실이 퍼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여러모로 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었다.

슈버트와 중간중간 마주쳤지만 알렉산더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최대한 로스투라투와 가까워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계속 그쪽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는 로스투라투의 테이블 위에 포도와 와인을 내려놓았다. 로스투라투의 추잡한 웃음이 귓가를 찔렀다.

“그래서 왕자님은 잘 지내고 계시답니까?”

“지금쯤 고통받고 있겠지. 하하! 아무것도 없었던 놈이 은혜도 모르고, 나를 뛰어넘는 왕이 되려 하다니.”

“그러니까요. 참으로 잘한 선택이십니다.”

“하하, 처음 데려올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형제 부모 하나 남지 않았는데 눈빛이 가소로웠지.”

“옳습니다, 옳아요.”

로스투라투 앞에 앉아 이야기하는 귀족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냥 장단을 맞춰주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회사에서 자주 해서 그런가, 억지로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찔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올라온 보고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행위를 요구해서 알버트를 곤란하게 했다고 하더군….”

로스투라투가 만족스러운 듯 크게 웃었다. 하하! 그놈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내가 직접 봐야 하는 건데!

…응? 저번 보고서?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파하는 동안 알버트가 대신 써서 보냈던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그런데 내용이 당혹스럽다. 로스투라투의 말투가 묘하게 끈적한 데다 ‘여러 가지 행위’라는 부분에 강세를 두어 말하는 것이 영 수상쩍었다.

내 글은 전체관람가로 그냥 ‘뭘 했다~’ 수준에 그쳤다. 아무리 보고서라도 너무 자세히 묘사하면 알버트가 기분이 나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버트는 뭘 쓴 거야?

“아, 지팡이 힘 때문에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는 말도 있었지. 키스해 달라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요구한다고.”

화르륵, 내 얼굴이 불타올랐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나도 평소 보고서 올릴 때 날조하는 편이긴 하지만…! 실시간으로 보고서에 대한 감상을 듣고 있으니 부끄럽다. 아무리 철면피인 나라도 이건 좀….

나중에 알버트한테 대체 뭘 썼는지 물어봐야겠다.

한편으로는 알버트가 존경스러웠다. 보고서의 의미를 알고 있으니, 그것에 충실했던 것 같아서.

이런 곳에서까지 완벽한 게 알버트답긴 했다.

“썩 어울리는 꼴이지. 왕이 얼굴만 잘생겼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 모름지기 권력이 있어야지.”

로스투라투의 망언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알버트의 미모를 인정하는 게 웃겼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생겼다는 말은 안 하는 것을 보아하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되는 알버트의 험담에 귀를 씻어내고 싶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엄청난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 대만 때리면 안 되나?

진짜, 여기서 한 대만 때리면…?

내가 로스투라투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할 일이 언제 또 있겠어.

마치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처럼 고뇌하던 참이었다. 연회장의 창밖으로 에메랄드처럼 푸르게 변한 하늘이 보였다.

처음 보는 하늘이었다. 밤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은 색이었다.

벌써 밤이 지난 건가 싶어 시계를 보았지만 아직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해가 뜨기까지는 멀었다.

저 멀리서 슈버트가 트레이를 밀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때가 온 것이다.

재해의 시작이라고 보기에 너무 아름다운 창밖의 풍경은, 알렉산더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귀족들도 모두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스투라투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무슨….”

슈버트가 트레이 밑의 상자를 열었다, 알렉산더가 꾸물꾸물 밖으로 나왔다.

연회장에 오기 전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품에 안겨 이동해야 했던 드래곤이 온 힘을 다해 날아올랐다. 그의 등에 있는 청색 날개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너, 넌!”

로스투라투 앞에 앉아 있었던 귀족이 알렉산더를 보고 삿대질을 했다. 알렉산더를 아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가 예프넨 후작인 모양이었다.

예프넨 후작의 말소리에 귀족들의 시선이 쏠렸다.

“뭐지…?”

“그냥 강아지인데?”

“누가 데려온 거지?”

물론 마법사가 아닌 귀족들은 알렉산더가 누군지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끼야아아! 알렉산더가 초음파 같은 소리를 냈다. 엄청난 고음에 귀족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산더의 동공이 커졌다. 쭉 찢어진 눈으로 그는 예프넨 후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증오가 가득한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가 짓씹듯 말했다.

“감히 계약을 빌미로 드래곤을 이용하려 들다니.”

투둑. 알렉산더의 몸에서 비늘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주위 귀족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리석구나.”

재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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