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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물의 하녀로 살아가기-52화 (52/156)

52화.

“하, 하양이가 어때서어! 로제가 지어준 거야아…!”

하양이가 드디어 반박했다! 나는 얼씨구나 하양이의 편을 들어줬다.

“맞아, 하양이가 어때서요! 직관적이고 귀엽고! 우리 하양이의 정체성을 너무 잘 표현하는데!”

드래곤이 침묵했다. 내 말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시는 분의 성함이 궁금한데요.”

“난 내가 지었지. 차원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알렉산더! 멋있지 않나?”

알렉산더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게 저 드래곤의 평생 목표였던 모양이다.

“…뭐, 이제 못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용감히 말한 알렉산더의 기세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이제 그건 그가 이룰 수 없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죽어가는 몸을 그 자신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울한 얼굴을 보며 나는 쉽사리 말문을 잇지 못했다.

“정말 거의 다 왔었는데… 제길, 나 같은 드래곤도 죽어가는데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우리 하양이가 아주 똑똑해서요.”

입을 다문 하양이 대신 내가 답했다. 알렉산더가 툴툴거렸다.

“별로 살 의지도 없어 보였는데.”

하양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평소 감정 기복이 없는 하양이의 얼굴이 묘하게 짜증 나 보였다. 하긴 알렉산더는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엄마의 말을 따랐던 것뿐이야아….”

“정말 잠만 잤다고?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대단하긴 하네….”

알렉산더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 보였다. 그는 제 앞에 선 하양이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위풍당당하게 섰다.

“아무튼, 어차피 죽게 된 거 이번에 내가 죽으며 남길 걸작을 잘 봐라. 사람들에게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키고 갈 거거든.”

걸작이 뜻하는 건 재해겠지. 드래곤이 죽으면서 일으킨다는 재해는 개체마다 달라서 딱 어떤 재해라 정의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심하면 많은 이들이 죽는다고 들었다.

혹시 드래곤은 죽을 때 어떤 재해를 내릴지 정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드래곤마다 특성이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재해를 일으킬지 결정할 수 있나요?”

내 질문에 눈을 끔뻑이던 알렉산더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당연하지. 마지막 힘을 어떻게 쓸지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공평하지 않나?”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제게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순순히 나온 사과에 놀란 듯 알렉산더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 주제를 돌렸다.

“아무튼 여기는 왜 온 거지? 내 장례라도 치러주러 왔나? 우리가 서로 친하지 않다는 건 알잖아?”

“제가 오자고 했어요.”

“인간이 왜?”

“하양이의 계약자가 될 생각을 하고 있어서, 뵙고 싶었습니다.”

계약자. 그 말이 나오자 알렉산더의 몸이 굳었다.

“…멍청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계약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면 하양이가 성체 드래곤으로 성장하는 순간 느껴야 할 고통을 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 그게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는 것도. 그래서, 공포와 마주하기 위해 온 거예요.”

알렉산더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 드래곤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서. 알렉산더 님이 일으킬 재해를 보며, 제가 느낄지 모를 고통을 조금이라도 체감하기 위해서요.”

알버트의 것과 비슷한 듯 다른 적색의 시선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알렉산더는 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한 말은 진심인지. 눈빛과 인상, 말투와 표정을 찬찬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시선을 받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리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미안한 거지?”

“알렉산더 님의 죽음을 이렇게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요. 누군가의 마지막이 이렇게 다뤄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리암은 드래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에게 알렉산더의 죽음은 로스투라투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용할 수단일 뿐이었다.

“물론 이게 알렉산더 님이 결정하신 최후라면 할 말은 없지만요.”

“…….”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장례식은 꼭 치러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히 가실 수 있도록.”

나는 하녀에 불과하니 장례식에 관해서 섣부른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노력하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의 장례식을 치러줄 셈이었다.

내 말에 알렉산더가 고개를 쓱 돌렸다.

“서로 이용하는 주제에 뭐 그리 예의를 차리는 건지 모르겠군.”

“그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고, 도리니까요.”

내 말에 알렉산더가 침묵했다. 입을 열었다 닫으며 말을 고르는 모습이, 정말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그래, 세상에 너 같은 사람도 있었지.”

회상하듯 중얼거린 알렉산더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알렉산더의 잇새로 희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하양이를 힐끔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 알렉산더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토록 어려웠던 일이, 네게는 참 쉽군.”

“…….”

“이것도 삶이겠지.”

알렉산더의 모습은 처음 봤을 때 그대로였지만, 그 순간 아주 깊은 잠에서 깨어난 현자를 떠올리게 했다.

그에게 위로를 건네려던 찰나에 알렉산더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마침 잘 왔네. 이참에 계약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히 알려주지.”

“그게 무슨….”

내가 무슨 말이냐 되물으려던 순간, 알렉산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죽을 때 옆에 붙어 있으란 얘기야.”

그의 등에 촘촘히 박힌 비늘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

방금 전까지 다채로운 감정을 쏟아내던 드래곤은-

“내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제 마지막을 알렸다.

그 순간 알렉산더는 책 속에서나 보았던 성체 드래곤처럼 거대해 보였다.

그는 느릿하게 걸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처음 나와 하양이가 방에 들어왔을 때 웅크리고 있던 공간이었다. 알렉산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이 내쉬는 한숨 소리가 유난히 컸다.

***

밖에 나온 나는 슈버트와 이야기를 나누는 리암을 발견했다. 그는 평소와는 달리 시종들이 입을 법한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현재 알렉산더의 상태를 전하자 리암은 메르시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알렉산더를 데리고 나왔다.

“그럼 슬슬 가야겠군. 연락해.”

“네.”

모두 바쁘게 대화하며 서로 동태를 살폈다. 일이 시작하기 전 하는 마지막 확인이었다. 메르시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일 다 끝나고 만나요, 언니! 돌아가기 전에 같이 만나서 놀 수 있으면 좋겠다.”

메르시의 지팡이가 허공에 불빛을 만드는가 싶더니 그녀가 자취를 감추었다. 리암은 안에서 데리고 나온 알렉산더를 슈버트에게 건넸다.

슈버트는 우울한 얼굴을 하며 알렉산더를 품에 안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암이 말했다.

“슈버트 남작은 파충류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제야 성에서 이동하기 전, 나에게 왜 하양이가 드래곤인지 말하지 않았냐 소리치던 게 이해가 갔다.

리암은 알렉산더 앞에 섰다.

“자, 드래곤. 왕과 얼마나 가까이 있고 싶은 건가?”

“이왕이면 바로 옆이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어렵지 않다.”

알렉산더의 말에 리암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슈버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슈버트의 복장도 아까 전과 달라져 있었다. 리암과 비슷한 시종 복장이었다. 아무래도 안에 들어갈 작정인가 보다.

고개를 돌린 알렉산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저 여자도,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돼.”

“…저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암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택의 정원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아니, 되도록 정말 가깝게.”

리암은 갑작스레 맞닥뜨린 문제에 신음했다.

“…재해 때문에 저 여자가 위험해지면, 저하를 뵐 낯이 없다.”

“저 여자한테도 이득이 되는 일일 거야. 그리고 네가 말하는 것처럼 다치는 일은 없을 거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너희가 원하는 계획도 없다.”

알렉산더가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맹세하지. 저 여자의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리암이 걱정하는 바를 잘 안다는 듯, 알렉산더가 단언했다. 리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산더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가 정해라, 인간. 내게 가까이 있을 건지, 아니면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건지.”

알렉산더의 눈은 맑았다. 마치 하양이처럼.

고민은 짧았다.

“갈게요.”

리암의 한숨 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는 저하께 뭐라 고하지, 라 중얼거리다 나를 응시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뒤처리는 네가 해라.”

“…예?”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저하께 네가 보고하라는 말이다.”

“아니, 공작님께서 왜 일개 하녀한테 일을 떠맡기시는 건가요!”

내가 생각해도 알버트가 화낼 것은 뻔했다. 계속 빌면 넘어갈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만!

리암이 내 시선을 피했다. 그가 슈버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덧붙였다.

“아, 참고로 슈버트도 나중에 네 도망에 협조할 예정이다.”

“예? 어떻게….”

리암과 슈버트가 눈을 마주쳤다. 둘이서 따로 나눈 이야기라도 있는 듯했다.

“원래 정보 쪽에서 일했던 애라서.”

슈버트가 후 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대로 말할 수 있겠네. 남작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밑바닥에서 구르던 참이었어서. 우리 저하께 짐이 되지 않으려는 모습, 인상적이야.”

뭐지, 이 말투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리암을 닮은 말투와 소년은 어디 가고…?

아까 전 메르시가 말한 슈버트의 본모습이란 이런 건가?

“…아까 전에 말투를 그렇게 감추시더니.”

“크, 흠! 네가 저하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 주기로 한 것뿐이야. 뭐, 음식도 맛있었고… 저하가 웃는 모습 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었고….”

내 말에 슈버트가 헛기침을 하며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를 인정해 주기로 한 거구나. 드디어 슈버트의 신임을 얻었다는 게 기뻤다. 그게 알버트에게서 도망가기로 한 이야기를 들은 후라는 건 좀 서글프지만.

그리고 슈버트의 말을 들으니 나는 확실히….

“저는 예전 말투가 더 좋은 것 같은데요.”

“나도 같은 의견이다.”

“아니, 사람이 계속 그런 딱딱한 말투를 쓰면 답답하다고!”

리암과 내가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슈버트가 뒤에서 투덜거렸다.

“이제 갈 시간인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슈버트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남동생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내가 알버트를 위해 떠날 계획을 세우는 걸 보며 경계심을 완전히 푼 모양이었다.

생긴 건 정말 강아지를 닮았는데, 행동은 저가 좋아하는 고양이 같았다.

슈버트가 앞장서고 나와 리암은 그를 따라 걸었다. 슈버트가 제 말투가 어떠냐며 구시렁거렸다. 리암이 그의 말을 근엄히 받아주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들으며 소리 죽여 웃었다.

이윽고 우리는 저택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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