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밤. 그림자에 물든 숲은 어둡다. 그 사이로 흐르는 건 적막뿐이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숨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곳이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메르시가 손에 쥔 지팡이를 흔들었다. 지팡이에는 그녀의 머리 색깔처럼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하이드(Hide).”
그녀의 시전어와 함께 우리의 몸이 순간 빛났다. 내 몸 주변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몸의 형태를 따라서 감싸는 얇은 막은 마치 비눗방울 같았다.
“이제 몸은 가려졌네요.”
X리포터에 나오는 투명 망토처럼 일행에게도 내 몸이 안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그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여기에 드래곤이 있는 건가요?”
“네, 궁과 가까운 숲이라서 안성맞춤이에요.”
메르시가 하양이를 열렬히 쳐다보다 답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건지 하양이가 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 숲, 그냥 숲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건지 메르시가 덧붙였다.
“로스투라투가 온갖 더러운 일을 할 때 쓰는 곳이에요. 사람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사냥당해요. 그는 그런 걸 좋아하니까.”
로스투라투가 사냥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쾌감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고자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누군가를 몰고, 잔인하게 고문하며 자신이 상대의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희열을 느끼는 변태였다.
“어제도 사람을 사냥하던 모습이 생생하네요.”
암살자들이 숲을 통해 궁으로 침투할 수 있는 만큼, 이곳의 보안은 철저했다. 선택된 사람이 아닌 이들이 미리 설치된 선을 넘으면 바로 살해당하는 마법을 걸어둔 것이다.
“그러면서 별장 안으로 하인과 무희들을 부르는 데는 어찌나 열심인지. 문란하게 놀면 자신의 성 기능이 돌아오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나 봐요.”
그 전에, 아예 기능 못 하도록 가운데 다리를 몇 번 잘라줘야 하는 건데. 메르시가 살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마법사들의 수장을 할 만큼 능력도 있는데, 성격까지 좋다. 로스투라투를 향한 신랄한 평가와, 호탕한 성격이 드러나는 가식 없는 태도가 좋았다.
나, 메르시가 정말 마음에 든다. 알고 지내면 든든할 것 같다. 나는 메르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언니.”
나보다 멋있으면 다 언니다. 내 말에 메르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언니예요? 저보다 나이 많다고 들었는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저 스무 살인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사람이라니. 내가 원래 있던 세계였다면 대학교 새내기 정도인데 수장이라고? 이 세계는 천재만 있나…?
“…지금 말하는 게 너무 멋있어서 언니라고 해버렸어요. 사람 속을 뻥 뚫어주는 말투랄까.”
내 말에 메르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대놓고 칭찬해 주는 사람 처음 봤어요. 하하, 나 왜 왕자님이 언니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 것 같은데.”
메르시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하는데 옆에서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슈버트가 오묘한 얼굴을 한 채 날 보고 있었다.
“…진짜 알 수 없는 여자군.”
“그런 말 하는 슈버트 님도 뭔가 숨기고 계신 것 같긴 합니다.”
나는 아까 메르시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그를 넌지시 떠보았다.
“예를 들자면 말투에서도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
“그만.”
“예, 알겠습니다. 작전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슈버트의 비밀이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비밀을 안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을 안게 된다는 거니까.
슈버트는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예프넨 후작은 로스투라투를 초대해 숲 안에 있는 별장에서 연회를 벌인다, 아니, 벌이고 있지.”
왕궁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는 이 숲은 로스투라투의 별장이 있는 사냥터였다. 궁보다 훨씬 작은 저택이지만 은밀하여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물론 겉으로 내건 타이틀은 ‘그냥 연회’이지만, 속내는 좀 달랐다.
고자인 로스투라투는 여색을 꽤나 밝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고자이기 때문에 더 밝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희는 그 연회를 초토화시킬 작정이고요.”
메르시가 즐거운 듯 씩 웃었다.
“나는 주변을 먼저 보면서 가겠다.”
앞에 나선 슈버트는 주변을 살피더니 적당히 높은 나무를 골라 순식간에 올라갔다.
오르는 동작이 잽싼 게 무슨 다람쥐 같았다. 슈버트가 올라간 나무를 보던 난 얼빠진 얼굴로 생각했다.
저건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에 가깝지 않나? 아니, 그런데 슈버트는 작위까지 있는 귀족이잖아…? 대체 정체가 뭐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메르시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 그럼 드래곤을 만나러 가볼까요?”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중간에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지만.
망토를 둘러싼 귀족들은 척 보기에도 값비싼 옷으로 차려입은 채 웃으며 걸어갔다. 그들 뒤에 사슬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요즘은 쓰레기에도 발이 달렸나.”
메르시의 목소리가 유독 시니컬했다.
나는 로스투라투를 만나러 가는 귀족들을 보며 알버트를 떠올렸다.
로스투라투가 자신의 별장에 초대할 정도면 꽤 가깝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저들도 알버트를 탑에 가두는 데 동의한 자들이겠지.
알버트는 탑 안에 갇혀 호화로운 음식 대신 내가 서툰 솜씨로 만드는 음식을 먹고, 심지어 지금은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저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며 방탕히 생활하고 있다.
알버트가 입던 옷을 떠올리니 마음이 안 좋아졌다. 아무리 옷걸이가 중요하다지만 탑에서 허름한 옷만 입었었고 이번에도 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제대로 챙겨입지도 못했는데.
나는 알버트가 저들과 같은 옷을 입고 우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저런 곳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어서 상상하기는 쉬웠다.
정말 이 세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내가 알버트에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빼앗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게 빙의 전의 ‘로제’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로제는 나니까.
나는 찔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열심히 메르시를 따라갔다.
마법으로 가려놓은 숲의 끝자락에는 조그만 오두막이 있었다.
슈버트는 나를 오두막 문 앞까지 안내한 뒤 뒤로 물러섰다.
“드래곤과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주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밖에 있도록 하겠다. 드래곤이 소멸하기 두어 시간 전에는 몸에서 빛이 나니, 바로 알려주도록.”
“네, 알겠습니다.”
나는 슈버트와 메르시에게 인사한 후 문고리를 잡았다. 품에 안겨 있는 하양이가 긴장했는지 꼼지락거리길 멈췄다.
끼이익. 오래된 오두막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오두막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으로 스며든 달빛 사이로, 하양이와 비슷한 체격의 새끼 드래곤이 보였다.
가쁜 숨을 내쉬며 웅크려 있던 청색 드래곤은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듣고선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은 알 수 없는 얼굴로 하양이를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너 아직까지 살아 있었냐?”
아무래도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하양이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잠시 후 하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차원으을 돌아다닌다고 했었지이….”
내 품에서 내려온 하양이는 청색 드래곤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두 마리의 새끼 드래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죽어가고 있구나.”
덤덤히 한 말은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나에게도 하양이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청색 새끼 드래곤에게 죽음의 그늘이 졌다. 눈앞의 드래곤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했다.
“인간 때문이지.”
청색 드래곤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가쁜 숨을 고르더니 짓씹듯 말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지. 믿을 것이 못 돼.”
청색 드래곤이 나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복수심에 가득 찬 드래곤의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나를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았다. 등 뒤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여기가 내 장례식장이 될 판인가? 순간 의심했지만, 알버트가 날 죽이려고 이곳에 보냈을 리는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하양이가 내 앞에 섰다. 알버트 앞에서와 다르게 차분한 분위기가 묘하게 평소와 달라 보였다.
“로제는 달라아….”
“다르긴 개뿔.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괜히 나서지 마.”
눈을 가늘게 뜬 드래곤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아… 너랑 나이는… 똑같거드은…?”
울컥한 하양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 아내려 했지만, 느릿한 말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청색 드래곤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힘차게 소리쳤다.
“내가 1분 더 빨리 태어났지. 그리고 물렁해 보이는 너보다 인간을 겪은 경험은 훨씬 많다, 드래곤 새끼야.”
음, 둘 다 새끼 드래곤이긴 한데, 그 새끼가 지금 말하는 새끼는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저 태도는 마치 꼰대 같군. 나는 그들의 말싸움에 끼어들려다 말았다.
이건 하양이의 일이었다. 내가 항상 나설 수도 없는 일이니 우선 하양이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이 옳았다.
“계약자가 되어주겠다고 거짓말하면서 써먹고 목숨까지 위협하던 인간들 만난 적 없으면 말하지 마. 뒤에서 나한테 칼 꽂으려던 사람이 한두 명이 아냐.”
드래곤이 눈을 내리깔았다. 배신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유난히 씁쓸해 보였다.
50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며 겪었을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하양이 앞에서 세상이 썩었다는 말을 그냥 들어주고 있기는 뭐했다. 하양이가 저런 말을 믿길 원하지도 않고.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쭈그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닌데요.”
“인간이 말이 많네.”
“인간이어서 말이 많은 거예요. 짧은 인생에 하고 싶은 말 매번 하지도 못하면 속에 담아두고 어떻게 살겠어요?”
내가 빙그레 웃자 청색 드래곤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가 하양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아직까지 계약자도 못 만난 모양인데, 나 죽는 거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건가? 너도 곧 죽을 운명인 주제에.”
“…….”
청색 드래곤은 너무도 당연한 태도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양이는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이런 걸 굳이 그냥 넘어가 줄 이유는 없지. 나는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당연하게 하양이가 죽을 거라 생각하시는데, 우리 하양이는 안 죽을 건데요. 커서 세기에 남을 만한 드래곤이 될 건데.”
청색 드래곤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양이, 하양이? 이내 그가 날 보며 움찔했다.
“이름도 뭐 그런 걸….”
황당한 듯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다 들렸다.